2016년 1월 24일 오늘날씨 매우추움 철원최저 영하24도, 서울 영하18도, 체감온도 영하 30도, 추운날 뭔 짓인지?
금원군 이영(錦原君 李齡), 하릉군 이인(河陵君 李鏻), 영제군 이석령(寧堤君 李錫齡)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심곡리 산119
금원군 이영(錦原君 李齡, 1513년 음력 6월 9일 ~ 1562년 음력 4월 7일)
조선 제11대 임금 중종과
남양군(南陽君) 홍경주(洪景舟)의 딸인 희빈 홍씨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
성은 이(李), 이름은 영(齡, 岭, 岺),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앙지(仰止)
1513년(중종 8년) 7월 11일(음력 6월 9일)에 중종과
그 후궁 귀인 홍씨(貴人 洪氏, 훗날 희빈으로 진봉)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봉성군의 친형이며, 인종과 명종 및 덕흥대원군의 이복형이다.
8살 때인 1520년(중종 15년) 음력 12월 27일 정식으로 금원군(錦原君)에 예봉(例封)되었다.
이후 중종은 한동안 자신의 자식들을 위해 집을 짓는 역사를 지속했는데,
일부에서 이러한 역사가 사치스럽다는 지적을 하여 중종이 감역관을 통해 법제를 위반하는지 조사케 하고,
이내 금원군의 집에 있는 서청(書廳)을 철거시켰다.
1535년(중종 30년) 음력 1월 4일에는 금원군이 자신의 종을 시켜
사헌부에 들어가 서리를 끌어내는 일을 저지르는 바람에 사간원의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당시 대신들은 금원군에 대한 파출을 요청하였으나, 중종은 윤허하지 않았다.
1552년(명종 7년)에는 문소전과 연은전의 도제조(都提調)를 겸하게 되고,
1553년(명종 8년) 사옹원의 도제조를,
1555년(명종 10년) 종부시(宗簿寺)의 도제조를 겸임하게 되었다.
1557년(명종 12년)에는 종친부의 일도 관장하게 되었다.
1559년(명종 14년) 음력 11월 금원군은 유교 국가였던 조선에서 승려들과 내통하고 불사를 올려 또 탄핵을 받았다.
이때 명종은 이복형인 금원군에 대해 추고하는 선에서 마무리를 짓고,
여러 차례에 걸쳐 대신들이 올린 금원군을 파직시키라는 상소는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1562년(명종 17년) 5월 9일(음력 4월 7일) 향년 50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장지는 거북점의 조짐이 좋지 못해 두번이나 바꾼 후 이듬해인
1563년(명종 18년) 음력 3월 7일 경기도 양주의 불광산 기슭에 안장되었다.
금원군의 묘가 있던 지역은 훗날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갈현동에 편입되었는데,
1970년 서울특별시의 택지 개발 확장 사업으로 인해 경기도 포천군 신북면 심곡리로 그 묘를 이장하였다.
인근에는 생모인 희빈 홍씨, 양자 하릉군, 하릉군의 양자 영제군의 묘소가 함께 있다.
송인(宋寅)은 금원군의 묘갈명을 지으면서, 금원군에 대해 사람이 순하고 소박하며 꾸밈이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금원군은 주색잡기에는 관심이 없었고,
다른 사람들과 내통하지 않고 깊은 곳에서 유유자적한 생활을 하였다고도 적고 있다.
금원군이 병이 들자 명종은 내의원을 보내어 치료케 하였으며, 이내 세상을 뜨자 매우 슬퍼하였다고 한다.
금원군은 좌찬성 행충훈부도사(左贊成 行忠勳府都事)에 추증된 해주 정씨 정승휴(鄭承休)의 딸과 결혼하였으며,
부인 정씨는 혼인 후 파징군부인(波澄郡夫人)의 작위를 받았다.
그러나 아들은 두지 못했고 딸만 하나 낳았는데, 딸은 남관(南琯)에게 시집을 가 1남 1녀를 두었다.
금원군의 후사는 창빈 안씨(昌嬪 安氏) 소생의 이복동생 덕흥군(德興君)의 차남 하릉정 인(河陵正 鏻)이 잇게 되었다.
친조부 : 조선 9대 국왕 성종
친조모 : 정현왕후 윤씨 아버지 : 중종
외조부 : 홍경주 어머니 : 희빈 홍씨 동생 : 봉성군 완
장인 : 해주 정씨(海州鄭氏) 충훈부도사(忠勳府都事) 정승휴 (鄭承休, 1488년 ~ 1534년)
부인 : 해주 정씨(海州鄭氏) 파징군부인 정씨 (波澄郡夫人 鄭氏, 생몰년 미상)
장녀 : 의령 남씨(宜寧南氏) 남관(南琯)의 처 조카,
양자 : 하릉군 인 - 금원군의 이복동생 덕흥군의 차남, 선조의 친형
금원군 묘역 후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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河陵君 李鏻(하릉군 이인, 1546년 5월 9일 ~ 1592년 6월 17일)
중종의 손자로 덕흥대원군과 하동부대부인 정씨의 둘째 아들이자 선조의 중형(仲兄)이다.
임진왜란이 터지자 왜군을 피해 피난하였으나
강원도 통천군에 도착했다가 왜군이 통천에까지 진입하자 목매어 자결하였다.
임진왜란 중 사망하여 한때 시신이 유실되기도 했으나 군수인 정구(鄭絿)에 의해 시신을 찾아 수습하였다.
본관은 전주, 휘는 인(鏻), 시호는 효정(孝貞)이다.
1546년(명종 1) 6월 6일(음력 5월 9일) 한성 인달방 도정궁(都正宮)에서 태어났다.
중종의 서손자이고, 법통상 아버지는 금원군 이영이며,
어머니는 충훈부도사(忠勳府都事) 해주인(海州人) 정승휴(鄭承休)의 딸로 파징군부인 정씨(波澄郡夫人 鄭氏)이다.
생부는 덕흥대원군이며, 생모는 하동부대부인 정씨이다.
부인은 참판(參判) 평산인(平山人) 신여종(申汝悰)의 딸로 평산군부인 신씨(平山郡夫人 申氏)이다.
중종의 서3남이자 이복 백부인 금원군에게 양자로 입양되어 하릉정(河陵正)에 제수받고,
선조가 즉위한 뒤 대원군묘(大院君廟, 덕흥궁)에 친향(親享)을 하고,
특별 승급되어 현록대부 하릉군(河陵君)에 봉작되었다.
1591년(선조 24) 종계변무가 성사되자 특별히 광국원종공신 1등의 한사람으로 책록되었다.
임진왜란이 터지자 금강산으로 피난, 은신하였다가 통천군까지 올라갔다. 그러나 통천에도 왜군이 진입하였다.
이때 관북(關北)의 토적(土賊)들이 왜적을 인도하여 산을 수색한다는 말을 듣고 핍박당할까 근심하다
1592년(선조 25) 7월 25일(음력 6월 17일)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사망 당시 향년 46세였다. 효정(孝貞)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한때 그의 시신은 유실되기도 하였다.
임진왜란의 전란 중 통천에 왜군이 닥치면서 그의 시신을 잃어버렸다가
통천군수 정구가 1593년(선조 26년) 그의 시신을 찾아냈다. 그 공로로 정구는 후일 당상관으로 승진했다.
아버지(양부) : 금원군 이영(錦原君 李岭, 1513년 - 1562년) - 중종의 3남
어머니(양모) : 파징군부인 정씨(波澄郡夫人 鄭氏, 1513년 - ?년), 충훈부도사(忠勳府都事)
증 의정부좌찬성겸판의금부사 해림군(海林君)해주인(海州人)정승휴(鄭承休, 1488년-1534년)의딸.
아버지(생부) :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1530년 - 1559년).
어머니(생모) : 하동부대부인 정씨(河東府大夫人 鄭氏, 1522년 - 1567년).
형 : 하원군 이정(河原君 李鋥, 1545년 ∼ 1597년).
동생 : 선조(宣祖, 1552년 - 1608년).
부인 : 평산군부인 신씨(平山郡夫人 申氏), 참판(參判) 평산인(平山人) 신여종(申汝悰)의 딸.
아들(양자) : 영제군 이석령(寧堤君 李錫齡, 1568년 ∼ 162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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寧堤君 李錫齡(영제군 이석령, 1568년 ~ 1623년)
선조의 중형(仲兄) 하릉군의 양자이다. 본관은 전주, 휘는 석령(錫齡), 자는 천여(天與), 시호는 영희(榮禧)이다.
부인은 대사헌 한숙의 손녀 당진군부인 한씨(唐津郡夫人 韓氏)
생부는 덕흥대원군 이초(德興大院君 李岧)의 아들 하원군이고, 생모는 남양군부인 홍씨(南陽郡夫人 洪氏)이다.
하원군의 3남으로 1568년(선조 1) 한성 인달방 도정궁에서 태어났다.
숙부 하릉군에게 출계하여 금원군의 손자가 되었으며, 초수 승헌대부 영제정(寧堤正)을 봉작받았다.
숭헌대부 영제군(寧堤君)으로 승진되고, 오위도총부 도총관과 사옹원 제조가 되었다.
1591년(선조 24) 광국원종공신 1등에 책록되었다.
1605년(선조 38) 호성원종2등공신(扈聖原從二等功臣)에 책록되었고,
1607년(선조 40) 가덕대부에 가자되고,
1610년(광해 2) 소덕대부 겸 도총관에 제수되었다.
1615년(광해 7) 흥록대부에 가자되고,
1621년(광해 13)에는 현록대부 정1품으로 승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왜적에게 삼경(三京)이 연이어 함락되니 화가 능안까지 미치게 되어
종실(宗室)을 선출하여 봉심케 하는데 태릉으로 가라는 왕명을 받들어 두려움없이 즉시 출발하여
주복야행(晝伏夜行)으로 무사히 거행하고 돌아와서 큰 공을 세워 많은 칭송을 받았다.
1623년(인조 1) 봄 아침 일찍 조회하다 쓰러져 향년 56세로 별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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