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천 창옥병 암각문(蒼玉屛 巖刻文)(포천 향토유적 41호)
포천시 창수면 주원리 687 조선 시대의 암각문.
창옥병(蒼玉屛)은 포천시 창수면에 있는 영평 8경중 영평 3경에 해당되며
글씨를 쓴 사람은 당시 대명필가인 석봉(石峯) 한호(韓濩)[1543~1605]이고,
바위에 새긴 이는 신이(辛夷)라는 이름의 석공이라 한다.
은 포천 창옥병은 선조 때 우의정,좌의정 영의정을 낸 박순(朴淳)[1523~1589]이 즐겨 찾던 경승지로서,
14간 영상에 재직하던 그가 영평으로 거처를 옮긴 때는 1586년(선조 19) 8월이다.
(李珥)가 탄핵되었을 때 그를 옹호하다가 도리어 탄핵을 받았다.
선조는 여러 차례 만류하였지만 스스로 물러나 지금의 포천시 창수면 옥병동에 거주하였다.
박순은 거처를 영평에 자리 잡은 뒤 창옥병 주변의 경치를 감상하며 지내면서
1588년(선조 21) 빼어난 8개소에 이름을 붙이고 이를 영평8경이라 하였다.
▲ 영평천 강가에 위치한 창옥병 암각문 전경
▲ 우측에 새겨진 산금대(散襟臺) 각자
▲ 바위 상단에는 한자로 ‘송절수정균조월신(松節水精筠操月神)’, ‘산금대(散襟臺)’,
조시시일 개광상적 적산군서 매련백학 대전수재 출산문편대어
(鳥時時一 箇匡牀寂 寂散群書 每憐白鶴 臺前水纔 出山門便帶淤)’ 등이 새겨져 있다.
▲ 바위글씨 우측으로 영평천을 오르면서 바위글씨들이 여러 곳 있는데, 대부분 석봉 한호의 글씨라고...
두 번째 만나는 바위글씨인 수경대(水鏡臺)에는 새겨진 시는 제이양정벽(第二養亭壁)이라는 시라 한다.
▲ 수경대(水鏡臺)에 새겨진 제이양정벽(第二養亭壁)
곡조시시문일개(谷鳥時時聞一箇) 골짜기에 새소리 때때로 들리고
광상적적산군서(匡牀寂寂山群書) 적적한 침상위엔 책들만 나뒹구네
매련백학대전수(每憐白鶴臺前水) 안타깝구나! 백학대 앞에 흐르는 물이
재출산문변대어(纔出山門便帶淤) 산 어귀 나서자마자 흙탕물이 될텐데
▲ 반달 모양의 바위에 새겨진 와준(窪尊)
▲ 와준 글씨 뒷편에 둥근 구멍이 있는데
사암(思庵) 박순(朴淳) 선생께서 막걸리를 부어 놓고 마시며, 영평천의 풍광을 즐겼다고...
▲ 영평천 가운데 위치한 와준(窪尊). 여름에는 글씨 아랫 부분까지 물이 잠겨...
▲ 토운상(吐雲床)
▲ 청냉담(淸泠潭) 각자.
▲ 장란(障蘭)이란 바위글씨도
옥병서원(玉屛書院)
건립시기 1658년(효종 9)
경기도 포천군 창수면 주원리에 있는 서원.
1658년(효종 9)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박순(朴淳)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698년(숙종 24)에 이의건(李義健)과 김수항(金壽恒)을 추가 배향하였으며,
1713년에 ‘옥병(玉屛)’이라고 사액되었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대원군의 서원철폐로 훼철되어,
위패는 서원터에 매안(埋安)하고 단을 설치하여 향사를 지내왔다.
1926년에 김성대(金聲大)·이화보(李和甫)·윤봉양(尹鳳陽)을 추가 배향하였고,
1978년에 이명우(李命雨)를 회장으로 한 옥병서원복원추진회를 결성하여
1980년에 복원하였다.
경내건물로는 6칸의 숭현각(崇賢閣), 신문(神門), 동서 협문(夾門), 박순의 신도비 등이 있다.
사우(祠宇)인 숭현각에는
박순을 주벽(主壁)으로 이의건·김수항·김성대·윤봉양·이화보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이 서원에서는 매년 3월 15일에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
제품은 5변(籩) 5두(豆)이다. 재산으로는 전답 5,000평이 있다.
문충공 사암 박순(文忠公 思菴 朴淳)
字 화숙(和叔), 號 사암(思菴), 諡 문충(文忠)
성균관전적, 홍문관응교, 성균관사성, 이조참의, 대사헌, 에조판서, 우의정, 좌의정
작품/저서 사암집
1523(중종 18)∼1589(선조 2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충주(忠州). 자는 화숙(和叔), 호는 사암(思菴). 은산군사(殷山郡事) 소(蘇)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성균관사 박지흥(朴智興)이고, 아버지는 우윤 박우(朴祐)이며, 어머니는 당악 김씨(棠岳)이다.
기묘명현(己卯名賢) 목사 박상(朴祥)의 조카이다. 서경덕(徐敬德)의 문인이다.
1540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1553년(명종 8) 정시 문과에 장원한 뒤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 홍문관수찬, 의정부사인 등을 거쳤다.
1561년 홍문관응교(弘文館應敎)로 있을 때 임백령(林百齡)의 시호 제정 문제에 관련,
윤원형(尹元衡)의 미움을 받고 파면되어 향리인 나주로 돌아왔다.
이듬 해 다시 기용되어 한산군수로 선정을 베풀었고, 1563년 성균관사성을 거쳐,
그 뒤 세자시강원보덕(世子侍講院輔德)·사헌부집의·홍문관직제학·
승정원동부승지·이조참의 등을 지냈다.
1565년 대사간이 되어 대사헌 이탁(李鐸)과 함께
윤원형을 탄핵해 포악한 척신 일당의 횡포를 제거한 주역이 되었다.
그 뒤 대사헌을 거쳐, 1566년 부제학에 임명되고, 이어 이조판서·예조판서를 겸임하였다.
1572년 우의정에 임명되고, 이듬 해 왕수인(王守仁)의 학술이 그릇되었음을 진술했으며, 이 해 좌의정에 올랐다.
그 뒤 1579년에는 영의정에 임용되어 약 15년간 재직하였다.
이이(李珥)가 탄핵되었을 때 그를 옹호하다가 도리어 양사(兩司 : 사헌부와 사간원)의 탄핵을 받고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나 영평(永平)백운산(白雲山)에 암자를 짓고 은거하였다.
일찍이 서경덕(徐敬德)에게 학문을 배워 성리학에 널리 통했으며, 특히 ≪주역≫에 대한 연구가 깊었다.
문장이 뛰어나고 시에 더욱 능해 당시(唐詩) 원화(元和)의 정통을 이었으며, 글씨도 잘 썼다.
중년에 이황(李滉)을 사사(師事)했고, 만년에 이이·성혼(成渾)과 깊이 사귀어
‘이 세 사람은 용모는 달라도 마음은 하나이다.’라고 할 정도였으며,
동향의 기대승(奇大升)과도 교분이 두터웠다.
나주월정서원(月井書院), 광주(光州)월봉서원(月峰書院), 개성화곡서원(花谷書院),
영평(永平)옥병서원(玉屛書院)에 제향되었고,
저서로는 ≪사암집≫ 7권이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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