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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효헌공 홍명호(孝憲公 洪明浩). 경기유형문화재 제24호

구름에 달

by 碧巖 2016. 9. 18. 2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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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헌공 홍명호(孝憲公 洪明浩)

경기도 안성시 일죽면 가리 산 32-50

 

 

 

1736(영조 12)1819(순조 19).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풍산(豊山).

初名은 홍명한(洪鳴漢). 는 공서(公舒).

홍만회(洪萬恢)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군수 홍중성(洪重聖)이고,

아버지는 홍진보(洪鎭輔)이며,

어머니는 윤두천(尹斗天)의 딸이다.

: 洪良漢홍양한. 개명 : 洪良浩홍양호

     :  洪挺漢홍정한 

; 洪樂游홍낙유

 

1763(영조 39) 진사가 되고, 1771년 참봉으로서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부수찬 등을 지냈다.

1779(정조 3)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 북경에 다녀와서 그 곳의 지리·풍속과 사정 등 문견(聞見)을 왕에게 소상하게 보고하였다.

 

그 뒤 대사간·중화부사·한성부우윤·승지·대사성·대사헌 등을 거쳐 평안감사가 되었는데,

정조 15(1791)에는 그의 아들 홍낙유(洪樂游)가 사관(史官)으로서 처벌당하게 되자, 이에 연루되어 무열사(武烈祠)를 수축할 때 유생들로부터 돈을 거두었다는 혐의로 파직되어 금갑도(金甲島)에 유배되었다.

 

정조 20(1796)에는 도승지(都承旨)에 이르렀고,

강화부 유수(江華府留守) · 수원부 유수(水原府留守)(순조 7) 등을 거쳐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1807~1810)이 되었다.

이어 예조 판서(禮曹判書)(1809) ·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1811)에 이르렀다.

정조 3(1779)에 동지 겸 사은서장관(冬至兼謝恩書狀官)으로서 중국에 갔는데,

그가 보고 들은 중국의 풍습 · 부세(賦稅)문제 · 성곽수축과 변경방략 등에 대한 글을 올리기도 했다.

 

또 채제공의 천주교 관련에 대해 극악(極惡)한 죄로 논단할 것을 주청하였다.

이어 순조 즉위년(1801)에는 정조(正祖)의 능() 축조를 위한 산릉도감 당상(山陵都監堂上)이 되었다가

공역(工役)을 지연시킨 죄로 삭직(削職)되기도 했다.

글씨를 잘 썼고, 수원에 있는 지지대비(遲遲臺碑)의 전제(篆題)를 썼다.

순조 20(1820)에 효헌(孝憲)이라는 시호(諡號)를 받았다.

묘소(墓所)는 현재 안성시 일죽면 가리에 있다.

 

 

 

 

 

 

 

 

 

 

 

 

 

 

 

 

 

 

 

 

 

 

 

 

 

 

 

 

 

 

 

 

 

 

 

 

 

 

 

 

 

 

 

 

 

 

 

 

 

 

벽암 두릉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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