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헌공 홍명호(孝憲公 洪明浩)
경기도 안성시 일죽면 가리 산 32-50
1736(영조 12)∼1819(순조 19).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풍산(豊山).
初名은 홍명한(洪鳴漢). 字는 공서(公舒).
홍만회(洪萬恢)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군수 홍중성(洪重聖)이고,
아버지는 홍진보(洪鎭輔)이며,
어머니는 윤두천(尹斗天)의 딸이다.
兄 : 洪良漢홍양한. 개명 : 洪良浩홍양호
: 洪挺漢홍정한
子 ; 洪樂游홍낙유
1763년(영조 39) 진사가 되고, 1771년 참봉으로서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부수찬 등을 지냈다.
1779년(정조 3)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 북경에 다녀와서 그 곳의 지리·풍속과 사정 등 문견(聞見)을 왕에게 소상하게 보고하였다.
그 뒤 대사간·중화부사·한성부우윤·승지·대사성·대사헌 등을 거쳐 평안감사가 되었는데,
정조 15년(1791)에는 그의 아들 홍낙유(洪樂游)가 사관(史官)으로서 처벌당하게 되자, 이에 연루되어 무열사(武烈祠)를 수축할 때 유생들로부터 돈을 거두었다는 혐의로 파직되어 금갑도(金甲島)에 유배되었다.
정조 20년(1796)에는 도승지(都承旨)에 이르렀고,
강화부 유수(江華府留守) · 수원부 유수(水原府留守)(순조 7년) 등을 거쳐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1807~1810년)이 되었다.
이어 예조 판서(禮曹判書)(1809) ·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1811)에 이르렀다.
정조 3년(1779)에 동지 겸 사은서장관(冬至兼謝恩書狀官)으로서 중국에 갔는데,
그가 보고 들은 중국의 풍습 · 부세(賦稅)문제 · 성곽수축과 변경방략 등에 대한 글을 올리기도 했다.
또 채제공의 천주교 관련에 대해 극악(極惡)한 죄로 논단할 것을 주청하였다.
이어 순조 즉위년(1801)에는 정조(正祖)의 능(陵) 축조를 위한 산릉도감 당상(山陵都監堂上)이 되었다가
공역(工役)을 지연시킨 죄로 삭직(削職)되기도 했다.
글씨를 잘 썼고, 수원에 있는 〈지지대비(遲遲臺碑)〉의 전제(篆題)를 썼다.
순조 20년(1820)에 효헌(孝憲)이라는 시호(諡號)를 받았다.
묘소(墓所)는 현재 안성시 일죽면 가리에 있다.
벽암 두릉연가
안성-전주이씨 서원군파 후손묘역, 부제학 이중구(李重龜) , 안성군수 이규수(李奎壽), 통덕랑 이시섭(李時燮),양양도호부사 이주의(李周儀) (0) | 2016.10.03 |
---|---|
안성-전주이씨 서원군파,장제부정 이원손(李源孫),이호,이언사,증 이조판서 이신성(李愼誠),충정공 송교 이목(忠正公 松郊 李楘),부제학 이지항(李之恒) (0) | 2016.10.02 |
안성-영창대군. 경기도기념물 제75호 (0) | 2016.09.14 |
안성-제정공최용소, 최연년. 안성시향토유적 제34호 (0) | 2016.09.11 |
안성-서운산 청룡사 (0) | 2016.09.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