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안성-전주이씨 서원군파,장제부정 이원손(李源孫),이호,이언사,증 이조판서 이신성(李愼誠),충정공 송교 이목(忠正公 松郊 李楘),부제학 이지항(李之恒)

구름에 달

by 碧巖 2016. 10. 2. 21:23

본문

728x90

 

 

全州李氏瑞原君派 後孫墓域

전주이씨 서원군파 후손묘역

경기도 안성시 보개면 북좌리 산8-2

경기도 안성시 보개면 북좌리에 있는 묘역이 경기도 기념물 제117호로 지정되어 있다.

조선 중기후기에 걸친 조성된 묘역으로,

원래 서울특별시 동작구 노량진동에 있던 것을

일제강점기인 1937년 조선총독부가 서원군파 묘역의 땅을 강제 매입함에 따라

1938년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정자동으로 강제 이장하였다.

그 후 또 분당지구의 신도시 개발로 인하여

1992년 경기도 안성시 보개면 북좌리 및 경기도 포천시 소흘읍 이곡리로 나뉘어 2차 이장되었다.

포천시 소흘읍 이곡리에는 기념물로 지정되지 않았으나

효령대군(孝零大君)의 次男 서원군(瑞原君)과 그의 정부인 무덤 및 그 후손들의 묘역이 있으며

효안제(서원군의 제실)도 그곳에 모셔져 있다.

2차에 걸친 이장으로특히 1차 이장 때에 묘역이 심하게 변모하였다.

 

이 중에서 안성시 보개면 북좌리에는

효령대군(孝零大君) 차남次男, 서원군(瑞原君) 이친

5대손인 이신성(李愼誠)

그의 아들인 이목(李楘),

그의 손자인 이지항(李之恒)의 묘와 신도비(神道碑)등이

1989년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이신성신도비

이신성은 1597(선조 12)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한 뒤 임진왜란 때 왕을 호종하였고,

사옹원봉사(司饔院奉事)를 지냈으며

사후에 이조판서에 증직되었다.

 

그의 묘역은 묘표(墓表판석(板石향로석 각 1기와

문인석(文人石능 앞에 세운 文官형상의 돌) 2기 그리고 신도비(神道碑) 1기가 있다.

봉분은 부인과 쌍분으로 높이 120에 직경 140이며,

상석(床石)과 향로석은 160×95×2532×26의 규모이며 재질은 화강암이다.

 

묘표는 귀부(龜趺: 거북 모양 비석의 받침돌)가 비치고 있으며,

이수(螭首: 비석의 머리)는 용이 여의주를 움켜쥔 형상이다.

규모는 비신이 109×57×19, 귀부가 180×128×57, 이수는 68×28×50이다.

 

묘액(猫額)

증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도총관 행봉직랑사옹원봉사 이공신성지묘

증정부인 원주변씨 증정부인 광주김씨 부

(贈資憲大夫 吏曹判書兼知義禁府使五衛都摠府都摠管行奉直郞司甕院奉事李公愼誠之墓

贈貞夫人 原州邊氏 贈貞夫人 廣州金氏 祔)이라 기록하였다.

 

망주석(무덤 앞에 세운 여덟 모로 깎은 한 쌍의 돌기둥)은 당초문(唐草紋)과 운문(雲紋)이 새겨져 있고,

문인석은 173×59의 규모이다.

신도비는 200×87×43로 가첨석(加檐石)160×50×54에 받침돌은 168×132×64,

비문은 남구만(南九萬)이 짓고 윤덕준(尹德駿)이 전액(篆額비석의 상부에 전서체로 글을 씀.)하였다.

 

이목은 선조인조대의 문신으로 는 문백(文伯), 는 송교(松郊)이며

이신성의 아들로 성혼(成渾)과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이다.

1612(광해군 4) 식년(式年)문과에 급제한 이래 병조좌랑(兵曹佐郞) 화의에 반대했다.

죽은 후에 좌찬성(左贊成)에 증직되고 諡號는 충정(忠正)이다.

 

묘역에는 묘갈(작은 돌비석) 1, 상석 1, 망주석과 문인석 각 2, 신도비 1기가 하단에 있다.

봉분의 높이는 90, 직경 380이며, 상석은 154×94×28이다.

묘갈은 비신이 116×56×18이며 이수는 66×27×45이고, 대석은 122×78×11크기이다.

 

비액은

증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겸 영경연 홍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세자사 행가의대부 사헌부 대사헌 겸

동지경연 춘추관 성균관사 세자좌부빈객 이공목지묘 증 정경부인 장수황씨 부좌

(贈大匡輔國  崇祿大夫議政府 領議政兼 領經筵 弘文館 春秋館 觀象監事 世子師 行嘉義大夫 司憲府 大司憲 兼

同知經筵 春秋館 成均館事 世子左副賓客 李公之墓 贈 貞敬夫人 長水黃氏 祔左)’의 명문(銘文)이 있다.

 

망주석의 높이 152로 당초문과 운문이 조식(彫飾: 조각하여 장식됨)되고, 문인석은 높이 162, 견폭 44의 규모이다.

신도비는 비신이 212×87×23이며, 귀부는 200×124×54의 크기이다.

이수는 82×117×37로 두 마리 용이 여의주를 다투는 형상인데 조각 수법이 매우 사실적이다.

비문은 김상헌(金尙憲)이 짓고 오준(吳竣)이 쓰고 김광현(金光炫)이 전액하였다.

 

이지항은 이목의 아들로 부제학(副提學)을 지냈다. 그의 묘역은 약 40평으로 묘표 1, 상석 1, 문인석 2기가 있다.

묘액에는 부제학 이지항지묘 배평산신씨 부좌(副提學 李之恒之墓 配平山申氏 祔左)’의 명문이 있으며,

묘표는 92×42×17의 크기이다.

 

개석(뚜껑돌, 가첨석)55×19, 상석은 115×75×21, 문인석은 164×35의 규모이다.

이 묘역은 조선시대 문중묘의 원형을 잘 보존한 형태이다.

묘역에 있는 금석문의 조형미와 형식 등이 16세기 이래의 묘제 변천사와 조각사를 잘 보여주는 귀중한 유적이다.

 

 

                                      이목 신도비

 

 

 

 

 

 

 

 

 

 

 

 

 

증 이조판서 지의금부사 이신성(李愼誠)의  증조부 장제부정 이원손(李源孫)

 

 

 

 

 

 

彰善大夫 長堤副正 李源孫墓 配光山鄭氏 祔左 配南陽房氏 祔左

창선대부 장제부정 이원손묘 배광산정씨 부좌 배남양방씨 부좌

 

 

 

 

 

 

 

 

 

 

 

묘역 후면의 산세와 암석들

 

 

 

 

 

증 이조판서 지의금부사 李愼誠이신성 祖父, 禮賓寺別坐예빈시별좌 李浩이호 묘역

 

 

 

禮賓別坐全州李公浩  淑人龍仁李氏祔左 墓

예빈별좌전주이공호  숙인용인이씨부좌 묘

 

 

증 이조판서 지의금부사 이신성(李愼誠)의 부친  홍천현감 이언사(李彦師) 묘역

운방(雲房)

효령대군 이보(李補)의 후손

   조부  장제부정 이원손(李源孫)

   부친 예빈시별좌  이호(李浩)

           행  홍천현감 증 이조참의 이언사(李彦師)

 

 

 

行縣監李彦墓 配南陽洪氏祔左

행현감이언사묘 배남양홍씨부좌

===========================================================================================

 

 

증 이조판서 지의금부사 이신성(李愼誠) 묘역

 

이신성(李愼誠)

증 이조판서 지의금부사 좌찬성, 행 사옹원봉사,

1552(명종 7)1596(선조 29).

본관은 전주(全州). 는 흠중(欽仲). 孝寧大君(효령대군) 이보(李補)6대손이며,

예빈시별좌 이호(李浩)의 손자이다.

홍주(홍천)현감 이언사(李彦師)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감역(監役) 희숙(希淑)의 딸이다.

배위는 원주변씨 사과(司果) 극성(克誠) 딸과, 광주김씨 김경태(金景泰)의 딸이다.

 

율곡 이이(李珥)와 우계 성혼(成渾)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학문에 전념하여 과거에 뜻을 두지 않다가 모친을 위하여 1579(선조 12) 사마시에 입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갔다. 재중(齋中) 장의(掌議)로 이조판서 이이(李珥)가 동인 등의 모함으로 탄핵을 받자

동료유생들을 이끌고 그의 신구(伸救)를 상소,

탄핵의 주동자인 허봉(許篈), 박근원(朴謹元), 송응개(宋應漑) 등을 유배하게 하였다.

1583(선조 16) 관천(官薦)으로 정릉참봉에 제수되었고, 이어 사옹원봉사에 역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시 왕을 호종하여 개성에 이르렀을 때 상원군수인 동생 이충성(李忠誠)으로부터

봉양하던 모친이 전란으로 행방불명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사직하였다.

수 일만에 양주에서 어머니를 상봉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별세하므로

장례를 치른 뒤 함열(咸悅) 강성촌에 우거하였다

아들 이목(李楘)이 귀하게 되어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묘는 금천현 동면(衿川縣 東面)[서울시 동작구 노량진)에 위치해 있었다가,

성남시 정자동으로 천장하였다.

1992년 다시 경기도 안성시 보개면 북좌리 보개산으로 옮겼다.

신도비는 좌의정 김상헌(金尙憲)이 짓고, 형조판서 오준(吳竣)이 썼으며

이조참판 김광현(金光炫)이 전액(篆額)을 하였다경기도 기념물 117호이다.

 

 

 

 

 

贈資憲大夫吏曹判書兼 知義禁府事 五衛都摠府都摠管 行奉直郞司甕院奉事 李公愼誠之墓

증자헌대부이조판서겸 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도총관 행봉직랑사옹원봉사 이공신성지묘

贈貞夫人原州邊氏 贈貞夫人廣州金氏祔

증정부인원주변씨 증정부인광주김씨부

 

 

 

 

 

 

=========================================================================================

 

 

증 이조판서 이신성(李愼誠)의 장자 증 영의정 이목(李楘) 묘역

 

 

 

충정공 송교 이목(忠正公 松郊 李楘)1572(선조 5)1646(인조 24).

문백文伯. 號 松郊송교. 諡號 忠正충정.

효령대군(孝寧大君)7대손으로, 아버지는 사옹원봉사 신성(愼誠)이다.

어려서부터 글읽기를 좋아하고 예절을 잘 지켰으며,

13세에 어머니상을 당해서도 의식과 예절에 어긋남이 없었다 한다.

성혼(成渾) 장생(金長生)의 문하에 나가 학문을 배우고 의리를 깨달았다.

1603(선조 36) 생원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서 공부하던 중

스승 성혼이 정인홍(鄭仁弘) 등의 무고로 관작을 추탈당한 사실에 분개해

1608년 성균관 유생 500여 인과 지방 유생들과 함께 신원(伸寃)을 소청하였다.

또 이황(李滉)의 문묘종사(文廟從祀)를 반대하는

정인홍을 청금록(靑衿錄 : 성균관·향교·서원등에 비치된 유생 명부)에서 삭제하도록 하였다.

 

1612(광해군 4) 식년 문과에 갑과로 급제하고,

사재감직장(司宰監直長병조좌랑 등을 역임하다가 1615년 간신들의 무고로 파직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과 함께 출사해, 정언·수찬·교리 등을 지냈다.

1624(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공주로 왕을 호종(扈從)하고,

반정공신 이귀(李貴)를 패전의 죄로 탄핵해 목베기를 청하였다.

1626년 대사간에 승진하고, 다음 해 정묘호란 때에는 강화도로 왕을 호종했으며,

그 뒤 부제학·형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1636년 겨울 병자호란 때에 남한산성으로 왕을 호종해, 협수사(協守使)로 성 위에 올라가 지키며,

모진 풍설에도 게을리하는 일이 없었고 화의를 적극 배척하였다고 한다.

환도 뒤에, 윤황(尹煌) 등이 척화한 일로 유배되자 글을 올려 자핵(自劾)하고 물러났다.

 

학문이 깊고 지조가 있으며, 유학자 김집(金集)과 친해 모든 일을 의논해서 처리하였다.

뒤에 다시 왕의 부름을 받아 대사헌·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 등을 역임하고,

1643년 부제학으로 원손보양관(元孫輔養官)을 겸임하였다.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저서로는송교유고가 있다.

 

 

 

贈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領議政兼 領經筵弘文館禮文館 春秋館觀象監事世子師

증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겸 영경연홍문관예문관 춘추관관상감사세자사

行嘉義大夫司憲府大司憲兼 同知經筵春秋館成均館事 世子左副賓客李公之墓 贈貞敬夫人長水黃氏祔左

행가의대부사헌부대사헌겸 동지경연춘추관성균관사 세자좌부빈객이공목지묘 증정경부인장수황씨부좌

 

 

 

 

 

 

 

 

===========================================================================================

 

 

증 이조판서 지의금부사 이신성(李愼誠)의 장손 부제학 이지항(李之恒) 묘역

 

 

 

 

 

 

부제학 이지항(李之恒) 1605(선조 38)1654(효종 5).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월여(月如)이다.

아버지는 대사헌 이목(李楘)이고 어머니는 장수황씨로 현감 황우(黃佑)의 딸이다.

부인은 증 정부인 평산신씨로 유수 신감(申鑑)의 딸이다.

1618년 경부터 송둔암(宋芚菴) 현주(玄洲) 조찬한(趙纘韓)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627(인조 5) 식년시에 생원으로 합격하였고,

선교랑(宣敎郞)에 제수된 뒤 1633(인조 11) 식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가주서에 제수되었다.

1637년 예문관봉교(藝文館奉敎)에 승진되었고,

그 후 승정원주서로 옮기었다가 성균관전적을 거쳐, 그해 9월 홍산현감(鴻山縣監)으로 나갔다.

1643(인조 21) 다시 내직으로 들어와 성균관직강, 홍문관수찬, 사간원헌납)

역임한 후 이듬해 병조참지(兵曹參知)가 되었다.

 

1645년 우부승지를 거쳐 우승지(右承旨)에 오르고,

이듬해에는 다시 배천군수(白川郡守)로 나갔다가 다시 들어와 승문원제조가 되었다.

1649(인조 27) 대사간이 되어 한성판윤 이경엄(李景嚴)을 탄핵, 파직시키고,

이듬해 효종 즉위 후 좌부승지(左副承旨)에 제수되어

인조실록편찬에 수찬관(修撰官) 으로서 삼방당상(三房堂上)을 겸하였다.

1651(효종 2) 홍문관부제학이 되었는데,

이듬해 김자점(金自點)의 옥사 때 연루되었던

신면(申冕)의 사건으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대흥(大興)으로 유배되었고,

다시 춘천에 이배되었다가 곧 풀려나 1653(효종 4) 전면 사유(赦宥)되어 다시 직첩(職牒)이 내려졌다.


 

 

副提學李之恒之墓  配平山申氏祔左

부제학이지항지묘  배평산신씨부좌


 

 

//전주이씨 서원군파 증 이조판서 지의금부사 이신성(李愼誠) 가계//

  5대조 효령대군 이보(李補) 6대손 李愼誠 이신성

고조부 서원군 이안공 이친(瑞原君 夷安公 李𡩁), 효령대군 차남

증조부 장제부정 이원손(李源孫)

    조부 예빈시별좌 이호(李浩)

    부친 홍산현감 이언사(李彦師)

            증 이조판서 지의금부사 이신성(李愼誠), 좌찬성

                 자 증 영의정 충정공 송교 이목(忠正公 松郊 李楘,1572~1646인조24)

                      손자 부제학 이지항(李之恒,1605~1654)

                          증손 문검열부제학 이중구(李重龜)

                              현손 안성군수 이규수(李奎壽)

                                 5대손 문학행의 이도형(李道衡) 文學行誼

                                    6대손 통덕랑 이시섭(李時燮)

                                            양양도호부사 이주의(李周儀)

 

 

벽암두릉연가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