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안성-영창대군. 경기도기념물 제75호

구름에 달

by 碧巖 2016. 9. 14. 20:58

본문

728x90


永昌大君 유택 경기도 안성시 일죽면 고은리 

1606(선조 39)1614(광해군 6)

조선 중기의 왕자로 선조의 적자(嫡子)이며 14번째 아들.

경기도기념물 제75


조선 제14대왕 선조(이균) 1567~1608

선조는 총8명의 부인에게서 1411녀의 자녀를 얻었으며 ,

정비 의인왕후는 몸이 약해 아이가 없었으며,

계비 인목왕후가 영창대군과 정명공주를 ,

공빈 김씨가 광해군과 임해군등 2남을,

정빈 홍씨가 11녀를,

온빈 한씨가 31녀를 낳았다.

선조가 서거하였을 때 정명공주가 6, 영창대군이 3살 이였다.

 

*정비 의인왕후 박씨(1555~1632)

        번성부원군 박응순의 딸로 1555년에 태어나 1569 왕비에 책봉되어 가례를 행하였으나

        몸이 허약하여 아이를 낳지 못했다고 합니다.1600년 향년 4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으며

        능은 목릉이며 선조와 함께 묻혀있다.

*계비 인목왕후 김씨(1584~1632)

        연흥부원군 김제남의 딸로 1584년에 태어났으며 1600년 정비 의인왕후 박씨가 사망한후 1602

           19세의 나이로 왕비에 책봉, 1606년에 영창대군을 낳고

        이 당시 광해군은 세자의 지위에 있었으며

        실권자인 유영경이 적통론에 입각하여 영창대군을 세자로 추대하려 하였으나

        선조가 급사하고 광해군이 즉위하게 되자

        유영경 일파는 몰락하게 되고 대북파가 정권을 잡게 되었다.

        이후 왕통의 취약성을 은폐하기 위해

        선조의 첫째 아들인 임해군을 살해하고 이어서 영창대군을 폐위시킨 뒤 마찬가지로 살해한다.

           또한 인목왕후의 아버지인 김제남을 사사, 인목왕후를 폐비시킨 후 서궁으로 유폐시키고,

        이 후 광해군의 패륜행위는 정변의 구실을 주어 인조반정을 일어나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광해군은 폐위되고 인목왕후는 복호되어 대왕대비가 되어

        인조의 왕통을 승인한 왕실 최고의 어른 위치에 자리하게 된다.

           이후 16324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다.

           소생으로는 영창대군 외에 정명공주가 있다.

*영창대군 (1606~1614)

       선조의 14명의 아들 중 유일한 적출이며 인목왕후 김씨의 소생이다.

      1606년 출생하였으며 이름은 㼁(의)라고 한다.

      광해군에 의해 강화도에 유배된 후 살해되었다고 하며, 당시 나이 아홉 살이었다.

      이후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서 관작이 복구되었다.


*영창대군 (1606~1614)이름은 의().

선조의 열네번째 아들로 어머니는 인목왕후(仁穆王后)로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김제남(金悌男)의 딸이다.

선조의 아들 중 유일한 정비 소생으로 왕의 특별한 총애를 받았다.

선조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권정례(權停例: 절차를 다 밟지 아니하고 거행하는 의식)로 공빈 김씨(恭嬪金氏)의 소생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였다.

그러나 그 뒤 정비의 소생인 영창대군이 태어나자 선조는 세자를 바꾸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당시 실권을 잡고 있던 유영경(柳永慶)을 위시한 소북파(小北派)가 이 뜻에 영합했으나,

선조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실현되지 못하였다.

왕은 죽으면서 대신들에게 영창대군을 돌봐달라는 유교(遺敎)를 내려 뒷일을 부탁하였다.

이 사실로 광해군을 지지하던 이이첨(李爾瞻) 등 대북파의 미움을 받게 되었다.

 

그러던 중 1613(광해군 5) 소양강을 무대로 시주(詩酒)를 즐기던

서양갑(徐羊甲박응서(朴應犀) 7명의 서출들이 역모를 꾸몄다는 이른바 ‘7서의 옥이 일어났다.

 

이이첨 등은 이 역모 사건에 그들이 영창대군을 옹립하고 영창의 외조부 김제남도 관계한 것으로 진술을 유도하였다.

이 결과로 영창대군은 서인으로 강등되어 강화도에 위리안치되었다.

 

그 뒤 조야에서는 끊임없이 구원의 상소 등이 이어졌고,

형제의 의를 따지는 전은설(全恩說)

여덟 살밖에 안된 유자(幼子: 어린 아이)’라는 이유로 그를 비호하였다.

그러나 대북파의 계속된 요구로 이듬해 봄에 이이첨 등의 명을 받은 강화부사 정항(鄭沆)에 의해 살해되었다.

광해군일기에 의하면 정항이 영창대군을 굶겨서 죽게 하였다거나

                                 정항이 온돌을 뜨겁게 달구어 영창대군을 증살(蒸殺)했다고 되어 있으나,

인조실록에 의하면 광해군의 밀명을 받은 별장(別將) 이정표(李廷彪)

                               음식물에 잿물을 넣어 영창대군을 죽게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어 양자 사이에 논란이 있다.

1623년 인조반정 후 관작이 복구되었다






                          永昌大君贈諡昭愍公之墓

                          영창대군증시소민공지묘



                   天啓三年閏十月丁酉1623년윤10

                   天啓五年三月丙子立 16253월세움








                     朝鮮國王子永昌大君諱㼁 之墓

                     조선국왕자영창대군휘의 지묘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