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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구연서원 관수루 龜淵書院 觀水樓

구름에 달

by 碧巖 2017. 9. 15. 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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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연서원 관수루, 龜淵書院 觀水樓

경상남도 시도유형문화재 제422호 

경남 거창군 위천면 황산리 769번지

연서원의 문루

구연서원의 문루인 관수루는 구연서원을 짓고도 한참이 지난 1740년에 건축됐다.

병산서원의 만대루, 남계서원의 풍영루와 마찬가지로

누 아래는 출입문인 외삼문 역할을 하고 누 위의 마루는 주변경관을 감상하며 휴식을 하거나,

시회를 열고 강학하는 곳이다.

관수맹자》〈진심장구상편 물을 보는데 방법이 있으니 반드시 그 흐름을 봐야 한다.

흐르는 물은 웅덩이를 채우지 않고는 다음으로 흐르지 않는다.

 觀水有術 必觀其瀾 流水之爲物也 不盈科不行에서 가져왔다.












산고수장-요수 신권愼權1501~1573




석곡성선생유적비- 성팽년成彭年

成彭年 1540(중종 35)1594(선조 27).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창녕(昌寧). 는 이옹(頤翁), 는 석곡(石谷). 안음(安陰) 출신. 아버지는 교위(校尉) 성한량(成漢良)이다.

1564(명종 19)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유생으로 있었다.

그러던 중 1569(선조 2) 아버지가 죽자 학업을 그만두고 오직 어머니에게 효성을 다하였다.

효행으로 천거받아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면(金沔)이 고령·거창·현풍 등 경상도 지역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이 때 정유명(鄭惟明) 등과 함께 안음에서 기병유사(起兵有司)로 창의문(倡義文)을 발통하는 등 김면의 참모가 되어 의병활동을 하였다. 시문과 글씨에 뛰어났고, 의약(醫藥복서(卜筮산경(山經지지(地誌) 등 유학 이외의 분야도 두루 섭렵하였다. 지평에 추증되고, 안의(安義)의 구연사(龜淵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문집인 석곡집(石谷集)이 있다.











구연서원은 원래 조선 전기의 학자 요수(樂水) 신권(愼權, 1501~1573)선생이

1540년 서당을 세워 제자들을 가르치던 구주서당(龜州書堂) 자리였는데,

1694(숙종 20)에 그의 덕행을 기리기 위해 세운 서당이다..

구연서원의 문루인 관수루는 2005113일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22호로 지정되었으며,

현재 거창신씨 요수종중에서 관리해오고 있다.

이 문루는 구연서원 건립 후 반세기 가량 지난

1740(영조 16)에 문인 화가로 유명한 조영석(趙榮祏)이 안음현감을 역임할 때 지었다고 하며,

1868(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될 때 이 건물도 영향을 받았으나,

이후 다시 구연서원 건물이 중수될 때 이 문루도 함께 중건된 것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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