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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문효공 옥계 노진(文孝公 玉溪 盧禛 ) 묘 신도비, 경남 유형문화재 제300호.

구름에 달

by 碧巖 2017. 11. 10. 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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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효공 옥계 노진

文孝公 玉溪 盧禛

경상남도 함양군 지곡면 평촌리 산32  

신도비 묘표-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00.

 

崇仁門숭인문

 

履露閣이로각

 

 

 

문효공 옥계 노진文孝公 玉溪 盧禛

 

1518(중종 13)1578(선조 1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풍천(豊川). 자응(子膺), 옥계(玉溪칙암(則庵). 함양 출신.

예조참판 노숙동(盧叔仝)의 증손, 할아버지는 노분(盧昐),

아버지는 참봉 노우명(盧友明), 어머니는 사성원 권시민(權時敏)의 딸.

 

1537(중종 32) 생원시에 합격하고, 1546(명종 1) 증광 문과에 을과로 급제,

승문원의 천거로 박사가 되고, 전적·예조의 낭관을 거쳐 1555(명종 10) 지례현감(知禮縣監)으로 나갔다.

그곳에서 선정을 베풀어 높은 치성(治聲)을 들었으며 청백리로 뽑혔다.

 

1558(명종 13) 필선·부응교가 되고 이듬해 장령·검상·사인·집의·직제학을 지냈다.

1560(명종 15) 형조참의를 거쳐 도승지가 되었는데,

시골에 계신 늙은 어머니의 봉양을 위하여 외직을 지원하여 담양부사·진주목사를 지냈다.

 

1567(명종 22) 이조참의로 있다가 충청도관찰사와 전주부윤이 되어 선정을 베풀었고,

다시 부제학에 임명되어 중앙으로 들어왔다.

1571(선조 4) 늙은 어머니의 봉양을 위하여 다시 외직으로 나갈 것을 허가받아,

친가와 가까운 곤양(昆陽)의 군수(郡守)가 되었다.

 

1572년 대사간·이조참의가 되고 경상도관찰사·대사헌 등을 지냈다.

1575(선조 8) 예조판서에 올랐으나 사퇴하고

그 뒤 대사헌·이조판서·형조판서·공조판서·예조판서 등의 벼슬에 연배(連拜)되었으나, 와병으로 나가지 않았다.

 

평소에 기대승(奇大升노수신(盧守愼김인후(金麟厚) 등의 학자들과 도의(道義)로 교유하였다.

효로써 정려(旌閭)가 세워졌고, 남원의 창주서원(滄州書院), 함양의 당주서원(溏州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저서로는 옥계문집(玉溪文集)이 있다.     諡號는 문효(文孝)이다.

 

 

 

資憲大夫吏曹判書兼 同知經筵春秋館事藝文館提學 贈諡文孝公玉溪盧先生之墓

자헌대부이조판서겸 동지경연춘추관사예문관제학 증시문효공옥계노선생지묘

 

 

 

 

 

 

                                 정부인안씨지묘

 

 

 

함양 평촌리옥계신도비 및 부부 묘표

咸陽 坪村里玉溪神道碑 夫婦 墓表

경상남도 함양군 지곡면 평촌리 산32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00.

전체 높이 3.28m, 비신의 높이 1.85m, 너비 85, 두께 18.5. 이수의 높이 78, 너비 120, 두께 50.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청백리인 노진(盧禛, 15181578)의 생전 행장(行狀)을 새긴 신도비이다.

노진은 세종 때의 문신이며 청백리로 명성을 떨친

송재(松齋)노숙동(盧叔仝)의 증손으로, 대사간·대사헌과 예조·병조·이조 판서를 지냈다.

 

신도비의 비문은 이정구(李廷龜)가 짓고, 글씨는 신익성(申翊聖)이 썼다.

신도비에 사용된 석재는 황해도산 해석(海石: 속돌)이다.

귀부형 좌대(座臺) 위에 비신을 세우고, 그 위에 여섯 마리의 용이 조각된 이수를 놓아 완성하였다.

조선시대 사대부의 신도비 모습을 잘 보여주는 것으로, 금석문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된다.

 

노진[盧禛]의 신도비명(神道碑銘) -이정귀(李廷龜)

有明朝鮮國資憲大夫吏曹判書兼同知經筵春秋館事藝文館提學贈諡文孝公玉溪盧先生神道碑銘幷序

 

옛날 우리 선묘(宣廟, 선조)께서 온 정력을 기울여 정치에 힘을 쓰며 유신(儒臣)을 존중하여 수용하기 좋아할 즈음에,

그 이조 판서(吏曹判書) 옥계(玉溪) 노공(盧公, 노진)은 도덕(道德)과 문행(文行)으로 일세를 풍미(風靡)하였는데,

얼마 아니 되어 서울의 셋집에서 졸()하니, 선묘께서 슬퍼하고 아깝게 여겨 정무(政務)를 쉬고 제사를 내렸으며,

부의를 일반 예보다 수를 더하였다. 그해에 예조(禮曹)에서 공의 효행(孝行)을 아뢰자,

선묘께서는 더욱 아름답게 여겨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공이 살던 이려(里閭)에 정문(旌門)를 세워서 표창하게 하였다.

 

공의 휘()는 진()이요, ()는 계응(季膺)이다.

늦게 거주를 옥계(玉溪)에 정하여 삶으로 해서 배우러 오는 사람들이 옥계 선생(玉溪先生)’이라 일컬었다.

그 선대의 계통은 풍천(豐川)에서 나와 국자 진사(國子進士) 휘 유()가 곧 그 시조(始祖)이다.

대대로 관작이 이어졌는데, 고려(高麗) 말에 노()를 피하여 함양(咸陽)으로 옮겨 살면서 드디어 함양 사람이 되었다. 아조(我朝)에 들어와 휘 숙동(叔仝)은 문장과 청백(淸白)으로 영묘조(英廟朝, 세종조)에 알려졌고,

벼슬은 예조 참판(禮曹參判)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에 이르렀다.

아들 휘 분()은 두 번이나 과거에 급제하여 예문관 교리(藝文館校理)가 되었고,

3남을 두어 모두 진사(進士)에 입격하였는데, 그 둘째가 가장 어질어서 학문을 좋아하고 뜻을 지켰으며

그 당()의 이름을 신고(信古)’라 하였으니,

곧 공의 고()로서 휘()는 우명(友明)인데, 모재공(慕齋公) 김공(金公, 김안국(金安國))이 조정(朝廷)에 추천하여

현릉 참봉(顯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아니하였으며,

안동 권씨(安東權氏) 생원(生員) 시민(時敏)의 딸과 혼인하였다.

 

정덕(正德, 명 무종(明武宗)의 연호) 무인년(戊寅年, 1518년 중종 13)에 공을 함양의 천령(天嶺) 아래에서 낳으니, 공은 슬기롭고 숙성하여 행동을 스스로 법도에 맞게 하였고, 어려서부터 글을 읽을 줄 앎으로 신고공(信古公, 노우명)특히 사랑하여 손수 중용(中庸)및 주자(朱子)잠명(箴銘)을 써서 가르치자 한번 보고 곧 외워 마음에 와 닿는 것처럼 기뻐하였으며, 좀 자라자 스스로 학과(學課)를 정하며 공부하니 문의(文義)가 날로 드러났다.

 

정유년(丁酉年, 1537년 중종 32)7등으로 생원시(生員試)에 입격하자 공의 나이 20세에 화려한 명성은 더욱 높았고 덕기(德器)는 순수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아끼고 존중하였다. 그리고 더불어 교유(交遊)를 갖는 바는 모두 당시의 명인(名人)으로서 하서(河西) 김공(金公, 김인후(金麟厚))고봉(高峰) 기공(奇公, 기대승(奇大升))소재(蘇齋) 노공(盧公, 노수신(盧守愼)) 같은 이와 더불어 가장 깊이 도의(道義)로 사귀었다. 병오년(丙午年, 1546년 명종 원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에 선발되어 보임되었고, 두 번씩이나 사국(史局)에 추천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다가 마침내 박사(博士)로서 예에 따라 전적(典籍)에 승진하였으며, 드디어 예조(禮曹)의 낭관(郎官)으로서 지례 현감(知禮縣監)으로 나갔으니, 대체로 공은 본래 영진(榮進)을 좋아하지 않았고 집안이 가난하여 봉양(奉養)의 편의를 위해서였다. 조정에서 청렴하고 성실한 관리를 내외에서 가리라 명하자 공이 이에 참여하게 되어 옷 한 벌을 하사하였다. 좀 뒤 부름을 받고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이 되었다가 교리(校理)로 승진하였는데, 소대(召對)에 들어가 아룀이 분명하였고 행동에 여유가 있었다. 재상(宰相) 윤개(尹漑)가 이를 보고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진정한 강관(講官)이다.” 하였다. 지평(持平)으로 옮겼다가 다시 수찬교리가 되었고, 이조 좌랑(吏曹佐郞)에 임명되었다. 무오년(戊午年, 1558년 명종 13)에 필선(弼善)에 승진하였다가 부응교(副應敎)로 옮겼으며, 장령(掌令)에서 검상(檢詳)사인(舍人)으로 임명되었다가 집의(執義)전한(典翰)으로 승진하였고 드디어 직제학(直提學)에 임명되었다. 이때 권간(權奸)으로서 요직에 있는 자가 공과 인척(姻戚) 사이였는데, 공의 재망(才望)을 우러러 아첨을 떨며 친밀히 지내기를 구하며 한마디의 도움을 공에게 희망하였으나, 공은 문을 닫고 응하지 않아 한번도 의심받을 일이 없으니, 사론(士論)은 더욱 중히 여겼다.

 

경신년(庚申年, 1560년 명종 15)에 특지(特旨)로 품계가 오르고 형조 참의(刑曹參議)에 임명되었다가 승정원(承政院)에 들어가 우부승지(右副承旨)에 올랐다. 다음 해에 대부인(大夫人)의 연세가 70이 넘자 법을 인용하여 글을 올려 돌아가 봉양할 것을 간절히 청하니, 명묘(明廟, 명종)께서 그 근방의 수령(守令)에 제수하라 명하고 이어 표범 가죽으로 지은 요를 내려 그 효성을 포장(褒章)하였다. 드디어 담양 부사(潭陽府使)진주 목사(晉州牧使)에 임명되었다가 모두 병으로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돌아왔는데, 다스림은 오래지 않았으나 담양진주의 백성들은 오래 세월이 지낼수록 공을 더욱 생각하였다. 정묘년(丁卯年, 1567년 명종 22)에 이조 참의(吏曹參議)에서 지방으로 나가 충청 관찰사(忠淸觀察使)에 임명되었다가 병이 심하여 사임하고 돌아왔으며, 전주 부윤(全州府尹)에 임명되어 임기가 차자 부제학(副提學)으로 부름을 받고 올라왔는데, 좀 뒤 상소(上疏)하여 돌아가 봉양할 것을 청하니, 선묘(宣廟)는 위로하며 말미를 주어 직()을 띠고 다녀오라고 명하였다.

 

공은 돌아가 또 사직 상소를 올리며 잠경(箴警)의 말을 덧붙이니, 임금이 마음속으로 가상히 여겨 장려하여 마침내 체직(遞職)을 윤허하고, 이어 도관(道官)에게 명하여 양친(養親)의 비용을 대게 하자, 공은 전()을 올려 사은(謝恩)하였다. 신미년(辛未年, 1571년 선조 4)에 곤양 군수(昆陽郡守)에 임명되었고, 다음 해에 대사간(大司諫)이조 참의로 불렀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는데, 어필(御筆)로 써서 가선 대부(嘉善大夫)에 승진시키고 경상 관찰사(慶尙觀察使)에 임명하였다. 또 다음 해에 대사헌(大司憲)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에 임명하자 부름에 나아갔다가 한 달이 못되어 세 번 글을 올려서야 돌아갈 수 있었고, 병조 참판대사간(大司諫)에 임명되었다가 곧 이조 참판에 임명되었으며, 이어 예문 제학(藝文提學)을 겸하였으나 모두 나아가지 아니하였다.

 

을해년(乙亥年, 1575년 선조 8)에 품계가 자헌 대부(資憲大夫)로 특진되고 예조 판서(禮曹判書)에 임명되니, 상소하여 고사(固辭)하고 겸하여 시정(時政)의 잘못을 진달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정신을 수양함으로 해서 인성(人性)을 기르는 것이니, 먼저 뜻을 정한 다음에 옛일을 상고하여 멀리 제왕(帝王)의 법도를 뒤따르고, 근래의 규범(規範)에 젖어 제자리에 머뭇거려서는 아니 됩니다. 나 홀로의 운영만을 믿고 일세(一世)의 인사들을 가벼이 여겨서는 아니 되고 총명을 앞세워 여러 관서(官署)의 업무를 겸해서도 아니 될 것이며, 궁중(宮中)의 규율과 존비(尊卑)의 구분을 엄격히 하고 근시(近侍)의 차츰 배어드는 참소를 막아야 하며, 빨리 나아갔다가 속히 물러서는 일이 없게 하고 처음에는 근면하면서 끝에 가서는 태만히 하는 일이 없게 해야 합니다.” 하였다. 그러나 소장(疏章)이 전해지기도 전에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옮겨 임명하므로 또 글을 올리고 나아가지 아니하였다. 이해에 대부인(大夫人)이 졸하여 삼년상을 마치자 공의전(恭懿殿, 인성 왕후(仁聖王后;인종 박씨))의 상을 당하였는데, 형조 판서(刑曹判書)로서 나아가 상에 임하였다가 병으로 체직이 되었으며, 공조 판서(工曹判書)에 임명되었다가 두 번째 대사헌(大司憲)이 되었으나 모두 나아가 사은(謝恩)치 못하였다. 좀 뒤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임명되어 봉직하다가 겨우 20여 일 만에 병을 이유로 해임을 청하였고, 또 이조 판서에 임명되었으나 공은 이미 병이 깊어 일어날 수 없었다. 승정원에서 아뢰기를, “노모(盧某)는 본래 덕망이 있어 사림(士林)의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을 당하여 예()를 행하면서 예제(禮制)에 지나치게 함으로 해서 지금 병이 매우 위독하니, 마땅히 문질(問疾)의 예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니, 선묘(宣廟)가 곧 내의(內醫)를 보내고 연이어 약물을 내렸다. 병이 위중하자 가사(家私)에는 언급치 아니하고 다만 내가 고향에 가서 죽지 못하니 실은 평생의 뜻이 아니다.” 하고 졸하니, 춘추 61세이다.

 

운명하던 날 집안에는 식량이 별로 없어 나라에서 내려 준 부의(賻儀)를 힘입어 염빈(殮殯)을 할 수 있었으며, 서울의 사부(士夫)들과 온 조정에서 달려와 곡을 하였고 거리의 사람들도 모두 슬퍼하였다. 반장(返葬, 고향으로 옮겨 장사지냄)을 하게 되어서는 함양(咸陽)의 사민(士民)들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경상(境上)에 마중 나와 곡하며 조문하고 모두 부조를 하였으며, 장사(葬事)를 치르게 됨에 있어 몇 고을이 모두 모였고 가지 못한 자는 위()를 설치하고 곡을 하였다.

 

공은 화평(和平)하면서도 개결(介潔)하였고 명달(明達)하면서도 믿음성이 있었으며, 안상(安詳)하고 장중(莊重)하여 비루(卑陋)한 말이나 저속(低俗)한 행동을 안색과 언사에 드러내지 않았다. 마음가짐을 즐겁고 편안하게 가져 모나는 행동을 보이지 않았고, 평소에 겸손하여 지나치게 가부(可否)를 따지는 일이 없었으나, 일에 임해서 수행(遂行)함에 있어 의연(毅然)히 소신을 지켜 의리(義理)에 따랐고 이해나 득실로 뜻을 바꾸는 일이 없었다. 빈붕(賓朋)을 접함에 있어 한결같이 정성을 다해 대하였고 사람들과 말할 때는 그 마음을 상할까봐 두려워하였으나, 불선(不善)을 발견한 경우 단연코 용서하는 일이 없었으니, 바라만 보아도 대덕 군자(大德君子)임을 알 수 있었다.

 

효성과 우애에 있어서는 천성적으로 타고났으므로 어렸을 적에 이미 예제(禮制)를 알았는데, 신고공(信古公)이 졸하였을 때에 공의 나이가 어렸는데도 곡을 하고 슬퍼함을 성인(成人)과 같이 하면서 장산(葬山)의 여막으로 백씨(伯氏)를 따라서 갈 때에 대부인(大夫人)이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너는 나이가 어려 혈기(血氣)가 정해지지 않았으니, 마땅히 고기를 먹어 섭생(攝生)을 해야 한다.” 하니, 공이 말하기를, “제 나이 지금 6세에 상을 마치게 되면 8세입니다. 8세인 사람이 아버지의 상을 지키지 않는다면 되겠습니까?” 하자, 대부인이 그 말에 감동하여 뜻을 굽히지 못하였으므로, 드디어 예제(禮制)를 지켜 3년을 마치게 되었다. 항상 아버지를 일찍 여의었음을 지극한 슬픔으로 여겼으며, 대부인 역시 유달리 애정을 쏟아 잠시 외출을 하였을 때에도 곧 문에 의지하여 기다렸다. 그러므로 어려서의 유학(遊學)을 감히 좀 먼 곳으로 나아가지 못하였고, 성장해서 벼슬길에 나섬에 있어 아침저녁으로 문안드리는 일을 때를 넘기는 일이 없었으며 늙도록 하루같이 즐겁고 기쁜 빛이었다. 그리고 살림은 비록 가난하였으나 대부인께 드릴 맛나는 음식을 손수 마련하는데, 군색스러운 빛을 보이지 않았다. 백형(伯兄) 섬기기를 아버지 섬기듯 하여 화평과 존경을 다하였고 작고한 뒤 여러 조카들을 내 소생처럼 대하였다. 종사(宗事)가 침체되었음을 고민하여 두 번씩이나 사묘(祠廟)를 짓고 기구(器具)를 완비하였으며, 제수(祭需)를 직접 지출하여 주사자(主祀者, 종손)로 하여금 걱정을 하지 않게 하였다. 대부인의 병이 깊어지자 공은 여러 달 옷을 벗지 않았고, ()을 맛보아 길흉을 징험하기도 하다가 상을 당하자, 공은 나이 이미 60세였으나 여묘(廬墓)살이 3년에 예제를 지키는 데 온갖 고생을 하였으며, 비록 대단한 추위와 한더위나 큰바람이 불고 눈비가 내려도 묘에 오르는 일을 폐하지 않았다. 선조(先祖) 받드는 예를 반드시 선유(先儒)가 정한 예제에 따라서 재계하고 제()를 올리는 데 반드시 목욕을 하고 몸소 전구(奠具)를 살폈다. ()이 있는 가까운 친척의 상에 그 예제를 다하였고 친구의 상에 반드시 그 슬픔을 표하였으며, 고아나 과부가 된 이를 돌보고 궁핍(窮乏)을 돕는 데 모두 일정한 규식이 있었다.

 

집안이 본래 청빈(淸貧)하여 들에 한 뙈기의 밭이 없었고, 서울에 집 한 채가 없었다. 비록 여러 번 주부(州府)를 맡았었으나 맛있는 음식으로 대부인을 봉양(奉養)하는 것 외에 스스로에게는 매우 검약(儉約)하였고, 벼슬을 떠남에 있어 한 필()의 말을 타고서 고향으로 돌아가니 행색은 쓸쓸하였다. 날씨 화창하고 동풍(東風)이 일 때에는 친구와 젊은이들을 이끌고 산사(山寺)와 시냇가 정자에 왕래하며 마음껏 즐겼지만, 오직 서책(書冊)을 들고 뒤따르며 화락하게 명리(名利)를 잊고 유유자적(悠悠自適)하는 흥취가 있었는데, 사람들은 그가 재상(宰相)인지를 몰랐다. 책상을 지고 찾아드는 학도(學徒)가 날로 많아지므로, 도의(道義)를 논설하기에 부지런히 하여 게으름이 없었다. 논어(論語)≫ㆍ≪소학(小學)≫ㆍ≪근사록(近思錄)을 신봉하였고, 퇴계 선생(退溪先生, 이황(李滉))대학(大學)의 종지(宗旨)를 강론하여 서찰로 왕복하였는데, 매우 서로 존경하고 중히 여겼다. 공이 늘 말하기를, “학문은 많은 말이 필요 없고 대학의 편수(篇首)에 있는 열 여섯 글자(大學之道在明明德 在新民在止於至善)의 말에서 찾으면 족하다.” 하였다. 이러므로 그 학문은 반드시 몸에 근본을 두었고 임금께 고함에는 반드시 삼대(三代, ()()()의 세 왕조)(왕도(王道) 정치를) 인용하였으며, 공리(功利)에 관계된 천근(淺近)한 말은 하지 않았다. 문장(文章)을 구성하되 가볍고 화려한 것에 힘쓰지 않고, 맑고 여유가 있어 깊이 송학(宋學)의 문체(文體)를 얻었으며, ()는 비록 마음에 두진 않았으나 가끔은 그 의취(意趣)가 심장하였고 전혀 진부(陳腐)한 말을 답습하지 않았는데, 저술한 바 시문(詩文)의 약간 권()이 세상에 나돌고 있다.

 

공의 일생은 성정(性情)을 정양(靜養)하면서 학문에 푹 잠겼고, 일찍이 세무(世務)에는 뜻이 없는 듯하였으나 주군(州郡)을 맡게 되어서는 오직 근신(謹愼)으로 직무를 수행하면서 계획하고 추진함에 있어 반드시 관대(寬大)함에 기본을 두었고 또한 일찍이 자그마한 이익을 위하여 일을 제기하거나 성가(聲價)를 의식하여 명성을 드러내려고도 하지 아니하였다. 영남(嶺南)은 지역이 넓어 다스리기 어렵다고 호칭하는 곳인데, 공이 관찰사(觀察使)가 되어 성심으로 번거로운 일을 맡았고, 엄하면서도 가혹(苛酷)하게 하지 않으면서 오래된 송사(訟事)와 옥사(獄事)를 간단히 결단하니, 교활한 이서(吏胥)와 부정을 저지르던 관리는 숙연히 몸을 도사려 백성들이 힘입게 되면서 이 지역이 크게 다스려졌다. 김계휘(金繼輝)공이 공의 치적(治績)을 이어 맡으면서 이르기를, “덕행과 문학에 겸하여 이무(吏務)까지 이와 같이 통달할 줄은 생각지 못하였다.” 하였다.

 

공은 순흥 안씨(順興安氏)와 혼인하니 기묘 명인1)(己卯名人) 안처순(安處順)의 딸이다. 가정에서 눈으로 익히고 귀로 들어 익숙해져 일찍부터 그윽하고 한가한 덕이 있었는데, ()가 되어서는 공경을 하였고 모()가 되어서는 자애(慈愛)하였으니, 참으로 군자(君子)의 배필이었다. 공보다 10년 앞선 무진년(戊辰年, 1568년 선조 원년)에 졸하매 함양(咸陽)의 주곡(酒谷) 자좌 오향(子坐午向)의 언덕에 장사지내니 공과 같은 무덤이다. 7남을 두어 맏이 노사훈(盧士訓)은 진사(進士)에 입격하였으나 문과(文科)에는 나아가지 않아 음직(蔭職)으로 별좌(別坐)에 보임이 되었다. 참봉(參奉) 조언(趙堰)의 딸과 혼인하여 1남 노승(盧勝)을 낳으니 음직으로 봉사(奉事)에 보직이 되었으며, 참판 정구(鄭逑)의 딸을 초취(初娶)하여 1남 노형우(盧亨遇)를 낳았고, 하씨(河氏)를 재취(再娶)하여 1남 노형달(盧亨達)을 낳았으며 딸은 여희좌(呂姬佐)에게 출가하여 31녀를 낳으니, 맏이 여절(呂沏)2남을 낳았고 다음 여곽(呂漷)4남을 낳았으며, 다음 여함(呂涵)은 어리다. 노형우는 2남을 낳으니 어리다. 공의 2남인 노사회(盧士誨)는 재행(才行)으로 선발되어 벼슬길에 나아가 익산 군수(益山郡守)에 이르렀고, 유응(柳凝)의 딸과 혼인하여 23녀를 낳으니 맏이 노길()23녀를 낳았는데 맏이는 노형후(盧亨後), 나머지는 어리며, 다음 노근()은 생원(生員)이요 61녀를 낳으니 맏이는 노형서(盧亨緖), 딸은 허람(許欖)에게 출가하고 나머지는 어리다. 노사회의 딸 맏이는 허탁()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감찰(監察) 강응황(姜應璜)에게 출가하여 1남 강순(姜珣)을 낳았으며, 다음은 이익빈(李益彬)에게 출가하여 33녀를 낳았다. 노형후(盧亨後)2남을 낳으니 모두 어리다. 공의 3남인 노사흔(盧士訢)은 조완(趙完)의 딸과 혼인하여 1남 노척(盧脊)을 낳았고, 노척은 12녀를 낳으니 아들은 노형필(盧亨弼)이요, 딸은 양여매(楊汝梅)에게 출가하여 11녀를 낳았는데 어리고, 다음은 박상질(朴商質)에게 출가하였다. 공의 4남인 노사악(盧士諤)5남 노사전(盧士詮)은 무후(無後)하고, 6남인 노사첨(盧士詹)은 목사(牧使) 박광옥(朴光玉)의 딸과 혼인하였으나 아들이 없어 노사회의 아들 노근()을 후사(後嗣)로 삼았다. 공의 7남인 노사심(盧士諗)은 김효사(金孝思)의 딸과 혼인하여 22녀를 낳으니 맏이 노욱(盧郁)은 생원이요, 노욱은 13녀를 낳으니 아들은 노형익(盧亨益)이요 딸은 어리다. 둘째 노등(盧縢)21녀를 낳으니 모두 어리다. 딸 맏이는 김여정(金汝鋌)에게 출가하여 1녀를 낳으니 어리고, 다음은 곽이준(郭以峻)에게 출가하여 11녀를 낳으니 모두 어리다. 공의 2녀에 맏이는 유기(柳起)에게 출가하여 무후하였고, 다음은 허성필(許成弼)에게 출가하여 11녀를 낳으니 아들은 허환(許寏)이요, 딸은 최응형(崔應亨)에게 출가하였다. 허환은 13녀를 낳았고, 최응형은 2남을 낳으니 모두 어리다.

 

! 공의 재학(才學)과 덕망으로 세상에 드문 선묘(宣廟)의 처우를 받았으니, 하늘이 큰 소임을 내림은 우연이 아닌 듯싶다. 궁하였을 때 수양하고 현달하게 되어서는 시행하려 하였던 것이 곧 평생의 포부였지만, 어버이는 늙고 또 병이 있어 공의 몸은 자유스러울 수 없어서 벼슬길에 들어선 지 30여 년에 조정에 있던 세월은 3년에 불과하였으므로 대업(大業)을 설계하여 시행할 겨를이 없었다. 복제(服制)를 마치게 되어서는 공 역시 몸을 내맡기고 조정으로 돌아오매 선묘(宣廟)는 다시 이조 판서에 임명하고 장차 의정(議政)에 승진시키려 하였는데, 공은 이미 파리한 몸에 병이 생겨 마침내는 일어날 수 없이 되었으니, 공의 충효(忠孝)는 가위 쌍전(雙全)이라 할 수 있으며, 나아가고 물러서는 대절(大節) 역시 배운 바를 저버리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불행히도 하늘이 나이를 더 주지 않아 중도(中途)에서 쉬게 하였으니, 어찌 사림(士林)의 긴 쓰라림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그 지극한 행적(行跡)과 아름다운 덕행(德行)은 후세에 모범이 될 것이요, 끼친 풍류와 운치는 족히 퇴속(頹俗)을 진작시킬 것이다. 그런데 남도의 사자(士子)들이 서로 더불어 재물을 모아 공이 살던 곳 및 늘 왕래하던 땅에 사원(祠院)을 세우고, 그 존모(尊慕)하는 정성을 붙이니, 참으로 흥감(興感)하는 효과가 없어지지 아니하고 사람의 마음에 남아 있어서일 것이다. 우리 임금이 즉위하시자 봉상시(奉常寺)에 명하여 역명(易名, 시호를 내림)을 논의하게 하여 문효(文孝)란 시호(諡號)를 내리니, 아름답도다 믿을 만한 사실(史實)이여. 이로 공의 덕을 모두 드러낸 것이라 하겠다.

 

드디어 사실을 부연하여 명()을 한다.

  천령(天嶺)의 남쪽에 맑은 기운 모였는데, 거인(巨人)을 탄생시키니 공이 바로 그 분이라네. 하늘이 오륜(五倫)을 펴니 효()가 온갖 행실의 근원이라네. 공은 참된 마음으로 인해 그 성정(性情) 꾸밈이 없었고, 겨우 품에서 벗어나 이미 사랑하고 공경할 줄 알았다네. 그러고서야 글을 배움에 깊이 성현(聖賢)을 생각하였네. 내 몸에 근본을 두어 백성들에게 징험(徵驗)하였고, 정사(政事)와 문장(文章)은 만날 때마다 사람을 놀라게 하였네. 다스림에는 도타운 윤리(倫理)를 숭상하여 사람들은 편안하고 풍속이 순후하였도다. 법연(法筵, 공식 경연(經筵)이 열리는 자리)에 나아가 모시었을 때 선비들은 태산 북두(泰山北斗)처럼 우러렀네. 늘 효()와 제()를 말하매 반드시 요순(堯舜)을 일컬었고, 그 말은 매우 충성스러워 듣고는 믿지 않는 일이 없었다네. 올리는 글은 정성스럽고 간절하여 글자마다 옛 성현(聖賢)의 훈계이라네. 예악(禮樂)에도 밝아 요순(堯舜)의 문물(文物)을 몸에 익혔다네. 나아감 영화(榮華)를 구함이 아니었고 물러남 세상을 잊으려는 것이 아니라네. 때로는 여력(餘力)을 발휘하였고 역시 경제(經濟)에도 우수하였다네. 미진(未盡)함이 있음은 서산(西山)에 얹힌 해 시간이 짧은 것이라네. 의리(義理)의 정()은 무겁고 가벼움에 대해 능히 온전한 자 드문데, 공은 양쪽 모두 알맞아 훌륭한 명성 따르네. 공의 평생 살펴보면 모두 효()에서 미루어진 것이라네. 이름은 사서(史書)에 실리고 공()은 사문(斯文, 유학(儒學)의 일컬음)에 있다네. 기나긴 세월 뒤에 있는데 그 향기 환히 드러나리. 전할 만한 공의 사적(事蹟) 어찌 비석(碑石)에만 기대(期待)하랴? 내 말 아첨하려는 것이 아니요 많은 선비들의 생각이라네.

 

1) 기묘 명인(己卯名人) : 중종(中宗) 14년 기묘년(己卯年;1519)에 일어난 사화(士禍)에서 조광조(趙光祖)를 비롯하여

    70여 인의 신진 사류(新進士類)가 희생되었는데, 후세에서 이들을 일컬어 기묘 명현(己卯名賢) 또는 명인이라 함.

 

 

明朝鮮國資憲大夫吏曹判書兼同知經筵春秋館事藝文館提學贈諡文孝公玉溪盧先生神道碑銘幷序

 

昔我宣廟勵政圖治好尊用儒臣其冢宰曰玉溪盧先生以道德文行伏一世無何卒于京城僦舍宣廟慟惜輟朝賜祭賻錫加常數其年禮部以孝行聞宣廟益嘉之命有司綽楔其閭以旌之先生諱禛字子膺世居玉溪學者稱爲工溪先生系出豊川國子進士諱裕是其鼻祖世有衣冠麗未避虜徙居咸陽遂爲咸陽人入我朝諱叔仝以文章淸白顯英廟朝官至禮曹參判藝文館提學生諱昐再擢第爲藝文館校理有三子皆擧進士其仲最賢好學守志名其堂曰信古卽先生考也諱友明受業於一蠧之門慕齋金公薦于朝除顯陵參奉娶安東權氏生員時敏之女以正德戊寅生先生英儁夙成動止自矩自在孩提知讀書信古公奇愛之手書中庸及朱子箴銘以敎之一見輒誦欣然若有心會稍長能自課學文義日章丁酉中生員華譽藉甚人咸愛敬之所與遊皆當世名人如南冥河西葛川高峯蘇齋諸公契許最深相與爲道義交丙午擢第選補槐院再薦史局皆不就竟以博士例陞典籍遂自南宮郞出知知禮縣蓋先生素不喜榮進家貧急於便養故也朝廷命揀中外廉謹先生與焉賜衣一襲俄徵爲弘文館修撰校理入對敷奏明剴進止閑雅宰相尹漑見謂人曰眞講官也轉持平修撰校理選拜吏曹佐郞戊午陞弼善副應敎明年自掌令薦授檢詳舍人陞執義典翰遂拜直提學時權奸之嘗路者與先生連姻重先生才望諂語求款覬先生一言相助先生閉戶不應一未嘗濡迹士論益重之庚申特旨陞秩拜刑曹參議轉銀臺右副明年以大夫人年踰七十援法上章懇乞歸養明廟特除傍近守令仍賜豹褥以章其孝遂拜潭陽府使晉州牧使皆以病徑還不久於治而潭晉之民久愈思之丁卯以吏曹參議出拜忠淸監司解還拜全州府尹秩滿以副提學承召上來俄上疏乞歸養宣廟慰諭命給暇帶職往還先生旣歸又上辭章附以箴警之辭聖旨嘉奬遂許遞職仍命其道官給養親之需先生上箋陳謝辛未拜昆陽郡守明年以大司諫吏曹參議召皆不赴御筆陞嘉善大夫拜慶尙觀察使又明年拜大司憲同知春秋館事赴召未月三上章乃得歸拜兵曹參制大司諫兼藝文提學皆不赴乙亥進階資憲拜禮曹判書上疏固辭兼陳時政闕失略曰由養身而養性先定志而稽古遠追帝玉之遐軌不狃近規之因循毋恃獨運而輕一世之士毋作聰明而兼庶司之務嚴宮禁尊卑之分杜近習浸潤之漸毋進銳而退速毋始勤而終怠疏未達而移拜吏曹判書又上章不赴是年大夫人卒服闋遭恭懿殿之喪以刑曹判書犇臨病遞拜工曹判書再爲大司憲皆不出謝拜大司馬供職纔數旬移告乞解又拜吏曹判書病谻不能起政院啓言盧某素有德望爲士林所宗居喪執禮踰制今病危劇宜有問疾之禮宣廟卽遣內醫連賜藥物病革言不及家私但不得畢命松楸實非平生之志遂卒春秋六十一卒之日家無甔石賴賜賻乃克斂殯洛中士夫傾朝犇哭街童走卒無不悲慟其返葬也咸之士民無少長迎於境上哭吊賻無不盡其窆也數郡畢至未至者爲位而哭先生和而介達而諒安詳而莊重鄙倍之言粗俗之行不形於色辭處心樂易不爲崖岸平居間恂若無其可否而及其臨事制行毅然自持一聽於義理不以利害得失有所變易接朋賓專以誠悃與人語惟恐傷之而見不善則斬然無所假貸望之知其爲大德君子至於孝友則天得也信古公之歿先生年尙少哭泣悲哀如成人從伯氏于山廬大夫人泣謂曰汝年幼血氣未成宜食肉以全生先生曰兒今六歲及免喪則八歲八歲之人不服父喪可乎夫人感其言莫能屈遂守制終三年常以早失庭訓爲至慟大夫人亦鍾愛異常乍出輒倚門而望故少而遊學不敢稍遠長而仕宦未嘗徑時定省之職怡愉之樂至老如一日家雖貧約手具甘旨不見窶色事伯兄如事父旣歿遇諸孤猶已出悶宗事零替再作祠廟營修器具不令主祀者憂之大夫人寢疾先生累月不解衣嘗糞以驗吉凶及喪先生年已六十而廬墓三年執禮刻苦雖祁寒盛暑大風雨雪不廢土塚奉先之禮必遵先儒定制齋祭必洛躬莅奠具功緦之服必盡其制知舊之喪必致其哀家素淸貧無田於野無宅於京雖屢典州府脂瀡之外自奉甚約去官匹馬還鄕幞被蕭然每遇時和景明携親舊帶冠童僧廬溪舍往來自適惟以書帙自隨熙然有浴沂之興人不知爲宰相也學徒之負笈者日以益盛談說道義亹亹不倦常尊信論語小學近思錄與退溪先生往復嘗札深相敬重先生常曰爲學不在多言求之大學篇首十六言足矣是以其學必本諸身告君必引三代爲文章不事浮靡典雅贍暢深得濂洛文體於詩雖不屑意而往往趣味悠遠絶不蹈襲陳言所著詩文若干卷行于世先生一生靜養沈潛學問若未嘗留意世務而其爲州郡祗愼事職所設張必本於寬大亦未嘗規小利以起事飾聲章以立名嶺南地大號難治先生爲按廉以誠任煩嚴不爲奇宿訟滯獄片言剖決猾胥斂手汚吏望風民以順賴一路大治金公繼輝代按公績曰不料德行文學兼通吏務乃如許也先生娶順興安氏己卯名人處順之女濡染家庭夙有幽閑之德先先生十歲歲戊辰卒葬咸陽酒谷午向原與先生同兆擧七男長曰士訓擧進士蔭補別坐娶參奉趙愝女生男勝蔭補奉事初娶文穆公鄭逑女生一男亨遇再娶河氏生一男亨達女適呂姬佐曰士誨以才行入仕累官至益山郡守娶柳凝女生二男三女生二男三女長亨後餘幼生員生六男一女長亨緖餘幼女長適許次適姜應璜次適李益彬曰士訢娶趙完女生男脊生一男二女男亨弼曰士諤士詮無后曰士詹娶牧使朴光玉女無子取士誨子爲后曰士諗娶金孝思女生二男二女長郁生員生一男二女男亨佐次縢生二男一女皆幼女長適金汝鋌次適郭以俊先生之二女長適柳起無后次適許成弼生一男一女男寏女適崔應亨以先生之才學德望承宣廟不世之遇天之降大任似非偶然窮養達施是實平生抱負而惟其親老且病先生身不得自由釋褐三十餘年在朝日月不滿三年未遑有設施之大業及其服闋先生亦委身還朝宣廟再擢爲冢宰且將相矣先生已病於毁瘠竟不起先生之忠孝可謂兩全而進退大節亦可謂不負所學矣不幸天不假年半途而稅豈非士林之長慟也然其至行懿德可以模範後世遺風餘韻足以聳動衰俗南中士子相與鳩材立祠院於先生所居及常所往來之地以寓其尊慕之誠信乎興感之效不泯在人也逮我上嗣服之初命太常議易名之典賜諡曰文孝媺矣哉惇史也此可以盡先生之德乎遂演其說而爲之銘曰

 

蔚彼天嶺淑氣鍾焉乃篤鉅人公得其全天敍五典孝源百行公實因心粹然其性纔免於懷已知愛敬餘力學問覃思賢聖旣本諸身乃微於民政事文章隨遇驚人治尙惇倫人安俗厚拱于法筵士仰山斗恒言孝悌必稱堯舜其詞甚忠聽無不信章疏懃懇字字典謨庶幾禮樂陶鑄唐虞進非求榮退非忘世時出緖餘亦優經濟所不盡者崦嵫日短義情輕重能全者罕公惟兩臻盛名隨之槪公平生皆孝之推名載太史功在斯文百世在後不昧其芬公之可傳何待於碑我言非諛多士之思

 

崇禎四年十月日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議政兼領經筵事監春秋館事世子傅李廷龜

 

 

 

 

文孝公 玉溪 盧禛 가계도

 曾祖父 노숙동盧叔仝 禮曹參判

    祖父 노분盧昐 贈 吏曹判書

    伯父 노우량盧友良 贈資憲大夫 吏曹判書

 아버지 신고당노우명 信古堂盧友明

    叔父 노우영盧友英 進士 영경전 참봉(永慶殿參奉)

 어머니 안동권씨 생원 권시민(權時敏)의 딸

           문효공 옥계 노진文孝公 玉溪 盧禛

           배위 순흥안씨 기묘명인 安處順의 딸

            1노사훈盧士訓 進士 別坐--노승盧勝

            2노사회盧士誨 禮山郡守 工曹佐郎 釜山郡守--노길盧佶,노근盧瑾

            3노사흔盧士訢--노척盧脊,

            4노사악盧士諤

            5노사전盧士詮

            6노사첨盧士詹

            7노사심盧士諗 -노욱盧郁,노등盧騰

 

 

                                                                                                                                                                                                             벽암 두릉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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