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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청-참봉 이승문(李承文), 청향당 이원(李源), 대호공 이잠(太浩公 李潛),합천이씨

구름에 달

by 碧巖 2017. 11. 14. 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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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천이씨 참봉 이승문(李承文) 묘역

 

배위 문익점 선생 손자 의령현령 문승노(文承魯)의 따님.

징사 청향당 이원(淸香堂 李源,1501~1568)의 조부인 부호군 이계통(李季通)부인이 남평문씨로

삼우당 문익점(三憂堂 文益漸)의 손자로  의령현령을 지낸 문승노(文承魯)의 따님이다.

그러니까 청향당의 할머니는 문익점 선생의 증손녀가 된다.

참봉공이 배양에 오게 된 것은 당시 문씨 집안에 변고가 있어

문씨들이 고향을 떠나 사방으로 흩어져 생활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참봉공 이승문은 어머니 문씨의 명으로

이곳에 이주하여 외선조(外先祖) 문익점선생의 묘역및 비각을 지키게 되었다.

이로부터 이씨들이 이곳에 정착하게 된 것이 지금까지 500여년이 되었다고 한다.

현재도 이들의 묘소는 삼우당 문익점의 묘소 하단과 아랫쪽에 있다.

 

 

 

                   參奉陜川李公承文之墓 宜人李氏祔

                   참봉합천이공승문지묘 의인이씨부

 

 

 

 

 

청향당 이원(淸香堂 李源)선생 묘

 

 

징사 청향당 이원(淸香堂 李源,1501~1568)

본관 합천, 군호(君浩)

퇴계 이황(退溪 李滉,1501~1570)과 남명 조식(南冥 曺植,1501~1572)선생과는 동갑으로  

삼경사동지교(三庚四同之交)의 막역한 교우 관계였으며, 

산청 배산서원(培山書院)의 배산서당(培山書堂)에 모셔져 있다.

배산서당(培山書堂)은 청향당(淸香堂)의 후손인 진암 이병헌(眞菴 李炳憲,1870-1940)이 세웠는데,

진암은 면우 곽종석의 문하에서 수학한 한말 유학자로

전통 유학을 고수하기보다는 개혁을 통해 유교를 종교화시키고자 했던 사람이다.

1914년부터 중국을 드나들면서

중국 개혁 운동의 정신적 지주였던 강유위(康有爲)를 만나 그의 사상을 전수 받았다.

그리하여 1923년 이곳 배양에 배산서당을 세우고 문묘(文廟)를 만들어

공자의 고향인 곡부(曲阜)에서 공자 상을 그려 와서 봉안하였다.

이런 면에서 이 서당은 우리 나라 최초의 [공자교회]라고 할 수 있다.

문묘 바로 밑에 도동사(道東祠)라는 사당이 있는데,

여기에 청향당을 남명 퇴계와 나란히 모셔 놓고 있다.

청향당과 남명, 퇴계와는 동갑이며 평소 친근하게 지냈기 때문에 함께 모신 것이다.

 

 

청향당은 1501(연산7) 1010일 참봉 이승문(李承文)과 이씨(李氏)사이에서

5형제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선생이 태어난 배양은 상주 주씨와 남평 문씨들이 대대로 살아온 곳인데,

단성 소이곡(所耳谷)에 살다 참봉공때 배양으로 이주하였다.

 

청향당 조부 부호군(副護軍) 이계통(李季通)이 남평문씨 집안으로 장가들었는데,

부인이 바로 문익점 선생 손자 문승노(文承魯)의 따님이었다.

그러니까 청향당의 할머니는 문익점 선생의 증손녀가 된다.

참봉공이 배양에 오게 된 것은 당시 문씨 집안에 변고가 있어

문씨들이 고향을 떠나 사방으로 흩어져 생활하게 되었다.

이때 참봉공은 어머니 문씨의 명으로

이곳에 이주하여 외선조(外先祖) 문익점선생의 묘역및 비각을 지키게 되었다.

이로부터 이씨들이 이곳에 정착하게 된 것이 지금까지 500여년이 되었다고 한다.

 

 

                             徵士淸香堂李先生之墓

                             징사청향당이선생지묘

 

어릴 때부터 자질이 뛰어난 선생은 6세때 책을 읽었으며, 8세때는 소학을 배웠다. 이때부터 20세전까지 침식을 잊어 가며 사서를 비롯한 경전을 읽어 그 뜻을 체득하고자 노력하였다. 20세때 의령(宜寧) 이씨를 부인으로 맞이하였는데 퇴계 이황과 처가가 같은 동네이다. 1년후 퇴계가 의령 가례촌 허씨 집안으로 장가들 때 선생이 찾아가서 만났는데 이로부터 두사람은 평생을 돈독한 우의로써 지내게 되었다. 23세때는 함께 서쪽 지방으로 유람 가서 당대 석학인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를 만나기도 하였다. 26세때는 퇴계가 의령 처가에 들렀다가 배양으로 선생을 찾아와 밤새 학문을 토론하기도 하였다. 선생은 남명과도 동갑으로 친분이 두터웠다. 남명이 청향당 시에 화답하면서 {네 가지가 같아 응당 새로 안 사람과 달라/나를 일찍이 종자기에 견주었지}라고 하였다. 여기서 4가지가 같다는 말은, 남명과 청향당이 같은 해(1501) 같은 경상도 땅에서 태어나 같은 마음으로 같은 덕을 지녔다는 것이라고 한다.종자기(鍾子期)에 견주었다는 말은, 옛날 백아(伯牙)라는 사람이 거문고를 잘 타고 종자기는 이를 듣기를 좋아했는데, 종자기가 죽은 후 백아가 절망한 나머지 거문고 줄을 끊고 다시는 거문고를 타지 않았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인데백아와 종자기 같이 서로 알아주는 진실한 벗이라는 뜻이다. 29세때 의령 자굴산 명경대(明鏡臺)로 남명을 찾아갔다. 이때 남명은 명경대 근처 산사에 머물면서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찾아가 경전의 뜻을 토론하였다. 30세 되던 해 4월 김해 산해정(山海亭)으로 남명을 찾아갔다. 이때 같이 모인 사람들은 대곡(大谷) 성운(成運) 송계(松溪) 신계성(申季誠), 황강(黃江) 이희안(李希顔) 등이었는데 당대 촉망받는 선비들이었다. [남명선생연보]에 의하면 {이 해에 대곡이 서울에서 찾아왔는데 송계 청향 황강 및 여러 선비가 함께 모여 여러날 동안 강독을 하고 토론하니 당시 사람들이 德星이 모였다고 하였다}라고 할 정도로 대단한 모임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3세때 향시에 합격하였으나 이해 벼슬에 뜻을 버리고 [청향정사淸香精舍]를 지어 청빈하게 숨어살면서 선비로서의 그윽한 아치를 간직하며 살고자 했다. 평생 학문을 탐구하며 안빈낙도하는 삶을 추구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해 3월 남명이 찾아와 [淸香精舍 八詠]이란 시를 지어 정사의 경치와 선생의 안빈낙도하는 삶을 읊기도 하였다.남명은 청향정사에 올라 7가지 아름다운 풍광을 읊고 마지막 한 수에 정사의 주인 이름이 후세에 전해져 잊혀지지 않을 것을 말하였다. 이때 지은 7가지 풍광은 竹風(대밭에 부는 바람) 松月(소나무에 비친달) 琴韻(거문고 소리) 雪梅(눈속의 매화) 霜菊(서리속의 국화) 盆蓮(화분에 심은 연꽃) 經傳 등인데 하나같이 단아한 선비가 가까이 두고 완상하는 것들이다. 선생은 정사에 서서 이들을 벗삼아 평생을 보냈으니 그 단아함이란 후학이 감히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39세때 부모를 여의고 상을 치를 때 예로써 극진히 하였으며, 3년상을 마치고 42세때 경주에 가서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을 만났다.

 

46세때 조정에서 곤양훈도(昆陽訓導)에 제수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48세때 청향정사옆에 구사재(九思齋)를 지어 학문에 전념하고자 하였다. 이때 구사재의 편액은 공자의 말씀에서 따온 것인데, 군자가 지녀야 할 아홉가지 생각이란 뜻이다. 사물을 볼 때 밝은 것을 생각하며, 어떤 것을 들을 때는 총명한 것을 생각하며, 얼굴색은 온화한 것을 생각하며,외모는 공손한 것을 생각하며, 말을 할 때는 충직한 것을 생각하며, 일을 할 때는 공경을 생각하며, 의문 나는 것이 있으면 물을 것을 생각하며, 성이 나거든 성낸 후 뒷감당 어려움을 생각하며, 이로운 것을 보거든 의로움을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선생의 학문은 9가지 생각을 바탕으로 하여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선생의 조카 죽각(竹閣) 이광우(李光友)가 지은 언행록에 의하면 선생은 유독 []을 중요하게 여겨 성인의 학문을 함에 있어 철두철미하게 시종일관 경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53세때는 구사재로 구암(龜巖) 이정(李楨)이 찾아와 학문을 토론하였으며, 57세때 뇌룡정으로 남명을 방문하여 성리 등에 관해 질정을 하였다. 64세때 전생서주부(典牲署主簿)를 제수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이듬해 효행으로 조정에서 상을 내렸으며 69세때는 함양훈도(咸陽訓導)를 제수하였으나 역시 나아가지 않았다. 1568916일 병으로 세상을 떠나니 향년 69세였다. 1588년 지역 유림 일신당(日新堂) 이천경(李天慶) 송암(松巖) 이노(李魯)등이 선생을 위해 신안에 서원을 건립하기로 뜻을 모아 이듬해 신안서원(新安書院)을 완공하여 위패를 모셨다. 이후 전쟁으로 신안서원이 불타 없어지자 1702년 도천서원(道川書院)에 선생을 모셨는데 이 서원은 원래 삼우당 문익점 선생의 서원이었다. 1787년 조정에서 도천서원에 사액이 내려 선생을 배향할 수 없자 이듬해 배산에 덕연사(德淵祠)를 지어 1791년에 봉향하였다. 이후 사당이 대원군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자 진암 이병헌이 배산서당을 세워 선생을 모셨다. 지금 배양마을의 합천이씨들은 배양서당을 중심으로하여 자손들에게 선조의 유덕을 착실히 전수하고 있다.

 

 

參奉陜川李公潛之墓

참봉합천이공잠지묘

 

 

 

 

參奉陜川李公潛之墓

참봉합천이공잠지묘

 

 

 

 

 

///합천이씨 청향당 이원 가계///

  고조부 군수 이양근(李壤根)

  증조부 예빈봉사 이동재(李棟材)

할아버지 부호군 이계통(李季通)

  아버지 참봉 이승문(李承文)

  어머니 이석신(李碩臣)의 따님, 판서 이소봉(李少鳳)의 손녀

                징사 청향당 이원(淸香堂 李源,1501~1568)

           配位   의령(宜寧) 이씨

                  子 송당 이광곤

           동생 이잠(李潛)

                  姪 죽각 이광우(竹閣 李光友)

           동생 이청(李淸), 이공(李公), 이숙(李淑), 이현(李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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