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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전라병영성, 진남루, 장흥부원군 충정공 마천목(忠靖公 馬天牧)

구름에 달

by 碧巖 2018. 6. 5. 2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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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 전라병영성

사적 제397

강진군 병영면 성동리 137

 

강진 전라병영성 

사적 제397호로 지정된 강진 전라병영성(康津 全羅兵營城)

조선조 500여년 간 전라도 육군의 총 지휘부였던 곳으로,

호남과 제주도 536진을 통할한 육군의 총 지휘부로 초대 병마절도사인 마천목 장군이 축조한 것이며

사적 제397. 일명 설성(雪城)’ 혹은 세류성(細柳城)’이라고도 한다.

 

1417년에 지금의 광주광역시인 광산현(光山縣)에 있던 병영을 지금의 터인 당시 도강현(道康縣)으로 옮기어,

당시의 초대병사兵使 마천목(馬天牧)이 쌓았다고 하며, 둘레가 2,820척이고 높이가 108촌이라 하였다.

1599년에 병영을 일시 장흥(長興)으로 옮겼다가, 5년 만에 성곽을 수리하여 다시 병영이 되었고,

1894년의 동학농민전쟁으로 폐허화되자 이듬해에 영을 폐지하였다.

 

 

전라병영성(全羅兵營城) 남문인 진남루(鎭南樓)

 

 

특히 이 성에서는 1656년부터 1663년까지 네덜란드인 하멜(Hamel, H.) 일행이 억류되어 생활한 바 있으며,

성벽은 조선시대 읍성과 평지의 진영에 일반적으로 적용된 축조방법이 잘 남아 있다.

배후에는 해발 561m의 수인산(修仁山)에 산성이 있다.

1555(명종 10) 을묘왜변(乙卯倭變) 때 왜구가 달량진(達梁津)으로 쳐들어오자

병사 원적(元績)이 달량진성을 구원하기 위하여 출전하였으나 전사하고 성은 함락되었으며,

임진왜란 직전인 1581년까지에 대대적인 수축이 있었다.

1894124일에 동학농민군이 장흥성을 함락하고, 이어 10일에는 병영성이 함락되었다.

병영성의 성안에는 객사인 청심각(淸心閣)과 그 후신인 망미루(望美樓),

문루인 공무루(共武樓)를 비롯하여 아사(衙舍)인 운주헌(運籌軒)과 그 문루인 제승루(制勝樓),

남문인 진남루(鎭南樓)와 군기고를 비롯한 각종의 건물이 있으며,

9개의 우물과 5개의 연못이 있었다. 하마비(下馬碑)를 비롯한 3개의 병사 선정비도 남아 있다.

 

 

 

 

 

 

 

初代兵使馬天牧將軍                         全羅兵使營址

초대병사마천목장군                         전라병사영지

 

 

장흥부원군 충정공 마천목(忠靖公 馬天牧)

1358(공민왕 7)1431(세종 13). 고려 말 조선 초의 무신.

본관은 장흥(長興).

1381(우왕 7) 산원(散員)에 처음 제수된 뒤 여러 차례 승진하여 태조 초에 대장군(大將軍)이 되었다.

1398(태조 7) 1차 왕자의 난 때에는 정안군(靖安君)을 도와 공훈을 세웠고,

1399(정종 1) 상장군(上將軍)에 승진하였다

1400년2차 왕자의 난이 발생하자 다시 정안군의 선봉이 되어 크게 공헌하였다.

1401(태종 1) 익대좌명공신(翊戴佐命功臣) 3등에 녹훈되면서

() 80(), 노비 8, 은품대(銀品帶) 1(), 표리(表裏) 1, 1필을 하사받았다.

그리고 회령군(會寧君)에 책봉되어 동지총제(同知摠制)로 승진하였다.

마천목에게 내려진 공신 녹권과 교서가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140811월에는 회령군 겸 중군총제(會寧君兼中軍摠制)를 역임하고

1409년 9월 감순청(監巡廳) 재직 중에 전리(典吏) 고을귀(高乙貴)

치사(致死)한 사건으로 사헌부의 청죄(請罪)를 받았으나, 태종의 배려로 곡성(谷城) 유배에 그쳤다.

그 해 10월에 십일도도절제사(十一道都節制使)를 설치함에 따라 전라도도절제사에 복직되었다.

14111월 각위절제사(各衛節制使)를 설치하면서 용기시위사절제사(龍騎侍衛司節制使)가 되었고,

1412년 5월 전라도병마도절제사 판나주목사(全羅道兵馬都節制使判羅州牧使)로 파견되었다.

1414년에 장흥군(長興君)으로 개봉(改封)되었다.

1416년에는 도총제(都摠制)에 개수되었다가 곧 전라도병마도절제사로 파견되고,

14182월에 내시위절제사(內侍衛節制使)가 되었다.

1418(세종즉위)8월 좌우패(左右牌)를 좌우금위(左右禁衛)로 개편 우금위절제사가 되고, 장흥군에 제수.

14239월에 판우군도총제부사(判右軍都摠制府事)를 지냈다.

14243월 편모를 봉양하기 위하여 고향인 곡성현으로 내려갔으며, 곧 어머니 상을 치렀다.

14287월 장흥군에 복직되었다.

   이듬해에 연로를 이유로 치사를 청했으나 도리어 장흥부원군(長興府院君)에 진봉(進封)되었고,

   부원군으로서 죽었다.

   성품이 광심(廣深: 너그러우면서 마음이 깊음)하고 순근(醇謹: 온순하면서 근신함)하며,

   무략이 있어 시위와 국방에 공헌이 있었다. 시호는 충정(忠靖)이다.

 

 

 

 

孝子門 忠烈閣

                                                                     孝子贈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兼經筵參贊官密陽孫公壽龜之碑

                                                                     효자증통정대부승정원좌승지겸경연참찬관밀양손공수구지비

贈嘉善大夫戶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孫公之 忠烈碑 配貞夫人延安明氏

증가선대부호조참판겸동지의금부사손공지 충렬비 배정부인연안명씨

 

 

                參奉孫公福慈善頌德不忘碑

                참봉손공복자선송덕불망비

 

 

前主事金公志弘施惠碑

전주사김공지홍시혜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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