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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성-백범김구선생은거의 집 , 쇠실마을 백범김구은거기념관

구름에 달

by 碧巖 2018. 6. 6. 2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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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김구은거기념관

白凡金九隱居記念館

전남 보성군 득량면 쇠실길 22-64(삼정리 569)




                    安東金氏 大護軍公派 世莊碑

                    안동김씨 대호군공파 세장비



김구선생은거의 집

金九先生隱居의 집

 

1898년 여름으로 접어드는 어느 날

전남 보성군 득량면 삼정리 쇠실 마을에는 남루한 옷차림을 했지만 대단히 건장한 청년이 찾아 들어왔다

이름은 김두호(金斗昊)라고 했다.

이 김두호(金斗昊)가 백범 김구였다.

국운이 다해가던 구한말 국모인 명성황후가 일제에 의하여 살해당하는 치욕적 사건이 발생하였을 때

21세의 혈기왕성한 청년 김구는 황해도 치하포(鴟河浦)에서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하수인이었던 일본군 헌병장교 쓰치다 죠스케(土田讓亮) 중위를 맨주먹으로 때려 죽이고

체포되어 인천감옥에 수감되었다.(일부에서는 일본군인이 아닌 민간인이라고 한다.)

재판에서 사형을 언도받아 수감중에 대중들이 일본에 대한 분노 때문에 형집행이 중단되었다.


옥중생활에서 김구의 의연한 태도와 언행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를 흠모하게 하였고,

병마우후(兵馬虞候)를 지낸 강화도의 김주경(金周卿)도 그 중 한사람이었다.

김주경은 전 재산을 바쳐가며 김구의 석방을 위해 모든 일을 다 하였다.

어느 날 감옥소를 찾은 그가 김구에게 옷 한 벌과 함께 시 한편을 내 밀었다.

 

조롱을 박차고 나가야 진실로 좋은 새이며 (脫籠眞好鳥)

그물을 떨치고 나가야 예사스런 물고기가 아니리 (拔扈豈常鱗)

충은 반드시 효에서 비롯되니 (求忠必於孝)

그대여, 자식 기다리는 어머니를 생각하소서 (請看依閭人)

탈옥을 권하는 내용이었다.

김구는 감사의 표시와 함께

 '한 때 구차스럽게 살기위해 생명보다 중한 광명을 버릴 순 없으니 과히 우려하지 말라'는 답장을 보냈고,

이후 감옥내의 다른 장기수 몇 명과 함께 감옥을 탈옥하였다. 인천 감옥생활 18개월 만이었다.


탈옥후 공주 마곡사를 거쳐 강화로 김주경을 찿으러 가니

김주경은 김구를 비롯하여 여러명을 감옥에서 구해내기 위하여 가산을 탕진하고 피신까지 하여 만나지 못하였다.

이후 도망자로 함평,목포,완도,강진 등지로 피신을 하였으며

강진 내동마을의 김창묵(金昌,1867~1938)씨의 집에 잠시 머물렀으나

김창묵(金昌)은 장기간 은신처로 적합한 위치가 아니기에

강진보다 더욱 골짜기인 보성이 더 안전하다 판단되어

보성의 안동김씨 김승묵(金升,1864~1937, : 광언光彦)에게 소개하여

백범이 이곳 보성 쇠실마을로 들어섰다고 한다.

쇠실마을에서 머물렀던 기간은 40여일,  그는 다시 어디론가 떠났다.

그가 보살펴준 은덕에 감사하며 김승묵(金升1864~1937, : 광언光彦)에게 역사책을 남겼다.

이 책의 속표지에는 김두호(金斗昊)라는 서명과  한시 한 수가 적혀 있었다.

이별하기 어렵구나 이별하기 어렵구나

헤어지는 곳에서 일가의 정이 솟는다

꽃 한 가지를 반씩 나누어

한 가지는 종가에 남겨 두고 떠나네

이 세상 살아 언제 만날 것인고

이 강산을 떠나기 또한 어렵구나

넷이 함께 놀기 한 달이 넘었는데

일이 어긋나 아쉽게 헤어지며 떠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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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이 은거하던 집 

 황해도에서 일본 중위 쓰치다를 살해한 죄목으로 체포되었다가 탈영하여

 삼남지방을 유랑하던 중 칩거했던 득량면 삼정리 쇠실마을 김승묵(字: 광언光彦)씨 집

 현재는 고손자 김태권씨가 관리하고 있다.


그리고 48년이 지난 19469.

이 쇠실 마을을 다시 찾은 사람은 김두호가 아니라

온 겨레가 민족의 지도자로 숭앙해 마지않던 백범(白凡) 김구(金九)선생이었다.

그가 처음 쇠실 마을에 가명 김두호라는 사람으로 숨어들었을 때, 그는 쫓기는 탈옥수 신분이었다.

일본인을 살해한 죄목이 그를 따랐다.

선생은 당시 인천에서 탈옥, 삼남지방을 유랑하며 절치부심하던 시절이었다.

한 때는 과거를 보았고, 동학 접주가 되어 동학군으로 활약했고,

만주의병부대에 참여해 일본군토벌에 참여했던 그였다.

일본세력이 친러시아경향을 보인 민비(명성황후)일파를 제거한 을미사변으로 충격을 받고 귀향하던 중

18962월 황해도 안악 치하포에서 왜병 중위 쓰치다(土田壤亮)를 죽여,

국모(민비)의 원한을 푸는 거사를 감행했으나 체포돼 사형을 선고받고

형집행이 중지되었으나 석방되지 않자 인천감리영(監理營)에서 탈옥한 것이었다.


백범이 은거했던 그 쇠실마을엔 그 발자취가 전하고 있다.

김승묵(字: 광언光彦)이 백범을 묵게하였던 그 집은 현재 지계 증손자가 계속 관리하고 있다.

그 집안에서는 

'김구 선생이 마을 청년들에게 역사를 가르쳤다'

'콩잎죽을 드셨다'

'떠날 때 모시한복과 밀대모자를 드렸다'는 등 구전을 들을 수 있었다.

윗대의 교류는 후대에까지 이어져

해마다 626일이면 용산 백범기념관에서 거행되는 백범김구선생의 추모식에 참가하고 있다고 한다.


//김승묵 가계도//

 

   김승묵(金升, 1864~1937, : 광언光彦)

   子  김재열(金在烈, 1883~1930, : 홍규洪奎)

   손자     김성회(金性會, 1910~1998, : 기옥奇玉)

   증손자        김태룡(김태룡, 1935~1981)

                    김태권(김태권, 1946~ )




白凡金九先生隱居追慕

백범김구선생은거추모비
















  김구선생이 은거하던 집으로부터 30m쯤 떨어진 곳에

     야트막한 바위가 둘러쳐지고 좁다란 계곡의 물이 흘러내리던 곳이다.

     쇠실마을 입구와 득량 일대가 한눈에 들어오는 이곳 바위에 올라 국운을 걱정했을 것이다









                                           白凡金九先生隱居追慕碑

                                           백범김구선생은거추모비



                                 義士朴公文鎔紀蹟碑

                                 의사박공문용기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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