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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어초은윤효정 漁樵隱尹孝貞어초은공 묘소, 윤광효, 해남윤씨 영부 광주이씨 규한록

구름에 달

by 碧巖 2018. 6. 8. 2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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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초은공 윤효정 묘소 漁樵隱公 尹孝貞

전남 해남군 해남읍 연동리 산 27-1







어초은공 윤효정 漁樵隱公尹孝貞

윤효정(尹孝貞 1476~1543), 는 희참(希參) 는 어초은(漁樵隱)이다.

공은 김종직(金宗直)선생의 문하인 금남 최부((錦南 崔溥)선생과

유제 임우리(幽齊 林遇利), 성은 류계린(城隱 柳桂隣)의 가르침에 학문을 배운 성리학자로서

퇴계선생(1501:연산군 7)보다는 25,

율곡선생(1536:중종 31)보다는 60년 먼저 태어나신 분이며

학문이 뛰어나 해남향인들의 마음을 크게 열어 밝게 가르치게 하여주었다.

공은 당시의 산림학자들이 명리의 그늘에서 벗어나 산촌의 삶 속에서 성리학의 실천을 추구하듯이

자신의 아호를 고기잡고 땔나무하는 숨겨진 사람으로서의 삶을 살아간 인물이다.

공의 적덕(積德)1702년에 간행한 해남윤씨족보(임오보) 2권의 어초은공 행적란에서 볼 수 있는데

"어초은 유음덕 윤씨지업 복진어차(漁樵隱 有陰德 尹氏之業 復振於此)"란 기록은

어초은공께서 해남주민 일부가 한해(旱害) 또는 수해(水害)로 인하여 나라에서 각 가정에 지정한 세곡(稅穀)

납부하지 못하여 많은 사람들이 감옥에 갇혀 있는 안타까운 실정을 보고

3회에 걸쳐 곳간을 열어 세곡(稅穀)을 대신 납부해 주어서 많은 주민들이 감옥에서 풀려났다는 소문에

해남 주민과 유림들이 적선(積善)의 고마운 뜻을 각 고을 및 한양에까지 전하므로

해남윤씨가 더욱 빛났으며 그의 아들 대()에 와서 크게 가세(家勢)가 융성하여 가문의 기반이 다져진 뒤

자손들의 과관(科官)과 절의(節義)가 면면히 이어져

일찍이 호남지방(湖南地方)에 자리를 잡고 명문(名門)의 지위를 굳혀왔으며,

그 후 많은 유명인물들이 나오면서 해남윤씨의 기반은 튼튼해지고 반성(班姓)으로의 각광을 받았다고 한다. 

어초은공 윤효정이 강진 덕정동에서  기거할 때 당호(堂號)를 우애당(友愛堂)이라 하였는데,

이곳에 시를 걸어 놓았다.

妻子似衣裳 처자사의상 처자는 의복과 같으며

兄第如手足 형제여수족 형제는 수족과 같으니

衣裳綻可補 의상탄가보 의복이 헤이면 기울 수 있지만

手足斷何續 수족단하속 수족이 잘리면 어찌 이으리요.

漁樵隱公은 이 시를 통하여 직계 처자보다 형제간의 우애를 중하게 여기었다고...




    贈嘉善大夫戶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成均生員尹公諱孝貞之墓 贈貞夫人草溪鄭氏 祔左

    증가선대부호조참판겸동지의금부사성균생원윤공휘효정지묘 증정부인초계정씨 부좌












어초은공 윤효정의 12代孫이며,  고산 윤선도의 8代孫

윤광호 尹光浩(18051822)와  배위 廣州李氏광주이씨의 묘




11 윤   종 尹 種

12 윤효정 尹孝貞 어초은공漁樵隱公

13 윤   구 尹 衢

14 윤홍중 尹弘中

15 윤유기 尹唯畿 生父 윤의중尹毅中

16 윤선도 尹善道 生父 윤유심尹唯深

17 윤인미 尹仁美

18 윤이석 尹爾錫

19 윤두서 尹斗緖

20 윤덕희 윤덕희

21세 윤   종 尹   悰(17051757)

22세 윤지정 尹持貞(17311756)배위 남양홍씨=후사가 없이22,26세에 졸, 인척 종경양자

23세 윤종경 尹鐘慶(17691810)첫째,둘째 부인 무후 졸, 셋째 양천허씨 독자 광호 생후 종경 졸

24윤광호 尹光浩(18051822) 배위 광주이씨 (광원군 이극돈의 후손) 윤광호 18살에 결혼 직후 졸,



해남윤씨 종부의 한많은 삶 기록

쇠락한 집안 일으킨 광주이씨가 시어머니에게 쓴 글 '규한록'

 

해남읍 연동 녹우당의 유물전시관에는 고산 윤선도를 비롯한 해남윤씨가의 유물들이 전시돼 있다.

그런데 전시된 유물 중에 유심히 보면 관심을 끄는 것이 하나있다.

대부분 한문으로 쓰여진 옛 고문서들 중에 유독 두루마리에 말아져 있는 한글로 된 고문서가 그것이다.

직접 읽어 내리기에는 어려운 부분이 있지만 유창하게 흘려 내려쓴 글이 범상치 않아 보인다.

이 한글고문서는 고산 윤선도의 8대손인 윤광호(光浩)의 부인 광주이씨가 쓴 것으로

박효순교수에 의해 규한록(閨恨錄)’으로 소개된 적이 있으며,

조선시대 여인들의 안방문학인 규방가사'의 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고산 윤선도가 그의 시조(가사)에 고아한 우리말(한글)을 사용하여 훌륭한 문학적 평가를 받고 있듯이,

이러한 전통을 이 집안의 종부인 광주이씨가 순 한글작품(편지형식)인 규한록을 통해 그 문학적 업적을 다시 이루고 있다.

규한록은 광주이씨 부인이 순조 34년에 쓴 작품으로 비록 교과서에 실리거나 큰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박효순 교수는 조선시대 우리나라 대표적인 여성문학인

계축일기한중록에 비견할 만큼 높은 문학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평가한 바 있다.

 

규한록의 배경

규한록이 쓰여진 배경을 보면 당시 조선후기 1819C 무렵 녹우당의 상황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우선 우리나라에서 18C는 실학적 학문토대가 마련된 때로

해남윤씨가 또한 집안의 가학속에 실학적 학문경향을 보여주어

이러한 작품을 쓰게된 문학적 기반이 이미 이루어져 왔음을 알게 해준다.

녹우당 해남윤씨가는 조선시대 명문대가로 잘 알려져 있듯이 수많은 인물들을 배출하고

국부의 말을 들을 정도로 재산도 많은 집안이었다.

그런데 이 집안도 수백년의 대가 끊어질 뻔한 때가 있었으니

그때가 바로 광주이씨 부인이 규한록을 쓰는 시기를 전후한 무렵이다.

해남윤씨가는 우리나라에서도 보기 드물게 조선5백년의 역사를 온전히 그대로 지켜온 집안이다.

이토록 오랫동안 한 가문을 이을 수 있었던 것은 일찍부터 장자상속제를 받아들여 집안의 재산을 소진하지 않고

그대로 계긍케 하였던 부분과

종가에 종손이 없을 때 집안에서 양자로 입양하여 대를 잇게 하는 양자제도가 큰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고산 윤선도를 비롯하여 어초은 윤효정부터 12대손인 윤광호까지 4번에 걸쳐 입양한 사실이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제도 속에서도 대가 끊길 뻔한 때가 있었으니 그때가 바로 규한록의 작가 광주이씨가 살던 때이다.

  

가문 중흥의 영부(英婦)

 

해남윤씨가를 종합적으로 소개하고 있는 녹우당의 가보’ (윤영표 편저)를 보면

인물 연혁란에 윤두서의 손자인 윤종(17051757)에서부터

증손인 윤지정(持貞17311756),

윤종경(鐘慶17691810),

윤광호(光浩18051822)에 이르는 동안 이들의 행적이 거의 나타나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당시의 상황을 보면 몇 대에 걸쳐 간신히 종통이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윤지정은 부인 남양홍씨가 후사도 없이 22세에 죽고, 그마저 26세에 요사해 버린다.

이에 윤종경이 입양되었으나 그 또한 장수를 누리지 못한데다가 부인을 거듭 잃고

세 번째 부인 양천허씨에게서 독자 광호(光浩)를 겨우 얻는다.

그런데 광호도 결혼직 후 신행길에서 돌아오자 마자 18세에 병사하고 만다.

종가의 대가 끊길 수도 있는 절대절명 순간이었다.

그런데 이때 신랑의 얼굴도 보지 못하고 해남윤씨가의 종부가 된 사람이 규한록'의 작가 광주이씨 부인이다. 이씨부인은 고산 윤선도의 8대 종손 되는 광호의 처인 해남윤씨 종부로

조선 세종대에서 연산군대에 걸쳐 권신이던 광원군 이극돈의 후손이다. 명문가의 후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집안의 후손 탓인지 대 종가에서 어렵고 힘든 종부의 역할을 하며 끊어질 뻔한 종가의 대를 잇게 한 것이다.

해남윤씨가에서는 이러한 광주이씨 부인을 가문 중흥의 英婦로 부르고 있다.

남편도 없이 한 집안의 종부로 들어와

대가 끊길 듯 쇠락해 가기만 한 집안을 이어가게 만든 강단 있는 종부로 기록되고 있기 때문이다.

한 여인의 몸으로 대 종가의 살림을 맡아 꾸려 간다는 것은 보통 여인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힘든 일이었다. 자신의 이러한 고난스런 삶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 것이 규한록'이라고 할 수 있다.

규한록은 광주이씨 부인이 힘든 종가의 생활을 잠시 떠나 친정에 가서 시어머니에게 편지형식으로 쓴 글이다.


규한록 속에는 집안 숙부들의 섭정속에서

이들의 간섭을 뿌리치고 멀리서 양자를 데려와 대를 잇게 하는 과정들이 눈물겹게 그려져 있다.

비록 종부였지만 어렵고 힘든 생활을 헤쳐가야 하는

조선시대 여인의 한 많은 삶이 들어있는 것이 한록'이라고 할 수 있다.

녹우당을 생각하면 고산 윤선도의 문학적 업적을 먼저 떠올린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에게 규한록'은 아직 까지도 생소한 편이다.

이러한 면에서 규한록은 여성문학이라는 단편적인 범위를 뛰어넘어 우리글을 제대로 표현했다는 것에서

우리문학에 대한 자긍심과 함께 한 여인의 삶에 대한 치열한 도전 정신을 느낄 수 있다.

 

정윤섭(향토사 연구가)

 

<사진 위-해남윤씨가의 유물들이 소장되어 있는 유물전시관

사진 아래- 고산 윤선도의 8대손인 광호의 부인 광주이씨가 한글로 쓴 규한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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