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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진주성 晋州城 ,임란대첩순의단,창렬사,촉석루, 공북문,

구름에 달

by 碧巖 2018. 10. 26. 2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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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성 : 경상남도 진주시 남강로 626

김시민 金時敏

1554(명종 9) ~ 1592(선조 25)

본관은 안동. 자는 면오. 아버지는 지평 충갑이다.

1578(선조 11) 무과에 급제하여 군기시에 들어갔다.

1583년 귀화한 여진인 니탕개가 회령지방에서 난을 일으키자 정언신(鄭彦信)의 부장으로 출정하여 공을 세웠다.

 

1591년 진주판관에 임명되었고,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난 뒤 목사 이경(李璥)이 병사하자 그 직을 대리하면서,

민심을 안정시키고 성을 수축하고 무기와 기재를 정비하는 한편, 군사를 편성하였다.

이때 일본군이 사천에 집결하여 진주로 향하려 하자, 곤양군수 이광악(李光岳), 의병장 이달(李達

곽재우(郭再祐) 등과 합세하여 적을 격파하고 고성·창원 등을 회복했다.

이어 의병장 김면(金沔)과 함께 거창 사랑암에서 일본군을 크게 무찔렀다.

 

그 뒤 여러 차례 전공을 세워 이해 8월 진주목사로 승진되었다.

1592년 9월에는 진해에서 적을 물리치고 적장을 사로잡아 행재소로 보냈다.

10월 적 2만여 명이 진주성을 포위하자,

성 안의 노약자와 부녀자까지 남장을 하게 하여 군사의 위용을 보이게 하는 등,

불과 3,800여 명의 병력으로 7일간의 치열한 공방전을 벌여 적을 물리쳤으나

이 싸움에서 이마에 적탄을 맞고 며칠 뒤 졸 하였다.(진주전투)

 

1604년 선무공신 2등에 추록되고, 그뒤 영의정에 추증되고 상락부원군에 추봉되었다.

진주의 충민사·산성정충당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忠武이다.



忠武公 金時敏 將軍

청사에 빛나는 진주대첩을 쓰고 간 충무공 김시민 장군은 1554년 충남 천안 병천에서 지평(持平) 충갑(忠甲)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안동. 1578년 무과에 급제. 훈련원군기시(軍器寺) 판관(判官)을 거쳐

1591년 진주판관이 되었다. 15924월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목사(牧使)가 병으로 죽자 그 직을 대신하여

민심을 다독이고 성과 못을 수축하는 한편 무기를 정비하고 군사체제를 갖추어 사천고성진해지례금산(金山)

등지에서 승전고(勝戰鼓)를 올리며 목사로 승진되었다. 그리하여 같은 해 105일 침공한 적의 2만 대군을

불과 3,800여 병력으로 6일간의 공방전 끝에 크게 무찔러 이기니 곧 진주대첩이다. 그러나 이마에 적탄을 맞았다.

이어 경상우도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으나 병상에서 나랏일을 근심하며 눈물짓다가 39세를 일기로

이곳 진주성에서 순절(殉節)하였다. 슬프다! 장군의 천수(天壽)가 꺾이지 않았던들

이듬해 6월 진주가 적의 손에 떨어졌을까. 1604년 선무공신(宣武功臣)에 추록된 뒤 영의정에 추증되고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에 추봉되었다. 시호는 충무(忠武).

이에 만 사람의 뜻을 모아 장군상을 세움은 나라와 겨레를 있게 한 그 매운 충절을 만세에 전해 우러르고자 함이다.

200011





조선시대에  //9명의 충무공//충무(忠武)’라는 시호를 받은 이는 모두 9명이다.

좌의정 조영무(趙英茂),

영의정 구성군 이준(李浚),

병조판서 남이(南怡),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李舜臣),

경상우병사 김시민(金時敏),

형조판서 이수일(李守一),

오위도총부 도총관 정충신(鄭忠信),

좌의정 구인후(具仁候),

요동백 김응하(金應河) 등 모두 9분이다.

9분 중에서 내란의 공이 아닌 외환의 공에 의해 순국하여 충무공 시호를 받은 분이

안동인 김시민 장군, 안동인 김응하 장군, 덕수인 이순신 장군으로   이 세 분만이 사후 영의정을 증직 받았다.



晉州城壬辰大捷癸巳殉義壇

진주성임진대첩계사순의단

단하 왼편에는 김시민 장군 전공비 원문과 번역문이

       오른편에는 진주촉석정충단비 원문과 번역문이 오석 바탕에 새겨져 있다.

이렇게 임진왜란 때 이름없이 순국한 수많은 민초들을 위한 단소가 우리나라에 두 군데 더 있는데

남원의 사적 제272만인의총과    금산의 사적 제15칠백의총이 그것이다.



晉州矗石旌忠壇碑銘진주촉석정충단비명

진주촉석정충단비는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장렬하게 순국한

··민의 영령을 제사하기 위해 세운 비석으로 숙종 12(1686)에 세웠다.

1차 진주성 전투에서 순국한 충무공 김시민 장군과는 무관하지만

64대 김세익(金世翊) 통제사 재임 중에 이 비를 세웠다.


김시민장군 전공비와  진주촉석정충단비명


[김시민(金時敏) 장군 전공비]

김시민장군전공비는 진주전성각적비(晋州全城却敵碑)’라고도 한다.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인 진주성 전투를 승리로 이끈

김시민(金時敏) 장군의 전공을 기록하기 위하여 광해군 11(1619)에 세운 비다.

임진왜란 3대첩은

김시민 장군의 진주성대첩과

이순신 장군의 한산도대첩

권율 장군의 행주성대첩이.

문화관광해설사에 의하면 진주성은 김시민 목사 이전에

김시민장군의 숙부이신 김제갑(金悌甲) 선조가 목사로 부임했던 곳이다.

김제갑 목사가 재임 중 선정을 베풀었기 때문에

진주 백성들은 숙부에 대한 신뢰로 조카인 김시민 목사에 거는 기대가 컸고,

그만큼 믿고 따르고 전투를 치를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고 한다.

또한 해설사는 이 비()가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1호 임을 누차 강조하였다.





[진주촉석정충단비명(晉州矗石旌忠壇碑銘)]

진주촉석정충단비는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장렬하게 순국한

··민의 영령위에게 제사하기 위해 세운 비석으로 숙종 12(1686)에 세웠다.




[창렬사(彰烈祠)]

창렬사는 비훼철 47서원(남한 36) 중 한 곳으로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5호이다.

임진왜란 제2차 진주성 전투(1593)에서 장렬히 순국하신 분들의 신위를 모시기 위해 건립되었으며

1차 진주성 전투(1592)에서 대승을 거둔 김시민(金時敏) 장군의 신위를 모신 충민사(忠愍祠)

고종 5(1868)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면서 장군의 신위를 이곳으로 옮겨와 함께 모셨다 

 

지금 창렬사에는 충무공 김시민(金時敏) 장군의 신위를 맨 윗자리에 모시고

창의사 김천일(金汗鎰)최경희(崔慶會) 등 임진왜란 때 순국한 39분의 신위를 모시고 있다.




[촉석루(矗石樓)]

촉석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면 바로 마주하는 것이 우리나라 3대 루정중 하나인 촉석루(矗石樓)이.

북한까지 포함하면 진주 촉석루(矗石樓), 밀양 영남루(嶺南樓), 평양 부벽루(浮碧樓)3대루이고,

남한만 국한하면 부벽루 대신 남원 광한루(廣寒樓)가 들어간다.

진주성문화관광해설사에 따르면 촉석루도 영남루처럼 양옆에 부속건물이 있었다고 한다.

영남루가 촉석루를 본 따서 후에 지은 건물이라고 하며 

답사일에는 태풍으로 문화재 훼손뿐 아니라

탐방객의 안전을 위하여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개방을 하지 않는다는 점이 너무나 아쉬웠다.

하여 의기사와  의암 등은  볼 수가 없어서 미련을 남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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