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렬사(忠烈祠)]
사적 제236호
경남 통영시 여황로 251
충렬사는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서도 살아남은
47개(북한 11개)의 비훼철 서원 중 한 곳으로 이순신 장군 한분을 모신 사당이다.
충렬사의 여섯 개의 문 가운데 첫째 문이다.
2개의 둥근 기둥위에 지붕 없는 붉은 살을 열지어 박아세웠다.
홍전문(紅箭門)이라 쓰고 홍살문이라 읽으며 때로는 홍문(紅門)이라고도 하는데
정2품 이상의 신위를 모신 사당에만 세울 수 있다.
충렬사의 정문인 외삼문에 걸린 ‘忠烈祠’현판은 동춘당 송준길(宋浚吉)의 글씨라 한다.
강한루(江漢樓)
제172대 통제사 이승권(李升權 : 이충무공 8세손)이 1840년에 지은 누각으로
옛부터 충렬사를 찾은 많은 시인 묵객들이 이 누대에 올라 이 충무공의 큰 덕을 되새기며
동백 고목과 더불어 후원의 푸른 죽림을 자주 시제에 올렸던 영남 유수의 수영(水營) 누각(樓閣)이다.
전형적 조선의 팔작지붕 양식으로 정면 세칸, 측면 세칸의 익공식 이층 구조로
아래층 뒤편엔 통용문인「영모문」현판이 있고
이층 누마루는 우물마루에 계자난간을 두르고 연등천장을 하고 있다.
영모문
내삼문
숭무당(崇武堂)
통제영에서 파견한 장교 3명이 상주하면서 사우(祠宇)와 위토전답을 관리하던 곳.
지금은 회의실과 강의실로 사용하고 있다.
天日成盟草木知 천일성맹초목지== 하늘에 맹세하니 초목도 아는도다
閣上麒麟圖像肅 각상기린도상숙== 기린각에 그린모습 엄숙도 한데
鼓邊??鐫名休 고변과두전명휴== 북가에 새긴이름 아름답구나
江山不息英雄氣 강산불식영웅기== 강산에는 영웅기상 끊임이 없도다
江漢悠悠忘千秋 강한유유망천추===강한은 유유히 천년을 흐르고
欲慕風風 욕모풍풍== 경모하는 마음은 쉼없는 바람이어라
경충재(景忠齎) : 충렬서원(忠烈書院)
제70대통제사 최 숙이 재유사(齋有司 : 관리자)를 두고 지방 청소년들에게 학문과 충의를 교육시키기 위하여
1695년에 건립한 강당으로 충렬서원이라 불렀다.
1865년, 1867년 두 번에 걸친 대원군의 서원철폐 때에도 이순신 사당 가운데 유일하게 존속된 유서 깊은 서원이다.
지금은 공신과 집사들의 회의실로 사용하고 있다.
水國秋光募 수국추광모 == 다도해에 가을빛 저무니
驚寒雁陣高 경한안진고 == 찬바람에 기러기떼 높이 날고
優心輾轉夜 우심전전야 == 나라 근심에 뒤척이는 이 밤
殘月照弓刀 잔월조궁도 == 지는 달만 활과 칼을 비치누나
충렬사안에는 6개의 비각이 있다.
제1호비각 : 충렬묘비명(忠烈廟碑銘)
묘(廟)는 사당을 뜻하고 비명(碑銘)은 비에 새긴 글이다.
충렬묘비명은 충무공 이순신장군의 공적을 기리고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백사 이항복(白沙 李恒福)이 왕명을 받아 글을 짓고
1861년 민섬(閔暹) 통제사가 비와 비각을 세웠다.
글은 우암 송시렬(尤巖 宋時烈 : 효종의 스승)쓰고,
문곡 김수항(文谷 金壽恒 : 숙종조의 영의정)이 전서체로 썼다.
제2호비각:가선대부 삼도수군통제사 이 언 상(李彦祥) 사적비
덕수이씨 충무공파의 직계손 가운데 처음으로 통제사(제70대)가 되었으며
재임 중 (영조 21년 1754.12 - 1747.10)충무공을 본받아 군선 관리와 갑병(甲兵 : 무장)에 큰 공적을 남겼다.
존귀한 신분임에도 늘 군무개혁에 여념이 없고 청렴결백하여 거친 음식과 낡은 옷을 탓하지 않았다.
둔전(屯田 : 군의 자경농지)을 크게 넓혀 영의 살림을 돈독히 하고
천재를 당하면 군창을 열어 빈민구제에 솔선하여 진영의 여러 군관들이 비를 세워 그 덕을 기렸다.
형제 세분과 아래 직계 삼대로 모두 여섯 통제사가 배출되어
가문의 중흥을 이룬 분으로 충무공과 함께 아산 현충사에 배향되어 있다.
제3호비각 : 충무공 직계후손 통제사 5위의 기념비
(1) 가선대부 삼도수군통제사 이 태 상(李泰祥) 거사비 (제121대)
(2) 가선대부 삼도수군통제사 이 한 창(李漢昌) 영세불망비 (제138대)
(3) 가선대부 삼도수군통제사 이 한 풍(李漢豊) 영세불망비 (제143대)
(4) 가선대부 삼도수군통제사 이 항 권(李恒權) 영세불망비 (제167대)
(5) 가선대부 삼도수군통제사 이 승 권(李升權) 거사비 (제172대)
제4호비각:삼도수군통제사 최 숙(崔橚)사적비
우암 송시렬 선생의 문하생으로 조선 영조조에 제70대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1694.8~1695.8)하여
병선건조와 군율정비 및 충렬사 보수에 큰 공로가 있다..
통제사로 도임한지 삼일 만에 충렬사를 참배하고 풍우(風雨)에 심히 퇴락한 사우를 다시 정비하였다.
또 경내에 경충재(景忠齎)를 세워 영내의 문무관 자녀들에게 글과 충무공의 정신을 가르쳐
타지에 유학하지 않고도 이곳에서 면학하여 시문을 깨우침으로서 이 땅이 진실로 으름난 고장이 되었으며
이 때 세운 서당이 충의의 명문, 충렬서원인 경충재(景忠齋)이다..
이 충렬서원은 대원군의 1.2차 서원철폐(1864. 1868) 때에도
이충무공의 사당 가운데 유일하게 제외되어 존속되었다.
제5호비각 : 삼도수군통제사 이 운 룡(李雲龍) 기실비
재임시(1603.2~1605.9) 선조왕의 명을 받아 이 곳 통제영서문 밖에 통영충렬사를 창건(1606)하였다.
시호는 식성군(息城君), 경북 청도에서 출생하여 24세에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을 지냈다.
이충무공과 함께 함경도 시전부락전투에 참전한 바 있고 31세에 옥포만호로 재임하던 중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풍비박산된 경상우수군을 재건하여 원균 우수사를 보좌하고
전라좌수사 이순신 장군과 더불어 여러 해전에서 왜적을 물리쳐 크게 무공을 세웠다.
정유재란 때에는 육전에서도 공을 세우 선무원종공신으로 책훈(策勳 : 공이 인정됨)되고
전란 후에는 비변사 당상관을 거쳐 제7대 통제사로 제수(除授)되었다.
문집으로는 조선수군사 연구에 귀중한 사료인 거영일기(居營日記) · 계보등록(啓本謄錄)을 남겼고
경남 의령군 기강서원(岐江書院)에 배향되어 있다.
제6호비각:삼도수군통제사 유 형(柳珩) 유애비(遺愛碑)
시호는 충경공(忠景公), 명문가 경원부사(府使) 유용(柳溶)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세살에 부친을 여의고 그리고 26세에 모친을 여의었다.
열다섯에 참의(參議) 조인(趙認)에게서 글을 배워 시문(詩文)과 사서(史書)에 통달하였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 김천일(金千鎰) 휘하에 들어가 강화도에서 종군하였다.
이십구세에 무관별시에 급제하여 선전관이 되어
선조 임금에게 탐라말(耽羅馬 : 제주산 말)을 하사받고 진충보국(盡忠保國)을 맹세하였다.
훈련도감의 파총(把摠 : 종사품의 무관)을 거쳐 해남현감이 되어
이순신 장군께서 순직하신 마지막 노량해전에 함께 참전하여
여섯발의 적탄을 맞아 모두 살아나기 힘들 것이라 하였으나 끝까지 전투를 지휘한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
부산진첨사에 특진되고 경상우수사를 거쳐 제6대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이순신 장군 생전에 통제사의 재목으로 낙점받은 문무겸전한 장군으로
문집으로는 석담유고(石潭遺稿)를 남겼다.
동재
서재
내삼문과 강당(정당)
1895년 통제영이 폐영되어 관급(官給)이 끊어지고,
경술국치(庚戌國恥:1910년 한일병탄)를 당하여 제사를 받드는 주체가 없어지자,
이 곳 지방민들이 기미년 독립만세운동(1919)을 계기로
충렬사영구보존회(현 (재)통영충렬사의 전신)를 결성하여
제향의 맥을 이어왔으나 일제강점기에는 왜경이 장군의 위패를 칼로 부수고,
삼문의 태극문양에 덧칠하여 일장기(日章旗)로 바꾸고
또 제사를 올리지 못하도록 정당에 못질하는 수난을 겪기도 하였다.
1945년 광복을 맞아 이승만 대통령, 임시정부의 백범 김구 선생을 필두로
송진우, 여운형, 신익희 등 많은 광복지사들이 환국 참배하여 건국의 결의를 다진 유서깊은 사당이며
노산(鷺山) 이은상(李殷相) 선생이 국역편찬한 '이충무공전서'의 산실이기도 하다.
정당을 향하여 중앙 좌측의 주련은 명나라 진린(陳璘:쳔린) 도독이
이충무공을 찬양한 어록의 한 구절인
「욕일보천지공(浴日補天之功:해를 씻어 빛나게 하고 하늘의 구멍을 메운 큰 공)」이며,
우측은 이충무공께서 임전결의(臨戰缺意)하신
「서해어룡동(誓海魚龍動) 맹산초목지(盟山草木知)」에서 따온 것으로
조선 고종조의 명신이자 예서체의 대가인 신관호(申觀浩) 제187대통제사의 휘필이다.
제 단 (祭壇)
충렬사 제단 위에는 「충무공 신위(忠武公 神位)」라고 쓰여진 밤나무 위패가 모셔져 있는데
늘 붉은 비단으로 싼 독(犢 : 신주함)안에 모셔두었다가 향사 때에는 함을 열게 된다.
정참의 천장은 보·도리·서까레가 드러나는 연등천장인데
바로 위패 위쪽 한 평 정도 크기의 소란반자(「井」자 무늬 널판지)는 단청을 화려하게 칠하였다.
팔사품도 병풍 八賜品圖 屛風
명나라 신종황제가 조선과 중국을 구한 이충무공의 공적을 찬양하여 보냈다고 하는 15점의 하사품을
신관호 제 187대 통제사가 그려서(1861) 정침에 비치한 것이다.
신관호 통제사는 개화기의 명신으로 병인양요 때 공을 세우고
한일수호조약. 한미수호조약의 조선 측 대표였으며 조선수뢰를 설계, 제작한 엘리트 무신이다.
특히 정약용을 사숙하고 김정희(추사) 문하생으로
시. 서. 화에 능하였을 뿐아니라 예서체의 명필로 문무를 겸전한 통제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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