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평부원군 충정공 백졸재 한응인
淸平府院君 忠靖公 百拙齋 韓應寅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사사동 산 18-6
경기도 기념물 제157호
忠靖公行狀碑충정공행장비
有 朝鮮國輸忠貢誠翼謨修紀光國 推忠奮義炳幾協策平難功臣
유 조선국수충공성익모수기광국 추충분의병기협책평난공신
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右議政兼領 經筵事監春秋館事 淸平府院君 贈諡忠靖公行狀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우의정겸영 경연사감춘추관사 청평부원군 증시충정공행장
충정공 한응인 묘역
청평부원군 충정공 백졸재 한응인 淸平府院君 忠靖公 百拙齋 韓應寅
본관은 청주(淸州). 字는 춘경(春卿), 號는 백졸재(百拙齋)·유촌(柳村).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 한확(韓確)의 6세손으로
부사직(副司直) 한경남(韓敬男)의 장남이며,
어머니는 경주김씨로 현감(縣監)을 지낸 김만일(金萬鎰)의 따님이다.
한응인(韓應寅)[1554~1614]은 1576년(선조 9) 생원·진사 시험에 모두 급제하고
1577년 알성시 병과에 8등으로 급제하여 예문관에 들어갔다.
승정원주서로 일하면서 기사(記事)하는 데 밝고 민첩하였다.
이어 예조좌랑·병조좌랑·사헌부지평·사간원정언을 역임하였고,
1584년(선조 17) 종계변무주청사(宗系辨誣奏請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아버지의 상기(喪期)를 마친 뒤 성균관직장을 지냈다.
1588년 선천군수로 임명되어
이듬해 정여립(鄭汝立)의 모반 사건을 적발한 공으로 호조참의를 거쳐 승정원도승지가 되었다.
1589년 예조판서에 올라 진주사(陳奏使)로 다시 명나라에 가서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하여
조선에 길을 빌려 달라는 사실을 고하여 명나라의 조선에 대한 의심을 풀게 했다.
1592년(선조 25) 귀국하는 길에 의주에서 임진왜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개성에 이르자
피난길에 오른 왕을 따라 평양으로 갔다가 제도도순찰사에 임명되어 임진강 방어에 임하였다.
그러나 일본 장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유인 작전에 속아 전군이 붕괴하자,
왕을 뒤따라 의주의 행재소(行在所)로 달려가 공조판서에 제수되었다.
전세가 불리하자 요동으로 건너가 원병(援兵)을 청하여
순안사(巡安使) 낙상지(駱尙志)가 군병을 이끌고와 의주를 함께 지키다가 형조판서에 임명되었다.
이여송(李如松)이 원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자 중국어에 능해
이덕형(李德馨)과 함께 접반사(接伴使)가 되어 이여송의 막부(幕府)에서 평양성 탈환에 공을 세웠다.
왜적이 물러가고 한양이 수복되자 능묘를 보살피고 도처에 뒹구는 시체를 묻어 주었으며,
호적과 지도를 정리하는 등 사회 질서 회복에 힘을 쏟았으며,
호조판서가 되어 군량미 보급에 힘써
10만 명의 군사들에게 차질 없이 군수 물자를 제공함으로써 칭송을 받았다.
1595년(선조 28) 세자책봉주청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평안감사로 있으면서 당시 관내에 있던 많은 명나라 장병과 화합을 도모하는 데 힘썼고,
1599년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로 가서
정유재란의 원군에 대하여 사례하고 귀국한 뒤 의정부우찬성이 되었다.
1600년(선조 33) 이조판서, 1601년 병조판서, 1607년 우의정에 이르렀다.
1608년 선조가 자신의 병환이 위중해지자 한응인을 비롯하여 한준겸(韓浚謙) 등 7인을 불러
영창대군(永昌大君)의 보필을 부탁한 유교칠신(遺敎七臣)의 한 사람이었으나,
1613년(광해군 5) 계축옥사(癸丑獄事)에 연루되어 삭탈관직이 된 뒤
사사리[현 안산시 상록구 사사동] 선영이 있는 곳으로 돌아와
이듬해 향년 6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1623년 인조반정 후 신원이 복원되었다.
저서로는 『백졸재유고(百拙齋遺稿)』가 있다
1642년(인조 20) 세운 신도비의 비문은 영의정 문충공 북저 김류(文忠公 北渚 金瑬)가 찬하고,
글씨는 셋째 아들인 판서 한인급(韓仁及)이 썼으며,
사헌부대사헌 김광현(金光炫)이 전자(篆字)하였다.
한편 1985년 세운 행장비(行狀碑)의 비문은 월사 이정구(月沙 李廷龜)가 찬하고,
글씨는 12세손 한준수(韓峻洙)가 썼다.
1590년(선조 23) 종계변무의 공으로 광국공신(光國功臣) 2등에 책록이 되었고,
정여립의 모반을 고변한 공으로 평난공신(平難功臣) 1등에 녹훈되었다.
청평군(淸平君)에 봉해졌으며, 1605년 청평부원군(淸平府院君)에 진봉되었다.
시호는 충정(忠靖)이다.
輸忠翼謨修紀光國推忠奮義炳幾協策平難功臣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右議政兼
수충익모수기광국추충분의병기협책평난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우의정겸
領 經筵事監春秋館事 淸平府院君 贈諡忠靖公韓公之墓 貞敬夫人全州李氏祔左
영 경연사감춘추관사 청평부원군 증시충정공한공지묘 정경부인전주이씨부좌
충정공 한응인의 부친 증 영의정 한경남묘소
韓敬男한경남 (1526~1585)
본관은 청주. 자는 극일(克一).
아버지는 부호군 한유(韓侑), 어머니는 장흥임씨(長興任氏)로 봉사 임우견(任右堅)의 딸이다.
음직(蔭職)으로 부사직에 이르렀다.
아들 청평부원군(淸平府院君) 한응인(韓應寅)의 명망으로 영의정에 추증
贈純忠積德秉義補祚功臣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 領經筵觀象監事
증순충적덕병의보조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영의정겸 영경연관상감사
西原府院君 行禦侮將軍忠佐衛副司直韓公敬男之墓 贈貞敬夫人慶州金氏之墓
서원부원군 행어모장군충좌위부사직한공경남지묘 증정경부인경주김씨지묘
충정공 한응인의 조부 부호군 증 좌찬성 한유(韓侑)묘소
충정공 한응인의 증조부 한세좌 묘소
贈資憲大夫吏曹判書兼 判義禁府事五衛都摠府都摠管行 禦侮將軍軍忠左衛副司直
증자헌대부이조판서겸 판의금부사오위도총부도총관행 어모장군군충좌위부사직
淸州韓公諱世佐之墓 贈貞夫人靈山辛氏祔左
청주한공휘세좌지묘 증정부인영산신씨부좌
묘역후경 맨위부터 조부 한유, 증조부 한세좌, 부친 한경남, 충정공 한응인묘소
부친 한경남, 증조부 한세좌, 조부 한유,
//청평부원군 충정공 백졸재 한응인(淸平府院君 忠靖公 百拙齋 韓應寅, 1554~1614) 가계//
6대조 영의정 양절공 간이재 한확
5대조 판돈녕부사 공안공 한치인
고조부 승정원좌승지 한건(韓健)
증조부 충좌위 부사직 이조판서 한세좌(韓世佐)
조부 부호군 증 좌찬성 한유(韓侑)
조모 증 정경부인 장흥임씨, 봉사 임우견(任右堅)의 따님.
부친 부사직 증 영의정 한경남(韓敬男)
모친 증 정경부인 경주김씨, 현감 김만일의 따님
청평부원군 충정공 백졸재 한응인(淸平府院君 忠靖公 百拙齋 韓應寅)
배위 정경부인 전주이씨,
동생 사헌부감찰 한응굉
장남 영천군수 한덕급(韓德及)
배위 광산김씨, 참판 김장생(金長生)의 따님, 3남3녀
손자 한수원(韓壽遠), 한지원(韓智遠), 한지원(韓志遠)
차남 한신급 요절
배위 衿川姜氏금천강씨, 참의 강찬(姜燦)의 따님
손자 한기원(韓器遠
삼남 형조판서 한인급(韓仁及)
배위 교하노씨, 부솔(副率) 노병준(盧並俊)의 따님, 판중추부사 노직(盧稷)의 손녀
손자 한진원(韓振遠), 한명원(韓命遠)
딸셋 현감 이건(李楗), 군수 안대남(安大楠), 부사 남두첨(南斗瞻)
예천-초간정草澗亭, 초간정사草澗精舍, 석조헌夕釣軒 (0) | 2018.11.06 |
---|---|
예천-병암정,별묘屛巖亭, 別廟, 예천권씨 병암정,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53호 (0) | 2018.11.06 |
안산-한응인韓應寅 청평부원군 충정공 淸平府院君 忠靖公, 백졸재사, (0) | 2018.10.29 |
안산-정경부인상주황씨, 대제학 문목공 월곡 오원(文穆公 月谷 吳瑗) (0) | 2018.10.29 |
안산-문효공 해창위 오태주(文孝公 海昌慰 吳泰周), 명안공주(明安公主),경기도기념물 제186호, 취몽헌 오태주(醉夢軒 吳泰周) (0) | 2018.10.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