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정교月淨橋
경북 경주시 교동 274
월정교(月精橋)
월정교(月精橋)에 대한 기록은 일정교(日精橋)와 같이 『삼국사기(三國史記)』에
경덕왕 19년(景德王, 760) 2월에 궁 남쪽 문천에 춘양교(春陽橋)와 같이 축조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궁궐 안에 큰 연못을 파고 또 궁궐 남쪽 문천 위에 월정교와 춘양교 두 개의 다리를 놓았다.
또 고려 명종(明宗, 1170∼1197)때 시인 김극기(金克己)가 지은 시에
'홍교도영조문천(虹橋倒影照蚊川) '이라는 구절이 보이고,
충렬왕 6년(忠烈王, 1280)에 경주부 유수 노경론(慶州副 留守 盧景論)이 중수한 기록이 있다.
따라서 월정교는 신라 경덕왕(景德王) 19년에 축조되어,
고려 충렬왕 6년(1280)까지 최소 520년 간 다리의 기능을 유지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이 신증(新增)된
중종 25년(中宗, 1530년) 이후에는 다리 기능을 상실하고 유지(遺址)로 남아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유지(遺址)는 월성 서남쪽 문천상에 남북으로 위치하며,
기록에 나타나는 남천의 여러 교량지(橋樑址) 가운데 가장 잘 남아 있다.
1984년 11월 26일부터 1986년 9월 8일까지 두 차례 복원설계를 위한 자료수집을 위한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교량 규모를 확인하고, 목교지의 존재도 처음 확인하였다.
교량은 하상(河床)에 길이 12.5∼13.4m,
너비 3.8∼4.0m되는 주형교각(舟形橋脚) 4개가 등간격으로 남북으로 놓여 있다.
양쪽 2개는 기초 지반석 위에 첫째 단까지 남아 있으나, 가운데 2개는 기초 지반석만 남아 있다. .
누교(樓橋)는 다리 위에 누각(樓閣)이나 다리 전체를 회랑(廻廊)과 같은 건물로 덮은 다리를 말하는데,
“원성왕 14년(元聖王, 798) 3월에 궁의 남쪽 누교에 화재가 있었다”고 한『삼국사기(三國史記)』기록이 있다.
목교지는 석교지 하류 20m 지점 하상에서 교각 일부를 확인하였다.
교각은 상류쪽을 선수형으로 처리하여 길이 7.7m, 너비 1.64m 크기로 기초부분만 남아 있다.
교각 중심간 거리는 4.9m로 일정하다. 교각은 양쪽 교대쪽에 2개씩,
4개는 유실되었으나 나머지 8개는 확인할 수 있어 목교에는 12개의 교각이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이 목교는 석교지 지반석 보다 깊은 위치에서 노출되었음으로
석교지 보다 이른 시기에 가설된 교량으로써 문천상에 가설된 최초의 교량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이 다리가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654∼661)시대의
원효대사(元曉大師)와 요석공주(瑤石公主)의 사랑의 전설이 깃든
유교(楡橋)(『三國遺事』卷第4 意解 第5 元曉不), 일명 문천교(蚊川橋)로 추정된다.
월정교 유적의 답사를 끝내고 하루의 피곤을 씻으러 들른 서악서원의 야경인데
어두워 카메라에 담지를 못하고 다음날도 새벽에 나오느라고 촬영할 수가 없었다.
서원에 누워 죽당선생의 일필휘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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