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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의민공김제남신도비懿愍公金悌男神道碑 ,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 김제남묘소金悌男

구름에 달

by 碧巖 2019. 11. 16. 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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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민공 연흥부원군 김제남 懿愍公 延興府院君 金悌男,

강원도 원주시 지정면 안창리 산67-3,

의민공김제남신도비懿愍公金悌男神道碑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21


懿愍公金悌男神道碑銘

의민공김제남신도비명

() 흠이 이미 교지(敎旨)를 받들어 공의 신도(神道)에 명()을 하였는데,

그후 얼마 안 되어 또 공의 수도(隧道)에 지()하기를 명하시므로,

삼가 그 가장(家狀)을 인하여 다음과 같이 편차한다.

공은 김씨(金氏)로 휘는 제남(悌男), 자는 공언(恭彦)인데, 신라(新羅)의 종성(宗姓)에서 나왔다.

그 선대는 직간(直諫)을 한 이가 있어 직간을 하다가 시염성(豉塩城)에 유배되었는데,

시염은 곧 연안부(延安府)이므로 자손들이 인하여 이곳을 관적(貫籍)으로 삼았다. 

휘 섬한(暹漢)은 고려를 섬겨 국자박사(國子博士)가 되었고,

그 후 4대에 이르러 도()는 이색(李穡)에게서 배워 문과에 급제하고

() 나라의 제과(制科)에도 급제하였으며,

자호(自號)한 나복산인(蘿葍山人)이란 네 글자를 공민왕(恭愍王)이 손수 써서 주기까지 하여 총애하였는데,

마침내 밀직제학(密直提學)으로 있다가 억울한 죄에 걸려 처형당했으므로, 사론이 그를 슬퍼하였다.

이분이 자지(自知)를 낳았는데, 자지는 개성부유후(開城府留後)를 지냈고 시호는 문정(文靖)이며,

이분이 해()를 낳았는데, 해는 내자시 윤(內資寺尹)을 지냈고 찬성(贊成)에 추증되었으며,

이분이 우신(友臣)을 낳았는데, 우신은 지중추부사를 지냈고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호간(胡簡)이다 

이분이 전()을 낳았는데, 전은 의정부 영의정을 지냈고 시호는 충정공(忠貞公)이며,

깨끗한 지조가 있었는 바, 이분이 바로 공에게 증조가 된다.

조 휘 안도(安道)는 현령을 지냈고 찬성에 추증되었으며,

고 휘 오()는 사정(司正)을 지냈고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영의정이 두 번 장가들어 두 부인이 모두 정경부인(貞敬夫人)에 봉해졌는데,

공은 두 번째 부인 권씨(權氏)의 소생이다.


가정(嘉靖) 임술년(1562, 명종17)에 공을 낳았는데,

공은 천품이 단정하였고 어릴 적부터 이미 뛰어나게 두각을 나타내어,

능히 스스로 뜻의 향할 곳을 변별하여 스승을 찾아가 배웠다.

남과 함께 거처할 적에는 온화하고 공손하고 신중하고 과묵하며,

여간한 일로 낯빛을 변치 않았고 칼로 찔러도 피부가 끄떡하지 않을 만큼 의지가 강하였으므로,

동료들의 추중을 받았다.

을유년에 진사가 된 후 10년 동안이나 문과 급제를 못하다가,

갑오년에 의금부 도사에 선수(選授)되고 이어 공조 좌랑에 승진되었다.

병신년에는 연천 현감(漣川縣監)이 되었는데,

때마침 왜적에 대해 경계할 일을 만나

명 나라의 장수와 사졸들이 줄을 이어 왕래함으로써 제군(諸郡)이 물품 징발로 인해 몹시 지쳐 있었는데,

공은 일을 처리하는 데 법도가 있어, 비록 급한 상황이었지만 공만은 여유 있게 처리하되,

공탕(公帑)에서 공급하지 못한 숫자를 사재(私財)로 보충하였다.

공은 또 검약으로 몸을 단속하고 하리들을 엄격하게 다스리니,

창고가 항상 가득 차고 호령이 막힘 없이 시행되었다.

정유년에 문과 별시에 급제하였는데, 공을 천거하여 대각(臺閣)으로 끌어들이자는 시의(時議)가 있었으나,

공이 남의 매개로 인해 진출하는 것을 싫어함으로써 공을 그 자리에 등용하지 못하였다.

이윽고 병으로 현감직을 해면하기를 청하고 돌아오려 하니, 백성들이 길을 막고 가지 못하게 만류하였다.

경자년에 체직되어 돌아오니, 이민(吏民)들이 공을 추모하여 비석을 세워서 덕을 칭송하였다.

신축년에는 사간원 정언헌납, 사헌부 지평, 이조 좌랑을 역임하였다. 


임인년에는 선조대왕이 공의 둘째 딸을 맞아 계비(繼妃)로 삼고, 공을 돈령부 도정에 초수(超授)하였다.

이 해 가을에 책례(冊禮)가 이루어지자,

품계가 보국숭록(輔國崇祿)에 올라 연흥부원군에 봉해지고 영돈령부사가 되었다.

그러자 공은 삼가고 두려워하고 겸손하여 마치 감히 감당치 못할 것처럼 하였다.

그 후 공주(公主)와 대군(大君)이 태어남에 미쳐서는 공이 더욱 존귀해졌으나 평소의 조행을 조금도 변치 않았고

외인과의 사귐을 단절하여 스스로 몸을 단속하고 입을 굳게 다물어 조정의 정사를 말하지 않았다. 

공이 사귀던 사람들은 모두 한 시대의 청류(淸流)였는데,

공이 국구(國舅)가 된 이후로는 모두 사절하여 보냄으로써 누구도 공을 알현하러 내왕하지 못했다.

오직 친족들과 화목을 돈독히 하여 간소한 주연을 베풀고 청담을 나누면서

화락하게 서로 즐기기를 마치 포의(布衣) 시절과 같이 하였다.

그리고 혹 공을 인연하여 관록(官祿)을 구하는 자가 있으면 공이 그의 인품에 따라 천거하였고,

혹 천거를 안 해준다 하여 불만스럽게 여기는 자가 있으면 공이 문득 억제하여 말하기를

예전에 귀척(貴戚)이 제멋대로 벼슬을 함으로 인하여 불초한 자제들이 제 선조에게 누를 끼친 일이 많았으니,

내가 어찌 삼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였다. 또 항상 말하기를 청백(淸白)은 우리 집안의 세업(世業)이니,

내가 비록 불초하지만 혹시라도 감히 청백을 떨어뜨릴 수 있겠는가.하였다.

그러므로 공가(公家)의 재물을 전혀 간섭한 바가 없었고,

전후로 직무를 이행하는 데 있어서는 시종 게으름 없이 한 마음으로 하였다.




공은 3세 이전에 부친을 여의고 종조모(從祖母) 강씨(姜氏)에게서 양육을 받았으므로,

공이 강씨 섬기기를 마치 모친 섬기듯이 하였고, 강씨가 별세하자 상제(喪制)를 깍듯하게 준행하였다.

모부인이 질병을 앓을 적에는 공이 울면서 음식을 먹지 않았고,

상을 당해서는 지나치게 슬퍼하다 몸이 몹시 야위어 지팡이를 짚고서야 일어설 수 있었으며,

여묘살이 3년 동안에 게으른 태도를 한 번도 볼 수 없었다.

비록 피란 중에 있을 때라도 제사지내는 일을 더욱 중히 여겨,

근심하고 불안해하며 삼가고 정성스러운 태도를 법도와 같이 하였고,

휘일(諱日)을 만날 때마다 그달 초하루부터 주육을 먹지 않았다.

그리고 이미 귀하게 되어서는

좋은 음식과 거처로 부모를 봉양할 수 없게 된 것을 몹시 슬퍼하여 항상 어린애처럼 부모를 사모하였다. 

형과 손윗누이를 섬기는 데 있어서는 한결같이 하여 간격이 없게 하였고,

분가(分家)할 적에는 형과 누이의 하는 대로만 따랐을 뿐 자신은 관여하지 않았다.

남매들끼리 항상 한 솥에 밥을 지어먹고 한 집에 거처하면서

맛있는 음식을 갈라 먹고 사소한 것도 나누어 먹었으며, 차마 혼자만 배부르게 먹지 않았다.

누이의 병이 위독했을 적에는 공이 분주하게 간호하느라 자신의 발이 갈라져 피가 흐르는 줄도 몰랐다.

공의 아들들이, 공이 밤새도록 병 간호하는 것을 보고는 자기들이 대신하기를 청하자,

공이 이르기를 나와 누이가 다 노쇠하였으니, 비록 길이 누이를 모시고자 한들 그렇게 되겠느냐.하였다.

또 한 누이가 남편과 함께 병화(兵禍)에 죽었으매 고아들을 어루만져 기르되 할 수 있는 데까지 마음을 다하였고,

여러 조카들을 시집과 장가들이는 데 있어서도 넉넉하고 모자람을 불문하고 모두 자신이 주선하여 처리하였다.

나라에서 받은 봉록은 친구들에게 두루 나누어 주었고,

친구들의 상을 만났을 경우에는 마치 미처 하지 못할 것처럼 허둥지둥 급히 달려가 돌보아주곤 하였다.

그리고 자제들에게 경계하기를 모든 사람의 교만하고 사치하는 것은 대부분 부귀로 말미암은 것이니,

높고 탁 트인 고대 광실에 거처하는 것을 마치 오막살이에 사는 것처럼 여기고,

가볍고 따뜻한 갖옷 입는 것을 마치 솜둔 베옷을 입은 것처럼 여겨서

행여 이런 것으로 남에게 교만을 부리지 말아야 한다.하였다.

공은 평소에 굵은 베로 지은 순색(純色) 옷을 입기 좋아하였고,

주색(酒色)성기(聲妓)완호(玩好)구마(狗馬)

진기하고 호사스럽고 화려하고 아름다운 것들을 마음에 둔 적이 없었으며,

수레와 의복과 저택은 그런대로 갖춘 정도일 뿐이었다.

그리고 조그마한 당() 하나를 집 뒤에 짓고 혼자 그 안에 거처하면서

도서(圖書)와 화죽(花竹)을 보며 담박하게 지냈다.

만력(萬曆) 정미년(1607, 선조40)에 선조대왕의 병환이 위독해지자,

간신(奸臣) 이이첨(李爾瞻)이 정인홍(鄭仁弘)을 사주하여 소장을 올려 조정에 불화의 단서를 만들었는데,

무신년에 선조대왕이 승하하고 광해군이 즉위하여서는

이이첨의 간악한 꾀를 써서 큰 옥사를 일으켜 동기간들을 죽였다.

계축년에 이르러서는 마침내 영창대군(永昌大君)까지 핍박하여 죽이고,

공은 하옥된 지 1개월을 넘어서 사사(賜死)되었으며,

모후(母后 인목대비(仁穆大妃))는 감금한 채로 폐출(廢黜)하자는 의논이 결정되었다.

병진년에는 공의 무덤을 파헤쳐 저자에서 부관참시(剖棺斬屍)하였고,

공의 부인은 탐라(耽羅)에 구류하여 8년 동안 위리안치(圍籬安置)시켰다.

, 공이 화를 당한 때가 이해 61일이었는데, 나이는 52세였다.

공의 부인 노씨(盧氏)는 광주(光州)의 대성(大姓)으로 아무개[]의 딸인데,

순수한 덕과 유순한 의용이 있었다.

32녀를 길렀다. 장남 내()는 청주 목사(淸州牧使)이고, 차남 규()는 진사였는데,

계축년에 모두 옥중에서 죽었다. 장녀는 현감 심정세(沈挺世)에게 시집갔는데 먼저 죽었고,

그 다음이 바로 우리 왕대비로서 정명공주(貞明公主)와 영창대군을 길렀다.

목사는 군수 정묵(鄭黙)의 딸에게 장가들어 23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주륙(周六)주칠(周七)이고, 장녀는 김광찬(金光燦)에게, 차녀는 최여량(崔汝良)에게 시집갔으며,

그 다음은 아직 시집가지 않았다. 진사는 달성위(達城尉) 서경주(徐景霌)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을 낳았다.

현감은 11녀를 낳았는데, 남은 진()이고, 여는 백홍일(白弘一)에게 시집갔다.

내외 증손 남녀가 몇 명 있는데, 모두 어리다.

집안 사람들이 처음에 공을 아무 고을 아무 언덕에 장사지냈다가

이때에 이르러 아무 고을 아무 언덕에 옮겨 안장하였다.

        삼가 생각하건대 우리 주상전하께서 어지러움을 평정하여 바른 세상으로 회복시킨 다음

가장 먼저 모후(母后)를 복위시키고 원흉을 죽여 없앴으며,

억울하게 죄 입은 사람들을 신설시키고 공의 관작을 복구하였으며,

예에 따라 공을 개장(改葬)시키고 공의 부인을 탐라에서 맞아와 광산부부인(光山府夫人)으로 봉하였다.

비색한 운수가 극에 달하면 다시 형통한 운수가 오고 박()이 다하면 복()이 오는 법이기에,

천지의 귀신이 묵묵히 도와주고 조종(祖宗)의 영혼이 은연중에 돌아보아줌으로써

하늘의 떳떳한 이치가 수립되고 사람의 윤기가 이어지게 되었으니, 이 또한 천도가 변하지 않는 증험이리라.


다음과 같이 명한다.

子諒之性 자양지성    인자하고 성실한 성품이며

仁厚之質 인후지질    어질고 후한 자질로

去畦與畛 거휴여진    피아의 거리를 두지 않았고

宅乎誠一 택호성일    성실과 순일함에 심신을 붙였네

得福爲恒 득복위항    복을 얻는 것이 당연하거늘

而福之媒 이복지매    그것이 도리어 재앙의 매개가 되었으니

天固有定 천고유정    천리는 본시 정해짐이 있고

世運環回 세운환회    세상 운수는 순환하는 것이매 

聖人有作 성인유작    성스러운 임금이 나시어

綱常復강상복속    강상을 다시 이으실세

官復葬禮 관복장례    다시 벼슬을 내리시어 예로 장례모시니

睿眷斯篤 예권사독    성상의 돌보심이 이에 두터우셨네

行應名法 행응명법    행실이 시법에 응하리니

惟上有命 유상유명    이는 오직 성상께서 명하시리라

誌之於幽 지지어유    우선 이렇게 광중에 기록하여

詔此來姓 조차래성    후손들에게 고하노라

天啓五年乙丑九月日立石

1625(인조 3) 9월 일 에 세우다


贈領議政諡愍金公神道碑銘

증영의정시의민김공신도비명(전액)

有明朝鮮國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行

유명조선국증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영의정겸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행

輔國崇祿大夫領敦寧府事延興府院君 贈諡懿愍公神道碑銘幷序

보국숭록대부영돈령부사연흥부원군 증시의민공신도비명병서

崇祿大夫行吏曹判書兼知經筵春秋館成均館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臣申欽奉敎撰

숭록대부행이조판서겸지경연춘추관성균관사홍문관대제학예문관대제학신신흠봉교찬

                    (樂全堂申翊聖 낙전당신익성그의 부친 象村申欽상촌신흠 )

崇祿大夫行戶曹判書臣沈悅奉敎書

숭록대부행호조판서신심열봉교서

崇政大夫行知敦寧府事臣金尙容奉敎篆

숭정대부행지돈녕부사신김상용봉교전

臣欽旣奉敎銘公神道矣未幾又命欽誌公幽隧臣欽謹因其家狀而次之曰公金氏諱悌男字恭彥

出自新羅宗姓其先有直諫者謫豉鹽城豉鹽卽延安府也子孫仍籍焉有諱暹漢事高麗爲國子博士

四代而濤學於李穡擢文科登元朝制科自號蘿葍山人恭愍王手書以寵之竟以密直提學坐非辜伏法

士倫哀之是生自知開城府留後諡文靖是生侅內資寺尹贈贊成是生友臣知中樞府事贈領議政

諡胡簡是生詮議政府領議政諡忠貞公有淸操於公爲曾祖祖諱安道官縣令贈贊成考諱祦司正

贈領議政議政娶再室俱封貞敬夫人公後夫人權氏出也嘉靖壬戌生公公稟質端方自稚歲已嶄然見頭角

能辨志就學與人處溫恭愼默不失色不膚撓爲儕流所重乙酉進士滯於公卓者十載甲午

選授義禁府都事陞工曹佐郞丙申出監漣川時當倭警天朝將士絡屬諸郡疲於徵發公乃處之有方

雖在倉卒獨能靜暇公帑所不給者取私藏以補之約以持己嚴以馭吏稟庾充實號令不閡丁酉

捷文科別試時議有欲尉薦援置臺閣者公不喜媒進不果用俄以病丐解民遮道留之庚子遞歸吏民追思

豎石頌德辛丑司諫院正言獻納司憲府持平吏曹佐郞壬寅宣祖大王聘公第二女爲繼妃

超授公敦寧府都正冊禮成進階輔國崇祿封延興府院君領敦寧府事公兢兢退遜如不敢當及公主大君生

公益尊貴而素履不少渝絶外交目守杜口不言朝政公之所與交皆一時淸流而自爲國舅皆謝遣

未嘗造請來往唯與親族修睦淸談少酌衎衎相樂如布衣時其有夤緣干祿者公隨其人品薦之或有不滿

公輒抑之曰前世貴戚妄官不肖子弟累其先祖者多矣吾何可不愼又恒言淸白吾家世業吾雖不肖

敢或闕墜故公家羨餘一無所問前後莅職一心不懈公孤未三歲養于從祖母姜氏公事之如事母姜氏歿

克遵喪制母夫人疾病公涕泣不食遭喪致毀杖而後起廬墓三年未見有惰容雖在避兵中尤重祀事

悒怏虔愨如度每遇諱日自月朔不御酒肉旣貴痛鼎茵不逮常爲孺子慕焉事兄事姊一而無間其析著也

聽兄姊之爲己無與焉同爨而食同室而居折甘分少不忍獨飽姊病公奔救不覺折趾流血公之諸子

見公終夜侍疾請身代之公曰吾與姊俱衰矣雖欲長侍姊得乎復有姊與夫歿於兵禍撫養其孤無不至

諸姪嫁娶無問饒乏悉經紀之所捧秩祿遍分親故如値死喪匍匐如不及者誡諸子曰凡人驕侈

鮮不由富貴居高明如茅茨被輕暖如縕袍愼無以是驕人平生好服大布純色衣酒色聲伎玩好狗馬奇奢華美無所留心車服垣屋苟完而已搆一小堂於宅後獨處其中圖書花竹淡如也萬曆丁未宣祖大王疾革

有孼臣李爾瞻者嗾鄭仁弘上章搆釁朝廷戊申宣廟棄群臣光海嗣位用爾瞻奸計起大獄戮同氣至癸丑

遂及永昌大君逼殺之公下獄逾月論死幽母后定廢黜之議丙辰發公藏肆諸市錮公夫人于耽羅

栫之以棘者八年嗚呼公之遇禍是年六月一日也年五十二公夫人盧氏光州大姓某之女有純德婉儀

育三男二女男長曰琜淸州牧使次曰珪進士癸丑俱歿於獄中女長適沈挺世先歿次卽我王大妃

育貞明公主永昌大君牧使娶郡守鄭默女生二男三女男曰周六周七女長適金光燦次適崔汝良次未行

進士娶達城尉徐景霌女生一男縣監生一男一女男曰榗女適白弘一內外曾孫男女若干人幷幼

家人初葬公於某邑某原至是遷厝於某邑某原恭惟我主上殿下撥亂反正首復母后之位誅除巨慝伸雪冤枉復公舊秩改窆公以禮迎公夫人于耽羅封光山府夫人否極則泰剝盡而復神祗默祐祖宗陰騭天彝立矣

人紀續矣其亦天道之不忒也夫銘曰

 

子諒之性二厚之質去畦與畛宅乎誠一得福爲恒而禍之媒天固有定世運環回

聖人有作綱常復續官復葬禮睿眷斯篤行應名法惟上有命誌之於幽詔此來姓






懿愍祠門의민사문

懿愍祠의민사


김제남(金悌男,1562~1613)은 조선 중기의 문신

는 공언(恭彦), 본관은 연안(延安)이며 선조의 장인으로, 선조의 계비인 인목대비는 그의 둘째딸이다.

1585(선조 18) 사마시에 합격하여 관직에 올랐으며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연천현감을 거쳐

1601년 사간원 정언과 헌납, 사헌부 지평 등을 지냈다.

1602년 둘째 딸이 선조의 계비인 인목왕후로 간택되자

돈녕부도정을 거쳐 보국숭록대부 영돈녕부사와 ,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에 봉군되었다.

이후 정승과 판서의 후보 명단에 수차례 올랐으나 사양을 했다.

1613년 인목왕후의 아들인 영창대군을 왕으로 추대하려 했다는 혐의로 세 아들과 함께 사약을 받고 졸 하였다.

1616년 인목대비가 폐모되면서 부관참시를 당하였으며,

1623년 인조 반정으로 복권되고 뒤에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되었다 諡號는 의민공(懿愍公)이다.

영의정을 지낸 충정공 김전金詮의 증손자이고

조부는 증 좌찬성 김안도金安道이며, 좌의정을 지낸 희락당 김안로(希樂堂 金安老)는 종조부가 된다.

아버지는 부사정(副司正)을 지내고 사후 영의정에 추증된 김오(金祦)이며,

어머니는 안동 권씨로 권상(權常)의 딸이다. 종조부는 중종 때 좌의정을 지낸 희락당 김안로이고,

증조부는 영의정을 지낸 김전이다. 또한 김전의 아들로 윤원형의 장인인 김안수 또한 그의 종조부였다.




그는 3세 무렵에 아버지를 여의고  종조모할머니 강씨(姜氏)에게 양육되었다.

1585(선조 18) 식년과 사마시를 거쳐

1594년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공조좌랑을 거쳐

1596년 연천현감(漣川縣監)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 때는 의병을 모집하여 왜군과 맞서 싸웠으며, 평양성 탈환에 기여하기도 했다.

그 뒤 이조정랑(吏曹正郞)을 거쳐

1597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다시 연천현감이 되었다가 병으로 사직을 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600년에야 연천현감직을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갔다.

1601년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 헌납, 사헌부 지평을 거쳐 이조좌랑(吏曹佐郞)이 되었다.

1597(선조 31) 이조좌랑으로 있을 때,

그의 둘째딸이 선조의 계비로 간택되면서 특별 승진하여 돈녕부도정에 제수되었다.

얼마 뒤 자헌대부 지중추부사로 승진했다가 그 해 가을에 책례(冊禮)가 이루어지자

품계가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에 올라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에 봉해지고 영돈녕부사가 되었다.

이후 많은 벼슬 및 좌우찬성과 정승의 후보에 여러번 오르기도 했으나 사양을 했다.


의민공김제남 懿愍公金悌男 묘역의 수리부엉이

날짐승은 명당을 안식 및 휴식처로 삼는다는데....(천연기념물 제324-2호)

1608년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 후,

1613년 광해군의 이복동생이며 김제남의 딸인 인목대비의 아들인 외손자 영창대군을

왕위에 올리려 한다는 이이첨 등의 모함으로 서소문(西小門) 밖 자택에서 아들 셋과 사약을 받고 죽었다.

부인과 며느리 정씨, 어린 손자 김천석(天錫) 등만이 화를 면하여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1618년 폐모론이 대두되어 딸 인목왕후가 폐비되자

김제남은 다시 이이첨 등의 주도로 부관 참시되었으며 부인 노씨에게는 위리안치형이 내려지기도 했다.

1623년 인조 반정 직후 관작이 복구되었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유배되었던 부인 광주노씨와

제주도에 유배되었던 며느리 초계정씨(鄭氏)와 손자 김천석(金天錫) 등은 극적으로 생존, 한성으로 돌아왔다.

 

묘소는 경기도 양주군 서산에 안장되었다가

강원도 원주군 지정면 안창리(현 강원도 원주시 지정면 안창리 산67-1 능촌마을)로 이장되었다.

인조는 특명을 내려 묘소 입구 좌측에 김제남의 사당 의민사와 그의 신도비를 세우도록 하였다.

사당은 그 후 두 차례 소실되었고, 현재의 사우는 1964년에 다시 재건하였다.

그의 신도비는 인조 때인 1624년에 세워졌으며, 글은 신흠이 지었다.

현재 원주시 지정면 안창리 산 67-3 흥법사지 근처에 있으며,

신도비는 후일 198462일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21호로 지정되었다.


贈議政府領議政諡懿愍公行  輔國崇祿大夫領敦寧府事延興府院君金公悌男之墓  善山府夫人盧氏祔左

증의정부영의정시의민공행  보국숭록대부영돈녕부사연흥부원군김공제남지묘  선산부부인노씨부좌








///의민공김제남懿愍公金悌男가계도///

증조부 김전金詮 영의정 충정공

   조부 김안도金安道 현령縣令 증 좌찬성, 조모 昌寧成氏

      부 김오金祦, 부사정(副司正), 증 영의정

      모 안동권씨, 권상(權常)의 딸

          의민공김제남懿愍公金悌男 인목대비 오빠

          광산부부인光州盧氏, 노계盧洎의 딸

            장남 김래金琜 청주목사 淸州牧使, 숙부인 초계정씨

                    손자 김천석金天錫 광흥창수 廣興倉守

                             증손자 김지金氵智, 김규金湀

                    손자 김군석金君錫,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연안김씨 기해보 편수

             차남 김규金珪 진사

                    손자 김홍석金弘錫)

             삼남 김선金瑄

                    손자 김군석金君錫,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 生父 김내金琜,  延安金氏世譜 삼권편료

                            증손자 김홍金泓 정랑공

                                  현손 김상훈金相勛  號 堯天夫요천부, 靖惠公 資憲大夫, 延安金氏世譜 己亥譜

                               5대손 김관金爟 嘉善大夫 同知敦寧府事가선대부 동지돈녕부사

                                  현손 김상이金相履

 

 


  벽암 두릉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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