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숙공 쌍백당 이세화((忠肅公 雙栢堂 李世華)
경기도기념물 제60호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선유리 산89-4
仙遊池선유지
쌍백당 이세화 신도비(雙栢堂 李世華 神道碑)
문충공 약천 남구만(文忠公 藥泉 南九萬)이 짓고,
문효공 취몽헌 오태주(文孝公 醉夢軒 吳泰周)가 글씨를 썼으며,
문정공 존와 최석정(文貞公 存窩 崔錫鼎)이 전액(篆額)을 썼다.
충숙공 쌍백당 이세화((忠肅公 雙栢堂 李世華)
1630년(인조8)~1701년(숙종27)
본관은 부평(富平). 字는 군실(君實), 號는 쌍백당(雙栢堂), 칠정(七井).
병조정랑 이계록(李繼祿)의 증손으로, 아버지는 통덕랑 이이재(李以載)이다.
큰아버지 장릉참봉 이희재(李熙載)의 양자로 들어갔다.
1652년(효종3)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고,
1657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 뒤 정언·장령 등을 거쳐
1672년에 광주부윤이 되면서 당상관이 되었으며 이후 경상도관찰사와 전라도순무사를 하다가 숙종 즉위 후
1675년에 동부승지가 된다. 이후 우승지로 승진했다가 황해도,평안도,전라도 관찰사를 거쳐서,
1689년(숙종15) 경상도관찰사를 지내고 서호(西湖)의 향리로 돌아갔다.
1689년 5월 인현왕후 민씨(仁顯王后 閔氏)가 폐위되자 이 소식을 듣고 반대소를 올렸다.
반대소에 판서 양곡 오두인(陽谷 吳斗寅)과 이세화(李世華)의 이름이 전면에 올라 있는지라,
숙종은 분노하여 밤중에 친국하였다.
이세화(李世華)는 국문에서
“국사로 인해 죽기를 원했는데 이제 그 소원을 이룰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만, 신의 죽음이 성덕에 누를 끼칠까 두려우며,
신에게 용서할 수 없는 죄가 있다 하더라도 옥리에게 맡겨 다스리게 하면 될 것을
밤새도록 친국하니 옥체를 상할까 두렵다.”고 형간(刑諫)하였다.
다음 날 정주로 유배가다 풀려나와 파산(坡山)의 선영 아래로 돌아왔다.
갑술환국 후 1694년 4월 대사간·호조판서에 제수되었으나 고사하고 나아가지 않다가
인현왕후 복위도감제조로 차정한다는 말을 듣고 곧 상경하였다.
그 뒤 의금부사 겸 지경연사·세자빈객에 오르고, 청백리로 선정되었다.
그 뒤 공조, 형조, 병조, 예조, 이조판서를 역임하고, 지중추부사에 이르렀으며,
풍계(豊溪)의 충렬사(忠烈祠)에 향사되었다.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저서로는 『쌍백당집(雙栢堂集)』이 있다.
有明朝鮮國忠臣 行吏曹判書贈領議政 忠肅李公世華之墓 贈貞敬夫人淳昌薛氏祔左
유명조선국충신 행이조판서증영의정 충숙이공세화지묘 증정경부인순창설씨부좌
//부평이씨 충숙공 쌍백당 이세화(忠肅公 雙栢堂 李世華) 가계//
증조부 이계록(李繼祿) 병조정랑 증 이조참판
할아버지 이덕순(李德純) 직산현감 증 이조판서
아버지 이희재(李熙載) 장릉참봉 증 좌찬성
어머니 정경부인 여흥민씨, 동지중추부사 민복룡(閔伏龍)의 따님
충숙공 쌍백당 이세화(忠肅公 雙栢堂 李世華)
배위 정경부인 순창설씨(淳昌薛氏), 옥천부원군 설계조(薛繼祖)의 7대손인 설시망(薛時望)의 따님
생부 통덕랑 이이재(李以載), 배위 부안김씨, 종성부사 김치원(金致遠)의 따님
자 이정진(李廷晉) 도사
손자 이형원(李亨元)
자 이정현(李廷賢), 이정량(李廷良), 이정선(李廷善), 이정수(李廷壽)
친동생 이세유(李世維) 집의
조카 효정공 죽호 이정제(孝貞公 竹湖 李廷濟) 형조 호조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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