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위사 선각대사탑비(先覺大師塔碑), 보물 제507호
강진 무위사(無爲寺)
전라남도 강진군 성전면 월하리 1174
강진 무위사(無爲寺)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 본사인 해남 대흥사(大興寺)의 말사이다.
신라 때 원효(元曉)대사가 창건하여 관음사(觀音寺)라 하였고,
875년(헌강왕1) 도선(道詵)국사가 중건하여 갈옥사(葛屋寺)라고 개칭하였으며,
905년(효공왕9) 선각(禪覺)대사가 3창하였다.
1407년(태종7)무위사가 천태종(天台宗)의 17개의 자복사(資福寺) 중의 하나가 되었다.
1430년(세종12) 극락전을 지었는데, 이 건물은 현재도 남아 있다.
1555년(명종 10) 태감(太甘)이 4창하면서 무위사라 하여,
본절이 23동, 암자가 35개로 모두 58동에 이르는 대찰이었으나, 그 뒤 화재 등으로 규모가 크게 축소되었다.
1678년(숙종4)에 극락전 앞에 괘불대를 조성하였고,
1739년(영조 15)에는 해초(海超)·극잠(克岑) 등이 전각을 보수하였다.
1975년 벽화보존각(壁畵保存閣)과 해탈문(解脫門)·봉향각(奉香閣)·천불전(千佛殿)·미륵전(彌勒殿) 등을 중건하였으며,
1991년에 산신각을 짓고 1995년에 동쪽 요사를 증축하여 오늘에 이른다.
극락보전은 국보 제13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벽에는 29점의 벽화가 있었으나
지금은 본존불 뒤의 가로 4m, 세로 7m 크기의 후불탱화만이 남아 있고, 28점은 보존각에 보관되어 있다.
본존불 뒤 벽화들은
법당이 완성된 뒤 찾아온 한 노거사(老居士)가 49일 동안 이 안을 들여다보지 말라고 당부한 뒤 그렸다는 전설이 있다.
49일째 되는 날, 주지가 문에 구멍을 뚫고 들여다보니
파랑새 한 마리가 입에 붓을 물고 마지막으로 후불탱화의 관음보살 눈동자를 그리고 있었는데,
파랑새는 인기척을 느끼고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고 하며, 지금도 후불탱화의 관음보살상에는 눈동자가 없다.
이 밖에도 선각대사변광탑비(先覺大師遍光塔碑)는 보물 제507호로 지정되어 있고,
옆에는 석탑형식의 부도인 선각대사변광영탑(先覺大師遍光靈塔)이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76호로 지정되어 있다.
또한 미륵전 안에는 고려 말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석불입상이 있다.
무위사 사적을 보면 875년(헌강왕1) 도선국사(道詵國師)가 갈옥사(葛屋寺)로 창건한 것이 첫 번째 중창이다.
905년(효공왕9) 이후 선종인 가지산문(迦智山門) 계통의
선각국사(先覺國師) 형미(逈微, 864∼917)가 고려 태조 왕건의 요청으로
무위갑사(無爲岬寺)에 머무르면서 절을 중수하고 널리 교화를 펴 대중적 지지를 받았다고 한다.
따라서 무위사는 형미 스님이 주석했던 10세기 초 이전에 무위갑사라는 절로 창건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무위사 사적에 의하면
고려 시대인 946년(정종1)에 형미가 제3창을 하면서 모옥사(茅屋寺)로 절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선각국사(先覺國師) 형미(逈微, 864∼917) 스님은 속성이 최씨로 부친은 최낙권(崔樂權)이라고 한다.
무위사의 국보와 보물
국보 제13호 극락보전(極樂寶殿)
국보 제313호 극락보전 아미타여래삼존벽화(阿彌陀如來三尊壁畵)
보물 제507호인 선각대사탑비(先覺大師塔碑)
보물 제1312호. 극락전 목조아미타삼존불좌상
【왕건(王建,877~943)과 형미(逈微,864∼917)의 의리가 깃든 강진 월출산 무위사(月出山 無爲寺)】
전남 강진군 성전면 무위사로 308(월하리 1174)
철원에 도읍을 둔 태봉국 궁예(弓裔, ?~918)는
왕건(王建,877~943)을 해군 대장군으로 삼아 후백제 후미인 나주 공략을 단행한다.
당시 나주 영산강 전투에서 왕건은 견훤(甄萱,867~936)에게 대승을 거둔다.
이 무렵 왕건(王建)은 무위사에 거처하고 있던 형미(逈微, 864~917) 스님을 무위사(無爲寺)에서 만나게 되며,
대승을 거두고 나주를 궁예에게 복속시킨 왕건은 형미 스님과 함께 철원으로 가게 된다.
큰 공을 세운 왕건이지만 내원 종간의 끊임없는 견제와 질시 속에 궁예로부터 의심을 사게 되고
관심법에 의해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게 된다.
이때 형미 스님은 왕건을 두둔하게 되었는데 궁예(弓裔)는 이런 형미 스님을 처형한다.
신라 경명왕 1년(917) 세수 54세였다. 이유는 누군가의 편을 든다는 것이다. 그 누군가는 왕건을 지칭하는 것일 것이다.
어찌되었던 형미 스님의 역할로 왕건은 위기를 넘긴다.
이후 고려를 개국한 왕건(王建)은
선각국사(先覺國師) 형미(逈微, 864∼917) 스님이 거처하였던
이곳 무위사(無爲寺)에 선각대사비(先覺大師碑))를 건립하기로 하고
선각(先覺)이라는 시호와 편광영탑이라는 탑명을 내렸던 것이다.
[국보 제13호 극락보전(極樂寶殿)]
극락보전(極樂寶殿)은 무위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1430년(세종 12년)에 지어졌으며, 앞면 3칸·옆면 3칸 총 9칸의 규모이다.
전각 안에는 가운데 아미타불상이 있고, 좌측에 지장보살, 우측에 관세음보살이 협시하고 있다.
이 아미타여래삼존좌상이 보물 제1312호이다.
무위사 선각대사탑비(無爲寺先覺大師塔碑)는 『금석집첩(金石集帖)』에 실려있다.
제액은 없고,
비제(碑題)는 高麗國 故無爲岬寺 先覺大師 遍光靈塔碑銘 幷序
고려국 고무위갑사 선각대사 편광영탑비명 병서로
최언위(崔彦撝)가 글을 짓고 유훈율(柳勳律)이 해서로 썼다.
보물 제507호인 선각대사탑비는
신라 말 당나라에 건너갔다가 14년 만에 돌아와 왕건의 요청으로 무위사(無爲寺)에서 8년간 머물렀던
선각대사 형미(逈微)의 탑비로 대사가 입적한 지 28년만인 고려 정종 1년(946)에 건립되었다.
최언위[崔彦撝, 경문왕 8년(868)~고려 혜종 원년(944)],
초명은 신지(愼之), 시호는 문영(文英), 본관은 경주(慶州),
고운 최치원(崔致遠)의 사촌동생으로 서예와 문장이 뛰어나 최치원, 최승우(崔承祐)와 함께 신라 삼최로 불렸다.
885년(헌강왕 11년) 당나라에 유학하여 문과에 급제한 후
909년(효공왕 13년) 귀국하여 집사성 시랑을 지내고 고려에 귀부하여 평장사에 올랐다.
최언위는 경순왕이 고려에 귀부할 때 함께 귀부하였고
경순왕의 넷째 아들 김은열(金殷說)과 최언위 (崔彦撝)의 따님이 혼인하여
안동김씨 시조 김숙승(金叔承) 등을 낳았다.
‘무위사선각대사편광탑비’를 썼는데 당시 그의 관작은
檢校尙書左僕射 兼 御史大夫 上柱國 知元鳳省事
검교상서좌복야 겸 어사대부 상주국 지원봉성사였다. 이 시대 대부분의 비문은 최언위의 글이라고 한다.
무위사 삼층석탑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7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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