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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문충공 서애 류성룡(文忠公 西涯 柳成龍), 서애집(西厓集), 징비록(懲毖錄), 서애 유성룡(西涯 柳成龍)

구름에 달

by 碧巖 2022. 11. 24. 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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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충공 서애 유성룡(文忠公 西涯 柳成龍)

경북 안동시 풍산읍 수리 산 23

문충공 서애 유성룡(文忠公 西涯 柳成龍, 1542중종37~1607선조40)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이견(而見), 호는 서애(西厓운암(雲巖).

할아버지는 군수 유공작(柳公綽)이고,

아버지는 승지 유중영(柳仲郢)이며, 어머니는 안동김씨로 진사 김광수(金光粹)의 따님이다.

학봉 김성일(鶴峰 金誠一)과 함께 퇴계 이황(退溪 李滉)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1564(명종 19) 생원·진사에 올랐고,

1566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권지부정자, 검열 겸 춘추관기사관, 대교, 전적을 거쳐

1569(선조 2) 공조좌랑으로 있으면서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귀국했다.

1570년 부수찬·수찬을 거쳐 정언·이조좌랑에 오르고, 1571년 병조좌랑,

1575년 부교리·이조정랑·헌납, 1577년 검상·사인·응교, 1579년 직제학·이조참의·동부승지 등을 두루 지냈다.

1581년 부제학으로 있으면서 무빙차십조(無氷箚十條)를 올리고  대학연의(大學衍義)를 초진(抄進)했다.

이듬해 대사간·우부승지·도승지·대사헌 등을 지내고, 1583년 왕명으로 비변오책 (備邊五策)을 지었다.

이어 함경도관찰사·대사성 등에 임명되었으나 어머니의 병을 이유로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158443세에 예조판서에 올랐으며,

1585년 포은연보(圃隱年譜)를 교정하고, 1586년에는 퇴계선생문집을 편차(編次)하였다.

그뒤 형조판서·대제학·병조판서 등을 거쳐

159049세에 우의정에 오르고

종계변무(宗系辨誣)의 공으로 광국공신(光國功臣) 3등으로 책록되고 풍원부원군(豊原府院君)에 봉해졌다.

1591년 우의정으로 있으면서 왜구의 침입에 대비,

권율(權慄)과 이순신(李舜臣)을 의주목사와 전라좌수사에 추천하였다.

광해군의 세자책봉을 건의한 송강 정철(松江 鄭澈)의 처벌이 논의될 때

온건파인 남인에 속하여 강경파인 북인의 아계 이산해(鵝溪 李山海)와 대립했다.

1592 51세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병조판서로서 군무(軍務)를 총괄하는 도체찰사(都體察使)의 직책을 맡았다.

이어 영의정에 임명되어 왕의 피난길에 따라갔으나,

평양에 이르러 나라를 그르쳤다는 반대파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곧 다시 등용되어 왕명으로 명의 장수 임세록(林世祿)을 접대하고,

의주에서는 2차례 계()를 올려 군사모집, 화포제조, 난민들의 초무(招撫), 즉 위로하여 줄 것 등을 건의했다.

평안도도체찰사에 부임하여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과 함께 평양성을 되찾고,

이듬해 호서·호남·영남의 3도도체찰사에 올랐다.

이여송(李如松)이 벽제관(碧蹄館)에서 대패한 뒤 일본군과 화의를 모색하자 이에 반대,

화기제조·성곽수축 등 군비확충과 군사양성을 주장했다.

환도한 뒤에는 훈련도감의 설치를 건의하고 다시 영의정에 올랐다.

1594년 청훈련군병계(請訓練軍兵啓), 청광취인재계(請廣取人才啓), 전수기의십조(戰守機宜十條) 등을 올려

전시대책과 시무책을 건의하고, 훈련도감의 제조(提調)가 되어 기효신서(紀效新書)를 강해했다.

그 뒤에도 4도도체찰사가 되어 경기도·황해도·평안도·함경도의 군병을 교련하는 등

명과 일본 사이에 강화 교섭이 계속되는 가운데에서도 군비보완에 힘썼다.

1597년 이순신이 탄핵을 받아 백의종군할 때 이순신을 천거했다 하여 여러 차례 벼슬에서 물러났으며,

이듬해에는 조선과 일본이 연합하여 명을 공격하려 한다는

명나라 경략(經略) 정응태(丁應泰)의 무고에 대해 명나라에 가서 해명하지 않는다 하여

북인들의 탄핵을 받고 관작을 삭탈당했다.

1600년 관작이 회복되었으나 다시 벼슬을 하지 않고 저술활동을 하면서 은거했다.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이 되고 다시 풍원부원군에 봉해졌다.

안동 병산서원(병산서원)등에 배향되었다.

저서 서애집(西厓集), 징비록(懲毖錄)은 임진왜란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領議政文忠公西厓柳先生之墓 貞敬夫人李氏祔

영의정문충공서애류선생지묘 정경부인이씨부

西厓 柳成龍先生 墓前碑文

府君 姓 柳氏 諱 成龍 字 而見 豊山人 遠祖 諱 伯 高麗 忠烈王朝恩賜 及第 六世祖 諱 從惠入我朝工曹典書 高祖諱沼護軍 贈司僕寺正 曾祖諱子溫進士 贈吏曹判書 祖諱公綽 杆城郡守 贈議政府贊成 考諱仲郢 黃海道觀察使 贈純忠積德補祚功臣 議政府領議政 豊山府院君 妣 貞敬夫人 安東金氏 進士光粹之女 府君生又嘉靖壬寅 歿以 萬歷 丁未 享年 六十六 府君早遊退陶李先生之門得師門傳授旨訣後學宗師之稱爲西厓先生 歲甲寅俎豆于 屛山書院 後 配享 廬江 李先生廟 府君受知 宣廟朝 啓沃弘多 遭値壬辰倭亂 鞠躬盡瘁 成中興之業 有大勳勞于王室 讒人構之 退而閒居者 又十年累召不起 崇禎己巳 賜諡 文忠公 諡法 道德博聞曰文 危身奉上曰忠 夫人李氏 累封 貞敬夫人 龍宮縣監 諱垌之女 宗室廣平大君 諱璵之後與府君同壬寅生 萬歷己丑 先府君歿 合葬于安東府 西先 壽洞 癸坐丁向之原 府君有二女 別坐 贈承旨 李文英 正郎 贈參判 趙稷 其壻而四男 長 褘 早卒 次 袽 察訪 贈掌令 次 褍 洗馬 贈掌令 次 袗 持平 贈吏曹參判 側室 男 初 生員 襜 學生 女 邊應篁 別坐二男 昌祚 縣監 弘祚 縣監 正郞 三男 壽益 大司憲 壽栢 師傳 壽頥 六女 李聖益 安鎭 朴萬榮 尹禎 鄭錫輔 鄭壽光 察訪 一男 元之 縣監 三男 長 宜河 縣監 次 重河 萬河 二女 權憕 李在建 洗馬 一女 朴璿 持平 八女 金時敏 申嵩耉 琴處謙 李尙逸 金宗準 鄭道應 郭文溶 李在寬 二男 千之 翊衛 次 百之 出爲洗馬後 生員 四男 翼之 延之 擇之 熙之 學生 二男 習之 徽之 府君 臨終遺戒 勿用禮葬 勿請人爲碑 墓道闕顯刻 今六十年 大懼逐至遷就無以日示 後世 略其世系子孫如左云

孫通訓大夫行鎭安縣監 元之謹識

崇禎紀元後 一百三十七年 甲申 五月 日

六代孫 通訓大夫前行義禁府都事 澐 建

外六代孫 通訓大夫前行兵曹佐郎 韓山李象靖 書

서애류성룡 선생 묘전비문

부군(府君)의 성(姓)은 류씨(柳氏)요 휘(諱)는 성룡(成龍),자(字)는 이현(而見)으로 본관은 풍산(豊山)이다. 원조(遠祖) 류백(柳伯)은 고려 충렬왕 때 은사 급제하였고 6세조 류종혜(柳從惠)는 우리 조선조에 들어와 공조전서(工曹典書)가 되었다. 고조(高祖)는 류소(柳沼)인데 호군(護軍)으로 사복시정(司僕寺正)에 증직되었고, 증조(曾祖)는 류자온(柳子溫)인데 진사(進士)로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증직되었다. 할아버지는 류공작(柳公綽)인데 간성군수(杆城郡守)로 의정부찬성(議政府贊成)에 증직되었으며, 아버지는 류중영(柳仲郢)인데 황해도관찰사로서 순충적덕보조공신(純忠積德補祚功臣) 의정부영의정(議政府領議政) 풍산부원군(豊山府院君)에 증직되었다. 어머니는 정경부인 안동김씨(安東金氏)로 진사(進士) 김광수(金光粹)의 따님이다.

 

부군(府君)은 가정(嘉靖) 임인년(중종 37, 1542년)에 나서 만력(萬歷) 정미년(선조 40, 1607년)에 돌아가셨으니 향년 66세이다. 부군은 일찍부터 퇴도(退陶:퇴계 이황) 이선생의 문하에 나아가 스승의 문하에서 전수하는 지결(旨訣)을 이어받아 후학들의 종사(宗師)가 되었는데, 서애선생(西厓先生)이라 불렀다. 갑인년에 병산서원(屛山書院)에 모셨고 뒤에 여강서원(廬江書院)의 퇴계 선생을 모신 곳에 배향했다. 부군(府君)은 선묘조(宣廟朝:선조조)에 계옥(啓沃:흉금을 털어놓고 성의껏 인도함)한 것이 참으로 많았는데 임진왜란을 만나서는 자신의 몸을 바쳐 마침내는 중흥의 업적을 이루어 크게 왕실에 공훈을 세웠다. 그러나 아첨하는 사람들이 거짓을 꾸미자 물러나 한가롭게 거처한 것이 또 10년이나 되었다. 누차 조정에서 불렀어도 나아가지 않았다. 숭정(崇楨) 기사년(인조 7, 1629년)에 문충공(文忠公)이란 시호를 받았는데 시법(諡法)에 ‘도덕으로 널리 이름이 있음을 문(文)이라 하고 몸이 위태하여도 윗사람을 섬김을 충(忠)이라 한다.’ 하였다.

 

부인 이씨(李氏)는 여러 번 봉작을 받아 정경부인(貞敬夫人)이 되었는데, 용궁현감(龍宮縣監) 이경(李垌)의 따님이며, 종실 광평대군(廣平大君, 세종 5子) 이여(李璵)의 후예다. 부군(府君)과 같은 임인년에 나서 만력(萬歷) 기축년(선조 22, 1589년)에 부군(府君) 보다 먼저 죽으니 안동부(安東府) 서쪽 선수동(先壽洞) 계좌(癸坐:정북쪽에서 동쪽으로 15도 자리) 정향(丁向:정남쪽에서 서쪽으로 15도 방향) 둔덕에 장사지냈다.

 

부군(府君)에게는 2녀가 있으니 별좌(別坐)로 승지(承旨)에 증직된 이문영(李文英)과 정랑(正郎)으로 참판(參判)에 증직된 조직(趙稷)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그리고 4남이 있으니, 맏이는 류위(柳褘)인데 일찍 세상을 떠났고 둘째는 류여(柳袽)로 찰방(察訪)인데 장령(掌令)에 증직되었고, 셋째는 류단(柳褍)인데 세마(洗馬)로서 장령(掌令)에 증직되었으며, 넷째는 류진(柳袗)인데 지평(持平)으로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증직되었다. 류초(柳初)는 생원(生員), 류첨(柳襜)은 학생(學生)이요, 딸은 변응황(邊應篁)에게 시집갔는데 별좌이다. 사위 이문영은 아들 둘을 두었으니 이창조(李昌祚)는 현감(縣監)이며, 이홍조(李弘祚)도 현감이다. 사위 정랑(正郎:조직)은 3남을 두었으니 조수익(趙壽益)은 대사헌(大司憲), 조수백(趙壽白)은 사부(師傳)이며 그리고 조수이(趙壽頥)가 있다. 6녀는 이성익(李聖益)․안진(安鎭)․박만영(朴萬榮)․윤정(尹禎)․정석보(鄭錫輔)․정수광(鄭壽광)에게 각각 시집갔다. 둘째 아들 찰방(류여)은 1남을 두었는데 류원지(柳元之)이며 현감이다. 류원지는 3남을 두었는데 장남 의하(宜河)는 현감(縣監)이며, 다음은 중하(重河)․만하(萬河)이다. 2녀는 권증(權憕, 병곡 권구 父)․이재건(李在建:퇴계 5대손)에게 시집갔다. 셋째 아들 세마(洗馬:류단)는 1녀를 두었는데 박준(朴璿)에게 시집갔다. 넷째 아들 지평(持平:류진)은 8녀를 두었는데 김시민(金時敏)․신숭구(申嵩耉)․금처겸(琴處謙)․이상일(李尙逸 갈암伯兄)․김종준(金宗準)․정도응(鄭道應/우복孫)․곽문용(郭文溶)․이재관(李在寬)에게 각각 시집갔다. 그리고 2남을 두었는데 첫째 류천지(柳千之)는 익위(翊衛)요 둘째 류백지(柳百之)는 세마(洗馬:류단)에게 출계하였다. 생원(류초)은 4남을 두었는데 류익지(柳翼之)․류정지(柳延之)․류택지(柳擇之)․류희지(柳熙之)이다. 학생(류첨)은 2남을 두었는데 류습지(柳習之)․류휘지(柳徽之)이다.

 

부군(府君)께서 임종시 경계하시기를, “예장(禮葬)을 하지 말고 다른 이에게 묘비 글을 청 해 새겨서 세우지 말라고 하셔서 아무런 표지석도 없이 60여년이나 되었다. 그러나 옮겨 다녀 후세에 묘소마저 알 수 없을까 크게 걱정하여 자손들을 간략하게 위와 같이 기록해 둔다.

 

통훈대부 행 진안현감 류원지(柳元之) 삼가 기록한다.

숭정 기원후 137년 갑신년(영조 40, 1764년) 5월 일

6대손 통훈대부 전 행 의금부도사 류운(柳澐)이 건립하고

외(外) 6대손 통훈대부 전 행 병조좌랑 한산 이상정(李象靖)이 글씨를 쓰다.

서애 류성룡(西涯 柳成龍) 묘역후경

//풍원부원군 문충공 서애 류성룡(文忠公 西涯 柳成龍)가계//

5대조부 사정 류홍(柳洪)

  고조부 사복시정 류소(柳沼)

  고조모 안동권씨, 권작(權綽)의 따님. 평창군사 권옹(權雍)의 손녀

  증조부 증 이조판서 류자온(柳子溫)

      조부 간성군수 증 의정부찬성 류공작(柳公綽)

      조모 연안이씨 증 이조참의 이형례(李亨禮)의 따님

  아버지 감사 증 영의정 풍산부원군 입암 류중영(立巖 柳仲郢)

  어머니 정경부인 안동김씨, 진사 송은 김광수(松隱 金光粹)의 따님,  북평사 김극해(金克諧)의 손녀,

                                             안동김씨 도평의공파 파조 김구정(金九鼎)의 5대손

             형님 증 이조참판 원주목사 겸암 류운룡(謙唵 柳雲龍)

             풍원부원군 문충공 서애 류성룡(文忠公 西厓 柳成龍)

             배위 정경부인 전주이씨, 용궁현감 이경(李坰)의 따님

                     장남 류위(柳褘) 조졸

                     차남 장수찰방 증 사헌부장령 류여(柳袽, 1578~1607)

                     배위 남양홍씨, 군자감정 홍세찬(洪世贊)의 따님

                                 손자 사헌부감찰 진안현감 졸재 류원지(拙齋 柳元之, 1598~1678)

                                             증손 현감 우눌재 류의하(愚訥齎 柳宜河, 1616~1698)

                                                             현손 류후상(柳後常), 생부 류만하(柳萬河)

                                             증손 류중하(柳重河)

                                                             현손 생원 류후강(柳後康), 생부류만하(柳萬河)

                                             증손 승의랑 양오당 류만하(養吾堂 柳萬河)

                                                             현손 주일재 류후장(主一齋 柳後章)

                  삼남 세마 증 사헌부장령 도암 류단(道巖 柳褍)

                               손자 류백지(柳百之) 생부 수암 류진(修巖 柳袗)

                  사남 지평 증 이조참판 수암 류진(修巖 柳袗, 1582~1635)

                               손자 사헌부장령 어은 류천지(漁隱 柳千之, 1616~1689)

                               손자 류백지(柳百之)

                  오남 생원 류초(柳初)

                                손자 류익지(柳翼之), 류정지(柳廷之), 류택지(柳擇之), 류희지(柳熙之)

                  육남 종사랑 류첨(柳襜)

                                 손자 류습지(柳習之), 류휘지(柳徽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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