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헌부지평 공주목사 김정하(金正夏)
충남 아산시 둔포면 봉재리 산 53-21
공주목사 김정하(金正夏, 1633~1697)
공의 휘는 정하(正夏), 자는 자행(子行)으로 본관은 안동이다.
안동김씨는 신라 경순왕으로부터 시작되어
공은 중시조인 충렬공 김방경(忠烈公 金方慶)의 15세손이고,
파조인 익원공 낙포 김사형(翼元公 洛圃 金士衡)의 11세손이다.
증조부 증 영상 효헌공 눌암 김찬(孝獻公 訥菴 金瓚)은 임진왜란시 문장가이며
경제 전문가의 명신으로 외교적 수완이 능숙하여 전쟁수습 막후활약을 하였으며,
시호는 효헌(孝獻)이다.
공은 을묘생원 문과로 사간원정언을거쳐 공주목사를 지냈다.
사헌부지평김공묘갈명 병서 (司憲府持平金公墓碣銘 幷叙) 송파집 3권 松坡集 3卷
자행(子行)과는 나이가 같아 서로 사이가 좋았다.
정사년(1677)에 내가 낭성(琅城) 군수를 할 때, 자행은 율봉역(栗峰驛)의 우승(郵丞,찰방)이었다.
율봉역은 낭성 관아와 거리가 십리로 가까워, 업무의 여가에 자행을 초청하였다.
자행은 용처럼 빠른 말을 타고 순식간에 도착했다. 도착하여 바로 허리띠를 푹고 술을 마셨으며,
취하여 베개를 함께 베고 잤다. 이렇게 며칠을 지내다가 마쳤는데, 이같이 한 것이 반년이었다.
변고가 많은 세상이라, 유성이 흩어져 내렸다.
병자년(1696) 봄, 자행이 청계골에 있는 나를 찿아와 술을 받아 밤새 마셨다.
마음속에 품은 슬픔으로 원통해 하여, 다시는 옛날처럼 즐겁게 농담하지 못하였다.
떠날 때가 되자 자행이 웃으며,
“그대와 나는 모두 곤궁(困窮)하지만, 나는 호수 근처에 살고 또 밭이 몇이랑 있어 술과 안주거리가
겨우 준비될 수 있으니, 어찌 그대가 산채(山菜)안주와 촌구석의 술보다 낮지 않겠는가?” 라고 하였다.
내가 웃으며,
“나는 축지법(縮地法)을 써서 좋은 자리를 골라 살 수 없고, 또 하인에게 탈것을 준비시킬 수도 없지만,
다만 그대와 나의 목숨은 누가 자갑(雌甲)이고 누가 대무(大戊)인지를 모르겠네” 라고 대답하였다.
오호라! 자행은 죽고 나는 아직 죽지 않았으니, 이리하여 자행의 묘문(墓文)을 쓴다.
순식간에 사람이 사라져갔으니, 어찌 눈물 줄줄 흘리지 않을 수 있으리오? 자행의 이름은 정하(正夏)이며,
성은 김씨로 신라 경순왕의 후손이다. 이름이 김방경(金方慶, 1212~ 1300)이라는 분이 있어,
충절로 고려에서 대신이 되었으며, 상락공(上洛公)의 공작을 받았다.
상락공의 후예로 이름이 김사형(金士衡, 1332~1407)이라는 분이 있어, 조선 태조(太祖)를 보좌해
개국(開國)에 큰 공을 세워 벼슬이 좌의정(左議政)에 이르렀고, 시호는 익원(翼元)이다.
삼대를 내려와 김질(金礩, 1422~1478)도 벼슬이 좌의정에 이르렀고,
부원군(府院君)으로 훈봉(勳封)되었다.
또 삼대를 내려와 김언침(金彦沈)은 형조참의로 영의정에 추중되었다.
김찬(金瓚, 1543~1599)을 낳았으며, 벼슬이 이부상서로 영의정에 추중되었으니, 자행의 증조부이다.
조부의 이름은 김홍건(金弘建)으로 은거 하였다.
부친의 이름은 김주(金周)로 공조정랑을 지냈다.
어머니는 숙인김씨로,
본적이 다른 청풍(淸風)김씨 첨정 김흥상(金興祥)의 딸이며, 명 숭정 계유년(1633) 5월에 자행을 낳았다.
자행은 어린나이부터 문장(文章)에 뛰어나 명성(名聲)이 있었으나, 과거 시험에는 이롭지 못하였다.
을묘년(1675) 43세에 이르러, 소과와 대과에 연속하여 합격했다.
괴원(槐院, 승문원)에 선발되어 들어갔다가 나와서 율봉찰방이 되었으며, 호조좌랑으로 승진하였다.
이로부터 20여년의 오랜 동안, 관직에 있었던 것은 4분의 1이 못 되었다.
병조에서 좌랑을 했고, 경상도에서는 도사(都事)를 지냈으며, 고산찰방(高山察訪)을 했고,
국자감(國子監)의 사예(司藝)를 하며 역사기록을 겸임하였고, 전라좌도의 시험을 관장하였다.
사간원에 들어와 정언과 지평을 각각 한 차례 하였으며, 오래지 않아 교체되어,
상소문(上疏文)과 계문(啟文)을 전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기사년(1689)에 공주목사로 임명되었다.
송사(訟事)를 공평하게 처리하여, 관리들이 경외하고 백성들이 존경하였다.
경오년(1690)에 다른 사람의 비방을 받아 벼슬을 그만두고 아산의 시골집으로 돌아갔다.
매일 아우, 조카, 친척, 이웃과 더불어 기쁘게 담소하였다.
간혹 지팡이 짚고 짚신을 신고 밭두둑으로 거닐다가 어른을 만나면 날씨를 헤아려 보기도 했다.
조정의 일은 까마득히 듣지 않는 듯 했다.
정축년(1697) 겨울, 병에 걸려 11월 8일 졸 하였다.
무인년(1698) 2월에 천만 모산(毛山) 오리동(梧里洞)의 서북쪽을 등진 언덕에 장사지냈다.
부인은 숙인 경주이씨로 학생 이덕(李悳)의 딸이다.
유순(柔順)하고 상냥하며 부덕(婦德)이 있었는데, 자행보다 7년 앞서서 사망하였고, 나이 61세였다.
두 아들은 김증(金拯)과 김박(金搏)이고, 딸 하나는 사대부 황응서(黃鷹瑞)에게 출가하였다.
김증은 아들이 없어 김박의 아들 윤정(允鼎)을 데려와 후손으로 삼았다.
김박은 재주가 있었으나, 요절하였으며 윤정(允鼎)과 윤태(允泰) 두 아들도 나가서 아무개의 양자가 되었다.
황응서는 딸이 둘이며, 선비 나중신(羅重信)과 이익운(李翼運)이 사위이다.
자행은 천성(天性)이 온화하고 지혜로워 어버이에 순종하고 형제간에 화목했으며, 벗에게 믿음이 있었다.
마음에 거리낌이 없어 타인에게 경계를 두지 않아. 사람들이 모두 친밀하게 여기고 사모하였다.
과거를 보았으나 여러 차례 합격하지 못했다.
용주(龍洲) 조경(趙絅, 1586~1669) 선생은 총재공(‘冢宰公’, 즉 증조부 효헌공 눌암 김찬)의 사위이다.
일찍이 자행을 총애하여, 불러서 격려하여 말하기를,
“너의 재주는 마땅히 너의 가문에 대대로 내려오는 것인데, 어찌 힘써 노력하지 않는가?”라고 하였다. 또
“긴 밤에 잠이 오지 않으면, 책을 읽기에 가장 적당하다. 나는 일정한 일이 있는데, 너도 있느냐?” 라고 하니
공손하게 사례하고 고문(古文)수십 편을 들어 대답하여, “이것이 저의 야간 과제입니다.”라고 하였다.
용주가 기뻐하며, “이것으로 족하도다. 나는 너만 못하구나!” 라고 하였다.
이미 명성이 높아졌지만, 절대로 문예(文藝)를 이야기하지 않았으며, 손님을 만나면 반드시 술을 마셨고,
바둑 두는 사람이 있으면 마주하여 종일토록 대국하였다.
그러나 여럿이 위급한 일의 득실(得失)을 논쟁하여 각자 떠들며 결정하지 못하자,
자행이 천천히 한 마디로 이를 꺾어버리니, 모두들 분개했지만 승복하였다.
방기(方技)와 잡다한 서적에 심오(深奧)하여 난해한 부분이 있으면,
자행은 깊이 생각하여 얼마 되지 않아 반드시 이해하였다. 다른 사람은 밤낮으로 궁구해도 할 수가 없었다.
구장산술(九章算術)에 대하여 근래에 회사(會士)의 무리들은 대강을 섭렵했지만, 자행만이 정통하였다.
내가 일찍이 자행에게 물어보며 익혔지만, 그 묘리를 다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이처럼 자행을 잘 알았지만, 그러나 그의 깊은 학문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오호라! 자행은 명가(名家) 출신으로 벼슬이 매우 늦지는 않았네.
용모(容貌) 온화(溫和)하고 말투 겸손하여 사람들이 시기하고 질투하지 않았네.
차근차근 순서를 따랐어도 금자(金紫)를 가질 수가 있었네.
그렇지만 돌이켜보면 조금만 움직여도 크게 방해를 받아 배척(排斥)을 당해서 떨치지 못했으니,
어찌 운명이 아니겠는가? 그렇지만 자행의 용모 비록 온화했어도, 부귀를 위해 세속에 영합하지 않았네.
말은 비록 겸손했으나 아부하기 위하여 시세를 따르지 않았네.
마음은 옛사람의 법칙을 따랐고, 걸음은 당시 권세가의 대문을 피하였네.
이렇게 나아갔으니, 어찌 유리한 곳으로 달려갔겠는가?
하물며 앞에는 매우 험난한 곳이 있고 내 수레는 이미 부서졌으니, 자행이 어찌 할 수 있었으랴?
자행이 자식을 훈계(訓戒)한 말을 들어보니,
부러워하지 말 것을 첫째로 삼았다. 오호라! 자행은 현명하였도다!
명에 이른다.
그릇이 늦게 이루어지는 것은 큰 재난이 있기 때문이고,
수레가 나아가지 않는 것은 길이 막혔기 때문일세.
호수와 바다에 깊이 잠겨 은거하면서 술에 취했고,
천안(天安)에서 영원히 평안해졌으니 혼백이 깃든 곳이라네.
비석의 규수(圭首)에 벗이 기록하노라!
우계인 송곡 이서우(松谷 李瑞雨) 짓다.
通訓大夫公州牧使安東金公諱正夏之墓 配淑人慶州李氏祔
통훈대부공주목사안동김공휘정하지묘 배숙인경주이씨부
묘역 후경
사간원 지평 공주목사 김정하(金正夏)의 장남 통덕랑 김증(金拯)
사간원 지평 공주목사 김정하(金正夏)의 차남 김박(金博)
김윤정(金允鼎)
김집(金集)
김세걸(金世榤)
김사눌(金士訥)
김한근(金漢根)
김연묵(金然默)
김재철(金在哲)
//안동김씨 익원공파 사간원 지평 공주목사 김정하(金正夏)가계//
고조부 형조참의 증 영의정 김언침(김언침, 1514~15840
증조부 이조판서 증 영의정 효헌공 눌암 김찬(孝獻公 訥菴 金瓚, 1543~1599)
증조모 증 정경부인 양성이씨, 무공랑 이용(李墉)의 따님, 대사헌 이세영(李世英)의 손녀
조부 참봉 시은 김홍건(市隱 金弘建,1580~1643)
조모 공인 성주이씨, 집의 이함(李諴)의 따님
부친 공조좌랑 고령현감 강남자 김주(江南子 金周, 1597~1663)
모친 숙인 청풍김씨, 첨정 김흥상(金興祥)의 따님, 참판 김권(金權)의 손녀
형님 봉직랑 김정표(金正彪,1621~1691)
형님 김정휘(金正徽,1624~1657)
형님 김정의(金正誼,1630~1662)
동생 선전관 김정회(金正會,1636~1715), 1676무과
동생 진사 김정아(金正雅,1641~1688)
사헌부 지평 공주목사 김정하(金正夏, 1633~1697), 1675문과
배위 숙인 경주이씨, 이덕(李悳)의 따님
장남 통덕랑 김증(金拯)
손자 김윤정(金允鼎)
차남 김박(金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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