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산정(孤山亭)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가송길 177-42(가송리 447)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74호
고산정(孤山亭)
안동의 청량산(淸凉山) 암벽 옆에 봉화현감을 지낸 의병장 성재 금난수 (惺齋 琴蘭秀) 가 지은 정자이다.
퇴계이황(退溪 李滉)의 제자인 금난수는
당시 선성(宣城:안동 예안현의 별칭)의 명승지 가운데 한 곳인
가송협(佳松峽)에 이 정자를 짓고 일동정사(日東精舍)라 불렀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홑처마 팔작지붕 기와집으로, 주변의 풍광이 뛰어나다.
퇴계이황(退溪 李滉)과 성재 금난수 (惺齋 琴蘭秀)의 시가 현판으로 걸려 있다
성재 금난수는 (惺齋 琴蘭秀, 1530~1599)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서예가이다.
자는 문원(聞遠), 호는 성재(惺齋) 또는 고산주인(孤山主人), 본관은 봉화(奉化)이다.
고려 평장사 금의(琴儀)의 후손이며,
부친은 첨지중추부사 금헌(琴憲), 모친은 영양남씨로 교수 남식(南軾)의 따님이다.
초년에는 청계 김진(靑溪 金璡)에게 수학하였으나,
손위 처남인 월천 조목(月川 趙穆)의 권유로 인척관계인 퇴계 이황(退溪 李滉)의 문하가 되었다.
1561년 32세에 생원시에 합격하여, 1579년 유일(遺逸)로 제릉(齊陵)의 참봉을 역임하였으며,
이후 집경전(集慶殿) 과 경릉의 참봉을 지내고, 1585년 장흥고봉사(長興庫奉事)가 되었다.
그 뒤 장흥고 직장과 장례원 사평을 지냈으나,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노모의 봉양을 위해 고향인 예안(禮安)에 은거하였다.
정유재란 때 고향에서 의병을 일으키자 많은 선비들이 호응해서 참가하였으며,
지방민들은 군량미를 헌납하였다.
1596년 67세때에 성주판관과 익위사(翊衛司) 익위(翊衛)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이듬 해 수성장(守城將)이 되었다.
1599년 고향인 봉화 현감(奉化 縣監)으로 임명되었으나
1년 만에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1604년 사망하였으며, 1605년 선무(宣武) 원종공신에 추록되었고,
좌승지에 추증되어, 1709년 예안 동계정사(東溪精舍)에 봉안되었다. 저서로는 『성재집(惺齋集)』이 있다.
금난수는 35세인 1564년(명종 19)에 이미 안동 예안면(禮安面) 부포리에 있는
현재의 성성재 종택(경북문화재자료 264) 아래쪽에 성재(惺齋)라는 정자를 짓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고산정은 그 후에 지은 정자로서, 주변 경관이 뛰어나 이황을 비롯한 선비들의 내왕이 잦았던 곳이다.
정자 앞으로 강물이 시원하게 흐르고 맞은편 산기슭에는 물맛 좋은 옹달샘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
예전에는 이곳에 학이 많이 서식했다고 하나 지금은 없다.
정자 왼쪽에 조선총독부에서 세운 조학번식지(鳥鶴蕃殖地)라는 천연기념물 비가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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