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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부여박물관 보광사지 대보광선사비(普光寺址 大普光禪寺碑)

구름에 달

by 碧巖 2023. 10. 25. 2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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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박물관 보광사지 대보광선사비(普光寺址 大普光禪寺碑)

보물 제107호

충남 부여군 부여읍 금성로 5

원명국사 설봉 충감 (圓明國師 雪峯 沖鑑, 1275~1339)

비의 크기  2020×1080×220

보광사지 대보광선사비(普光寺址 大普光禪寺碑)

1963년 보물 제107호로 지정되었다.

높이 1.97m. 국립부여박물관 소장.

고려시대 보광사를 크게 일으킨 원명국사 충감(圓明國師 沖鑑, 1275~1339)의 비이다.

원래는 충청남도 부여군 임천면 가신리 보광사지(普光寺址)에 있던 것을 국립부여박물관으로 옮겨 보관하고 있다.

원래의 비(碑)는 1285년(충렬왕 11)에 세웠고

1750년(영조 26)에 개각(改刻)하였다.

현재 대석(臺石)과 개석(蓋石)은 없어지고 비신(碑身)만 남아 있는데,

비신의 가장자리에는 당초문(唐草文)을 유려하게 조각하였으며 윗부분을 귀접이하였다.

 

제일 윗부분에는 “고려임주대보광선사비(高麗林州大普光禪寺碑)”라는 10자의 전액(篆額)이 있고,

비제(碑題)는 “고려임주대보광선사중창비(高麗林州大普光禪寺重刱碑)”로 되어 있다.

비문은 충감(沖鑑)의 제자이자 당시 선원사(禪源寺) 주지였던 굉연(宏演)이

원나라에서 문장가로 이름 높았던 위소(危素)에게 부탁해서 지은 것이며,

양지(楊池)가 썼으며, 주백기(周伯琦)가 전액을 하였다.

비음(碑陰)에 적혀진 추기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전우(殿宇)가 모두 불타서 없어지고

기적비(紀蹟碑)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박락(剝落)되여 원명국사(圓明國師)의 유적을 찾을 수 없으므로

주지(住持) 석능일(釋能一)이 고쳐 새기니 비지(碑誌)가 천년 만에 거듭 새로워져 밝기가 어제 같다고 하였다.

개각 연대는 1750년 6월 20일이며 이충언(李忠言)이 각자하였다.

 

위소(危素, 1303~1372)

중국 원말 명초(元末明初, 1303~1372)의 서가. 자는 태박(太樸), 호는 운림(雲林).

장시성 금계 사람. 원대 지정 연간(1341~1368)에 경연검토(經筵檢討)의 관직에 있으면서

송나라, 요나라, 금나라(宋∙選∙金)의 삼사(三史)를 편수하는데 참여함.

명초에 한림시강학사가 되어 그의 문하생인 송렴과 <원사(元史)> 편수에 참여했으며, 홍문관학사를 겸직했다.

서는 모든 체에서 뛰어났으며 특히 해서에는 지영(智水), 우세남의 전칙(典則)이 갖추어졌다는 칭찬을 받았다.

정계(政界)의 명신이나 불사도관(佛寺道觀)등의 많은 비문이 그에 의해 씌어졌다고 전한다.

 

주백기(周伯琦, 1298~1369)

중국, 원대의 서예가. 자는 백온(伯温), 호는 옥설파진일(玉雪坡眞逸).

파양(鄱陽, 장시성) 사람. 관직은 한림직학사(翰林直學士), 병부시랑, 중대감찰어사에 이르렀다.

전서,예서, 진서,초서로 유명하고, 고전(古篆)의 체(體)는 조맹부의 유풍을 계승했다.

지정(至正) 원년(1341) 규장각을 선문각(宣文閣)으로 개칭할 때

선문각보(宣文閣寶)라는 전액(篆額)과 수장인(收藏印)을 새겼고

난정서(蘭亭序)나 지영(智永)의 <천자문> 모본(模本)을 돌에 새겨 상자 안에 두었다.

만년 소주의 장사성(張士誠)에게 초청되어 여러 문사와 사귀었으나,

사성이 주원장(朱元璋, 홍무제)에게 패한 뒤 향리로 돌아왔고 거기서 사망했다.

저서에 <육서정위(六書正譌)>, <설문자원(說文字原)>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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