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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부여박물관, 당유인원기공비(唐劉仁願紀功碑), 부여석조(扶餘石槽)

구름에 달

by 碧巖 2023. 10. 27.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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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박물관 당유인원기공비(唐劉仁願紀功碑)

보물 제21호

충남 부여군 부여읍 금성로 5

 

당유인원기공비(唐劉仁願紀功碑)

당 태종의 고구려 공격 때 당나라 장수로 온 유인원(劉仁願)의 공을 세우고

소정방(蘇定方)과 더불어 백제를 멸망시키고 복신과 도침, 부여풍 등의 백제 부흥운동을 평정한 내용 등이 새겨져 있다.

당나라 장수 유인원(劉仁願)의 증조부는 진북대장군 평(平), 조부는 표기대장군 의(懿), 부친은 팽성군개국공 대구(大俱)

 

비가 세워진 시기는 부여 정림사지오층석탑에 소정방(蘇定方, 592~667)이

평제기공문을 새긴 3년 뒤인 신라 문무왕 3년인 663년이다.

당나라 장수의 공적비이기는 하지만, 의자왕과 태자 및 신하 700여 명이 당나라로 압송되었던 사실과

부흥운동의 중요내용, 폐허가 된 도성의 모습 등이 기록되어 있어 당시의 상황을 아는데 도움이 되고 있다.

통일신라 초기의 태종무열왕릉비도 이 비와 같은 계통의 형식을 보여주는데,

통일신라 초기 당나라식 석비를 볼 수 있으며, 당의 명필 저수량(褚遂良)이 글씨를 썼다.

 

저수량(褚遂良, 596~658)

중국 당나라의 서예가로 항저우 출생이며 우세남(虞世南), 구양순(歐陽詢)과 더불어 초당(初唐) 3대가로 불린다.

왕희지(王羲之)의 필적 수집 사업에서는

태종의 측근으로 그 감정을 맡아 보면서 그 진위(眞僞)를 판별하는 데 착오가 없었다고 한다.

그는 글씨에 뛰어나 우세남(虞世南), 구양순(歐陽詢)과 함께 당 서도의 일인자가 되었다.

그는 해서·행서·초서를 잘 썼는데, 특히 해서에 뛰어났다.

그 후 벼슬이 상서시랑에까지 이르렀으나,

당 고종 때 측천무후가 허경종(許敬宗), 이의부(李義府) 등이 그를 모함하는 말을 믿고 애주자사(愛州刺史)로 좌천시켰고, 오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글씨가 아름답고 화려한 가운데에도 용필(用筆)에 힘찬 기세와 변화를 간직하였다.

그의 아들 저언보(褚彦甫), 저언충(褚彦沖) 등 또한 애주(愛州)로 유배되었다가 모두 살해당했다.

 

 

 

부여석조(扶餘石槽)

보물 제194호

충청남도 부여군 국립 부여 박물관에 소장된 백제의 석조 유물.

당시 왕궁에서 사용하던 석조로 판단되며,

원형으로 조성되어 통일 신라의 양식과는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받침돌이나 몸체 표면의 우아한 곡선미는 백제의 간결하고 소박한 미적 감각을 잘 나타낸다.

높이 1.57m, 지름 1.42m. 돌로 만든 물그릇으로,

현재는 박물관 안쪽에 자리하고 있지만, 원래는 박물관 건물 동쪽의 우물자리 아래쪽으로 10m쯤 떨어진 곳에 있었다.

석조는 하나의 돌로 만들었으며, 아무런 장식이나 문양이 없는 둥근 받침돌 위에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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