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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금강산 건봉사(乾鳳寺), 건봉사 불이문(乾鳳寺 不二門),십바라밀석주(十波羅密石柱), 건봉사 석가모니 진신치아사리,

종교

by 碧巖 2024. 1. 8. 2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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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 금강산 건봉사(乾鳳寺)

강원도 고성군 거진읍 건봉사로 723 (냉천리 32-1)

건봉사 불이문(乾鳳寺 不二門)

마음의 번뇌를 없애는 가르침의 관문

6∙25전쟁시 건물들이 모두 멸실되고 유일하게 남은 것은 불이문(不二門)만 건봉사지 입구에 남아 있다.

“불이문”은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35호로 

1920년에 건립한 원통형으로 높이가 1.61m의 4개의 돌기둥(石柱)위에

나무 기둥을 세워 지은 겹처마 팔작지붕의 다포집이다.

건물의 위쪽 중앙에는 당대의 명필 해강 김규진(海剛 金圭鎭,1868~1933)선생이 썼다는

불이문(不二門) 현판이 오랜 풍상을 이겨내며 현재까지 걸려 있다.

“불이문”이란 뜻은 상대적 차별적인 이기심을 모두 초월하고 마음을 비워

절대적 평등적 진리를 나타내는 가르침의 세계로 들어가는 관문을 의미한다고 한다.

건봉사(乾鳳寺)는 신라 법흥왕 7년(서기 520년)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후 발징화상(發徵和尙)이 원각사(圓覺寺)를 중건하였고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서봉사(西鳳寺)를 중수했다.

고려 공민왕 7년(서기 1358년) 나옹대사(懶翁大師)가 서봉사를 중수하고 절이름을 건봉사로 고쳤다 한다.

조선시대 세조가 들렀다가 왕실 원당(願堂)으로 정하기로 했으며

선조때는 임진왜란을 맞아 사명대사(泗溟大師)가 6천여명의 승병을 모집, 봉기한 사찰로 왜적을 물리쳤다.

금강산 건봉사(乾鳳寺)

유서깊은 호국통일의 도장(道場)

건봉사(乾鳳寺)는 거진읍(巨津邑) 냉천리(冷泉里) 36번지에 위치하며

금강산(金剛山) 가장 남단에 자리 잡고 있는 사찰로 강원도 지방기념물 제51호이다.

건봉사는 신라 법흥왕 7년(서기520년) 고구려의 승려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창건하였다.

그후 발징화상(發徵和尙)이 원각사를 중건하고 또한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서봉사(西鳳寺)로 중수했다.

1358년 고려 공민왕(恭愍王)7년 나옹대사(懶翁大師)가 절 이름을 건봉사로 고쳤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사찰내 건물들의 규모가 7백76칸이나 되어 웅장함을 자랑하였고,

전국 4대사찰의 하나로서 승려만도 7백여 명에 이르러 선교양종(禪敎兩宗)의 대본산으로

해인사와 쌍벽을 이루었던 대사찰로 설악산 신흥사와 낙산사가 모두 건봉사의 말사(末寺)였다.

 

또한 만해 한용운(韓龍雲)이 건봉사에서 승려 생활을 했으며

건봉사에 봉명학교(鳳鳴學校)를 세워 일제하의 민족사상 계몽교육의 구심체가 되어

호국불교의 도량으로서 특히「조선불교 유신론」으로 한국(韓國)불교계의 큰 변혁을 시도하고

3∙1운동 33인의 민족대표로서, 그리고「님의 침묵」의 시인으로 추앙 받은 만해 한용운이

근세의「건봉사지(乾鳳寺誌)」를 저술한 것으로 미루어 볼때

건봉사는 봉명학교 운영과 함께 항일 민족운동의 근거지였으며

선조때는 사명대사(泗溟大師)가 승병을 모집 봉기한 사찰로 그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다.

건봉사는 6∙25동란으로 그 웅장한 건물들이 회진되고 유일하게 불이문(不二門)만 남았었다.

건봉사는 수복이후 민통선내에 있어 세인들의 출입이 금지되다가

1989년도에 국방부로부터 민통선 해제가 승인되어

신도들은 물론 전국의 경향각지에서 이곳을 찾아자유로이 출입을 하고 있다.

또한 건봉사에서 1977년도「건봉사본말사적(乾鳳寺本末事蹟)」이 발견된 바 있고

1990년도 현지 지표조사가 이루어져 건봉사의 연혁은 물론, 유물, 유적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다.

또 건봉사는 1천 5백여 년의 역사를 이어온 유서깊은 사찰로서

조선 선조38년(1605년)에 사명대사가 부처님 진신치아사리 12과를 봉안한 곳이기도 한다.

건봉사는 정부의 문화유산 발굴 및 보전관리 사업으로 지난 93년도부터 본격적으로 건봉사유구

정비가 시작되어 옛날의 그 모습들을 똑같이 재현하여 천혜의 명승지인 금강과 설악을 배경으로

역사적인 신라 화랑도의 국토순례장으로, 고려때에는 사대부의 문예수련장이며

국난극복의 발상지로 그 때의 위용을 나타낼 수 있도록 불사(佛事)가 진행되고 있다.

금강산 건봉사 능파교(金剛山 乾鳳寺 凌波橋)

건봉사에 현재까지 유일하게 천연의 자태로 남아 있는 석교(石橋)인 능파교(凌波橋)는

4개의 석교중 가장 정교하고 아름다우며,

그 규모도 가장 큰데 불이문(不二門)을 지나 대웅전 바로앞의 교량이기도 한다.

능파교(凌波橋) 신창기(新創記)에 의하면 1708년 조선숙종(朝鮮肅宗) 24년에 세워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건봉사 십바라밀석주(十波羅密石柱)

전국4대사찰의 하나이자 호국대가람 금강산 건봉사 경내에 있는

십바라밀석주(十波羅密石柱) 2기가 대승불교의 기본수행법을 표현하고

시각적인 교육효과를 지닌 국내에선 보기드문 중요한 사찰문화재로 밝혀졌다.

건봉사 대웅전 앞 능파교를 건너면 대석단이 보이고

중앙통로 좌우로 높이 1m58㎝의 사각형(四角形) 석주 2기가 우뚝 서있다.

이중 좌측석주 전면엔 원월(圓月), 신날, 구름, 좌우쌍정(左右雙晶), 고리두퇴의 형을 취한 것이 있으며

우측석주엔 반월(半月), 가위, 금강저(金剛杵), 전후쌍정(前後雙晶), 성중원월(星中圓月)형이 음각되어 있다.

이와 같은 석주의 십바라밀 도형(圖形)에는

대승불교의 기본수행법인 보시(보施), 지계(持戒), 지혜(智慧)의 바라밀에다

이 여섯가지를 보조하는 방편(方便), 원(願), 력(力), 지(知)의 4바라밀을 첨가해 구성한 것으로

십바라밀도는 이들 열가지 수행의 방법을 상징화하여 나타낸 것으로

그 하나하나에는 깊은 의미가 간직되어 있다.

신라 법흥왕7년(서기520년)에 세워졌다는 건봉사는 임진왜란 당시 사명대사가 승병을 모집,

봉기한 국난극복의 유적지이며 일제때에는 관동북부지방의 대표적 민족교육 기관인 봉명학교가 설립돼

민족사상 계몽교육의 구심이 되었던 명찰이다.

건봉사 십바리밀 석주에 음각된 내용들은 재물과 진리와 두려움을 없애주는 3종의 보시를 베풀고

보름달 같은 광명이 두루 비치고, 계율을 지켜 그릇됨과 악한 것을 방지하고

선행을 쌓아 어둠을 감하고 밝음을 더욱 자라게 하며 또한,

욕됨을 참고 마음을 한곳에 모아 깊은 삼매(三昧)을 이루게 되면

모든 열기와 번뇌가 소멸되어 청량을 얻게 된다는 선정바라밀을 나태내고 있다.

 

건봉사 대웅전

 

 

보안원(普眼院)---부처님 진신치아사리 친견장

 

건봉사(乾鳳寺) 석가모니 진신 치아사리

선조 38년 사명대사가 일본에서 찾아온 보물

 

이곳에 있는 사리 및 사리탑은 신라시대에 자장율사가 산서 청량산 속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석가세존의 진신사리와 금관가사 구엽경 등을 나누어 가지고 환국하여

일부는 오대산 월정사와 통도사에 봉안하였는데

진신사리 12과는 임진왜란 때 왜병이 통도사의 사리를 약탈해 간 것을

선조 38년에 사명대사(泗溟大師)가 일본에 사행하였다가 다시 찾아와

건봉사지(강원도 기념물 51호) 사리탑에 봉안되어 있었는데

1986년도 6월경에 문화재 전문 도굴단에 의해 도난당했던 것을 다시 찾게 되어

대한불교 조계종에서 보관했던 것을 소유권 문제로 법정시비 끝에

불자들과 지역주민의 열화같은 애향심과 끈질긴 노력으로 건봉사에 봉안하게 되었다.

 

석가모니 진신치아사리는 전세계에 15과 뿐인데

스리랑카에 3과가 있고 건봉사에 8과만이 봉안되어 있으며

유네스코에 세계유산으로 등록하리 만치 희귀한 것이다.

한편 최근에 새로 지은“적멸보궁” 후면 오른쪽 앞에 건립되어 있는

치아사리탑은 천고의 자태를 뽐내고 있으며

방현의 지대석에 기단부, 탑신부, 상륜부를 구분한 팔각원당형의 부도이다.

기단부는 팔각형으로 하대석, 중대석, 상대석을 완전히 구비하고 있는데

하대석에는 복련, 상대석에는 양련 등의 무늬가 새겨져 있다.

탑신은 높이 53㎝의 구형인데 표면엔 아무런 장식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옥개석은 팔갈형으로 낙수면과 상면이 별도의 돌로 구성되어 있다.

 

 

 

 

건봉사 명부전(冥府殿)

 

 

 

 

 

건봉사 극락전(極樂殿)

 

 

건봉사 독성각(獨聖閣)

 

 

건봉사 산신각(山神閣)

 

 

건봉사 범종각(梵鐘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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