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의평리 상당군 문헌공 이재 백이정(文憲公 彝齋 白頤正)
충청남도 보령시 웅천읍 평리 산36-2, 양각산(羊角山) 동막동
추원보본
여기부터 묘역까지 380m 그러나 산길이 산길인지라 ...
문헌공 이재 백이정(文憲公 彝齋 白頤正,1247고종34~1323충숙왕10)
문헌공 이재 백이정(文憲公 彝齋 白頤正,1247고종34~1323충숙왕10)
본관은 남포(藍浦). 자는 약헌(若軒). 호는 이재(彝齋).
아버지는 보문각학사 백문절(白文節)이고,
어머니는 성주이씨, 참봉 이세주(李世柱)의 딸이며, 안향(安珦)의 문인이다.
1284년(충렬왕10) 문과에 급제, 충선왕 때 첨의평리(僉議評理)로
상의회의도감사(商議會議都監事)를 겸했고,
뒤에 상당군(上黨君)에 봉해졌다.
.1298년 충렬왕 24년 원(元)이 사신을 보내
세자를 왕으로 삼고 충선왕(忠宣王)을 불렀을 때,
백이정(白頤正)은 충선왕(忠宣王)을 호종하여 원나라에 가게 되었다.
충선왕은 이해 1월 충렬왕의 양위를 받아 대대적인 개혁정치를 펴다
원의 압력으로 8개월만에 왕위를 내려놓고 원나라에 소환된 것이다.
백이정은 연경(燕京)에서
10년동안 충선왕을 숙위(宿衛)하면서 성리학을 본격적으로 연구하였다.
이에 앞서 회헌 안향(晦軒 安珦,1243~1306)으로부터 성리학을 배웠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1308년에 충렬왕이 죽자 충선왕이 귀국하여
다시 왕위에 오르는데 이때 그도 충선왕을 따라 귀국하게 되었다.
그는 귀국하면서 그동안 수집한 정주(程朱)의 서적을 가지고 왔다.
이때는 안향이 타계한지 2년 뒤였다.
백이정의 이같은 노력으로 성리학 연구는 다시 활기를 띠게 되었다.
백이정의<행장>은 이대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충렬왕 24년에 충선왕이 원나라로 돌아감에
백이정은 숙위(宿衛)로서 호종하였다.
연경에 머문 10년동안 정주전서(程朱全書)를 많이 취하여 귀국할 때 가져와
치암 박충좌(恥菴 朴忠佐,1287~1349), 문충공 익재 이제현(李齊賢,1287~1367),
문효공 이곡(文孝公 李穀,1298~1351), 초은 이인복(樵隱 李仁復,1308~1374),
담암 백문보(淡庵 白文寶,1303~1374), 쌍계 백홍정(雙溪 白弘正),
운와 이달존(雲窩 李達尊,1313~1340), 복흥군 민종유(福興君 閔宗儒,1245~1324),
균헌 김영돈(筠軒 金永暾,1285~1348), 정간공 온재 김영후(貞簡公 穩齋 金永煦,1292~1361),
겸재 안목(謙齋 安牧,1290~1360), 수성백 문익공 백천장(隋城伯 文益公 白天藏),
오효충(吳效冲), 화평군 문민공 김광철(化平君 文敏公 金光轍,1289~1349),
전리판서 문간공 김광재(文簡公 金光載), 밀직부사 장순(張純),
화제 임자순(和霽 任子順) 등의 뛰어난 주자학자들을 길러냈다.
이로써 동방의 학자들은 비로소 성리학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彛齋白公墓碣碑
이재백공묘갈비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성리학을 들여온 사람은 회헌 안향(晦軒 安珦)이지만,
성리학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고 그 체계를 파악해
크게 일가를 이룬 이는 이재 백이정(文彝齋 白頤正)이라 할 수 있다.
회헌 안향(晦軒 安珦,1243~1306)과 백이정(白頤正)의 학통은
익재 이제현(益齋 李齊賢,1288~1367)에게 전승되었고,
이제현(李齊賢)의 학통은 목은 이색(牧隱 李穡,1328~1396)에게,
이색(李穡)의 학통은 양촌 권근(陽村 權近,1352~1409)과
춘정 변계량(春亭 卞季良,1369~1430)에게 이어졌다.
선조 때 연흥부원군 김제남(金悌男,1562~1613),
만곡 최기남(晩谷 崔起南,1559~1619) 등이 송경(宋京)에 서원을 세워
안향(安珦), 국재 권보(菊齋 權溥,1262~1346)와 함께 배향하기로
경기사림(京畿士林)과 논의하다가 임진왜란으로 인해 이루지 못했지만,
남포의 신안원(新安院), 충주의 도통사(道統祠),
진주의 도통사(道通祠), 남해의 난곡사(蘭谷祠)에서 향사하고 있다.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유고로는 「연거시(燕居詩)」·「영당요(詠唐堯)」·「한벽루(寒碧樓)」·
「여홍애집구(與洪厓集句)」 등의 시구가 전해지고 있다.
이곳 보령 양각산(羊角山) 동막골(垌幕)은
신라 말 평장사 백광원(平章事 白光元)과 고려 말 성리학의 원조이며 동방부자(東方夫子)라 추앙하는 이재 백이정(彛齋 白頤正,1247~1323) 선생의 묘소가 있다.
백광원은 신라 현안왕 때의 간관 백중학 공의 손자로서 신라 경문왕 때 광록대부 문하시중 정당문학 평장사에 이르렀고, 문장과 덕행이 뛰어나 옛날 중국의 이윤(伊尹)과 여상(呂尙)에 짝할 만 하고 소하(蕭何)와 조참(曺參)의 위에 있다고 전해진다.
백이정 선생(白頤正 先生) 선생의 호는 이재(彛齋), 시호는 문헌(文憲)이며 본관은 남포로 시조 간관공의 후손이며 국학 대사성 문간공 담암 백문절(淡巖 白文節)의 아들이다. 충렬왕 10년(1284)에 문과에 급제하고 등관하여 충숙왕 때 첨의평리(僉議平理),상의회의도감사(商議會議都監事), 삼중대광에 올라 상당군(上黨君)에 봉해졌다..
백이정 선생은 천품이 순후하고 공보의 기량이 있어 충선왕을 보도(補導)하였다. 이 시절 충선왕이 개혁정치를 강행하자 반대파의 모함으로 즉위 7개월 만에 왕이 원의 소환으로 원경(元京)에 갈 때 선생은 왕을 따라 10여 년간을 원경에 체류하였다. 당시 정주학(程朱學)이 처음 중국에서 행하였으나 우리나라에는 미치지 않았는데 선생이 재원 중 10여 년간 연구통달(硏究通達)하여 돌아와 익재 이제현(益齋 李齊賢,1288~1367)과, 치암 박충좌(恥菴 朴忠佐,1287~1349)에게 먼저 사수(師授) 하고, 이어 이곡(李穀), 이인복(李仁復), 백문보(白文寶) 등 많은 학자에게 훈회강수(訓誨講授)하니, 이로부터 우리나라 성리학의 근원이 된 것이라 한다.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유고로 <연거시(燕居詩)> <영당요(詠唐堯)> <한벽루(寒碧樓)> <여홍애집구(與洪厓集句)> 등의 시구가 전해지고 있다. 남포의 신안원(新安院), 충주의 도통사(道統祠), 남해의 난곡사(蘭谷祠)에서 제사를 지내고 있다.
이곳 구남포는 백씨의 연원지로서 백씨사현과 그 후손이 거금 1,200년간 세거세장(世居世葬)한 곳으로 선생께서 만년에 귀향하여 제자들을 가르치고 성인서(聖人書)를 분향정독(焚香靜讀) 하다 충숙왕 10년(1323) 수 77세로 서거하여, 이곳 양각산 서록 길지에 영면하였다. 묘소의 국내(局內)는 조선왕조 고종 황제께서 재위 2년 5월에 명신,명현(名臣, 名賢)의 묘소를 영구히 존엄수호(尊嚴守護)하라 하여 묘림(墓林) 41만 여 평을 하사한 사패지지(賜牌之地)라 한다
이재 백이정(彝齋 白頤正) 신도비와 평장사 연정 백광원(烟亭 白光元) 신도비
彛齋 白公 神道碑銘幷序
이재 백공 신도비명병서
輔國崇祿大夫 行知中樞府事兼 吏曹判書致仕 奉朝賀 安東金履陽 撰
보국숭록대부 행지중추부사겸 이조판서치사 봉조하 안동김이양 찬
資憲大夫禮曹判書兼知經筵事弘文館提學全城李翊會 書
자헌대부예조판서겸지경연사홍문관제학전성이익회 서
輔國崇祿大夫行知中樞府事兼吏曹判書判義禁府事弘文館提學 世孫右賓客徐俊輔 篆
보국숭록대부행지중추부사겸이조판서판의금부사홍문관제학 세손우빈객서준보 전
我東僻在海隅人文開塞之運宜若不並中華觀於箕聖東來仲尼欲居文明之兆已喇焉由是安文成公當麗代佛教之漫葺聖廟宗孔氏門人彛齋白公入中原購得程朱全書與李益齋朴耻庵諸公講誦討論揚 厲發揮環海數千里章甫之士殆庶乎一變至道逮夫我朝眞儒繼緒雲興霞蔚斐然成章 先輩所云自朱子歿吾道東來者儘非夸毗之言也揚子雲曰聖人者天之譯也盖言 天道無為故惟聖代其工而明其道也推此而論之程朱孔氏之譯白公又程朱之譯也原原本本厥功誠不在文成之下矣然而世之等前世者往往知文成而不知有齋者可勝歎哉 謹按季益齋稗說曰國家伐叛問罪二十年士皆袵金革操弓矢讀書者十不一二六籍之傳不絕如絲大德間安文成公爲宰相葺國學修庠序薦紳之徒盡以通經博古為事白彛齋頤正從德陵留京師十年廣取程朱性理書以歸克廣其傳俾學者知有道學又按竹溪安氏家乘日白公在元朝求得程朱書以還與文成之胤竹屋子及同門權菊齋李東庵請公校正訓晦夫以益齋之賢親炙同德其言可信無疑殆文獻之徵孰加於是哉公字若軒藍浦人遠祖諱仲鶴爲新羅諫官著名高祖諱光宇官兵部員外郎生諱 汝舟樞密院左承宣翰林侍講學士知製誥生諱 景瑄吏部尚書左僕射生諱文節官吏部侍郎國子祭酒大司成寶文閣學士諡文簡號淡菴史稱立朝有志節文詞富膽為一時所推配星州李氏即公之考妣也公以宋理宗淳祐七年九月二十八日生登第于忠烈王朝公天資純厚有公輔器事忠宣王有志輔導忠宣不用其言屢官至僉議評理商議會議都監事加三重大匡封上黨君卒于忠肅王朝諡文憲與權文正溥禹文僖倬早遊安文成之門以性理之學自任時人稱之以東方夫子配安東金氏上洛府院君恂之女生一男二女 世廉淸風郡守追贈政堂文學平章事女適典理摠郎李達尊即益齋之子次適判樞奇仁傑世廉生二子內侍舍人咸正政堂文學平章事咸明曾玄以下牒存焉公享年七十七葬于羊角山西麓東幕洞坐甲原嗟呼追遠報本先王所以歸民德於忠厚之域也故先農先蠶咸有祀典農蠶不過衣食之原其崇報也如彼而乃於啓人文明人道之地昧昧焉不知其本寥寥焉不厚其報此不可聞於鄰國者粤在宣廟先輩諸公議以文成及公祀享于松京表獎其倡絕學之功値倭寇而止逮正廟丁巳權尙書常慎宰藍浦有感於邑有新安面面有武夷山朱子川謀於邑人營建朱夫子影堂於武夷山下以公配食因有尼之者已焉純廟丁卯京鄉多士翕然議同重建朱夫子影堂配享公及尤庵宋先生尋以公之門人李益齋宋先生門人權遂庵配焉自是當世之人稍稍知公之有功斯文焉獨恨公之言語文操必有以惠後學者而奈五百年之間兵變壓作孫裔不振箱篋間零金片王只有七絕一首傳誦者詩曰矮屋蕭條十肘餘焚香靜讀聖人書自從人爵生天爵情欲秋林日漸疎此雖寂寥乎短章超然有澄本源消物累之意宜乎其孫裔之傳世寶玩之也今其十九代孫東赫有文學篤於追先懼夫愈久而愈泯也歷謁搢紳求和其遺韻既又合同人齊展力將伐山石為碣爲碑屬余以銘誠意感人庸可辭請銘曰。
玄聖之衰程朱篤生異言者熄大道以明孰嗜是書載之而東昭洗舊染擊發羣蒙文成之傳益齋之師源泉放海普哉厥施長夜不曉噫復何為荒山片石尚或有辭。
崇禎紀元後四戊申(1848, 憲宗 14) 六月日立
//남포백씨 상당군 문헌공 이재 백이정(上黨君 文憲公 彝齋 白頤正) 가계//
시조 삼중대광 좌간의대부 익렬공 백중학(翼烈公 白仲鶴,810~886)
문하시중 정당문학 평장사 연정 백광원(烟亭 白光元)
5대조 통의대부 백사청(白思淸)
고조부 병부원외랑 백광우(白光宇)
증조부 좌승선 지제교 백여주(白汝舟)
할아버지 이부상서 좌복야 백경선(白景瑄)
아버지 보문각학사 문간공 담암 백문절(文簡公 淡巖 白文節,1208~1282)
어머니 정경부인 성주이씨, 참봉 이세주(李世柱)의 따님
동생 대호군 백효주(白孝珠)
배위 정부인 평양조씨, 평양군 조인규(趙仁規,1237~1308)의 3녀
상당군 문헌공 이재 백이정(上黨君 文憲公 彝齋 白頤正,1247~1323충숙왕10)
배위 정경부인 안동김씨, 중대광 판삼사사 문영공 김순(文英公 金恂,1258~1321)의 따님
안동김씨 중시조 상락충렬공 김방경(上洛忠烈公 金方慶,1212~1300)의 손녀
자 지청풍군사 증 평장사 백세렴(白世廉) 서천백씨
손자 내시사인 백함정(白咸正)
손자 정당문학 평장사 백함명(白咸明,1299~ ?)
사위 전리총랑 운와 이달존(雲窩 李達尊,1313~1340), 계림부원군 이제현(李齊賢)의 2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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