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성 지(濟州城 址), 옛 제주성터
제주시 이도일동 1421-34
제주성지(濟州城址)는 제주목 읍성을 가리킨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제주목 읍성의 둘레를 4,394척, 높이 11척이라고 기록하였는데,
수차의 개축과 증축을 거쳐 『탐라지』, 『동국여지지』 등
조선 후기 읍지에 이르면 읍성의 둘레가 5,489척으로 확장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제주읍성은 1910년대 이전까지 중축, 개축, 신축 등을 통해
읍성과 내부 관아 시설을 유지하다가
1926년 이후 일제의 정책으로
제주읍성의 성돌을 바다에 매립하면서 체성의 대부분이 훼손되었다.
1411년 태종11년 제주성 정비 기록이 태종실록에
1565년 명종20년 제주목사 곽흘(郭屹)이 성곽의 규모를 확대
1599년 선조32년 목사 성윤문(成允文)이 성벽의 높이를 높이다.
1780년 정조4년 목사 김영수(金永綬)가 산지천 범람에 따른 민가 피해로 간성(間城)을 축조
1925~1928년 제주항 개발로 성벽을 허물어 바다매립 골재로 사용하여 대부분 없어짐
제이각(制夷閣)
제이각은 왜적을 제압하기 위한 누각이다.
1599년(선조32) 제주목사 성윤문(成允文)이
왜적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하여 제주읍성 남문 동측 치성위에 건립하였다.
지형적으로 매우 가파르고 험한 낭떠러지의 높은 언덕으로
제주 읍성을 내려다보면 성안은 물론 주변의 언덕과 하천, 그리고 해안까지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다.
군사를 지휘하는 장수가 적의 동태를 관찰하며
유사시에 왜적을 무찌르기 위한 장대(將臺)로서의 기능도 가지고 있다.
1555년(명종10) 6월 을묘왜변으로 제주읍성이 포위당하는 등 위협을 느끼자,
1565년(명종20) 12월 제주목사 곽흘(郭屹)은 방어책으로
제주읍성의 동성(東城)을 동쪽으로 옮겨 축성하였다.
1599년(선조32) 제주목사 성윤문(成允文)은 임진왜란 직후 성곽을 높이고
격대(擊臺)와 포루(砲壘)를 설치하였으며
남성(南城)의 제일 높은 곳에 제이각을 세워 왜적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제주목 도성지도(濟州牧 都城地圖)에는 청풍대(淸風臺)로 기록되어 있어,
1850년 전후의 평화로운 시대에는 관리와 선비들이 경승을 감상하기 위해 즐겨 찿았던 곳이기도 하다.
濟州郷老堂再建功勞碑 濟州郷老堂建築碑
제주향노당재건공로비 제주향노당건축비
귤림추색(橘林秋色)
제주인 조천출신으로 제주의 아름다운 10가지 경치를 선정하여
영주십경(瀛州十景)이라 하고 근체시를 쓴 매계 이한우(梅溪 李漢雨,1818~1881)가 선정하였으며
그 당시 제주시 오현단 주변 관밀감 과원에는 감귤이 익은 아름다운 경치가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제주 전역에서 감귤을 재배하고 있어
가을 들녘 노랗게 항금빛으로 감귤이 익은 장관을 이르는 말이 되었다.
당시 매계(梅溪)는 감귤 익어가는 아름다운 경치에 취하여
귤림추색(橘林秋色) 이란 칠언율시를 남기었다.
黃橘家家自作林
황귤가가자작림==황금색 감귤 집집마다 저절로 숲을 이루니
楊州秋色洞庭心
양주추색동정심==동정호 강가에 있는 양주인 듯 가을빛이 깊었네
千頭掛月層層玉
천두괘월층층옥==가지 끝마다 걸린 달은 층층이 옥이요
萬顆含霜箇箇金
만과함상개개금==서리 머금은 열매는 낱낱이 금이로다
畵裏仙人乘鶴意
화리선인승학의==그림속 선인이 학을 탄 듯
酒中遊客聽鶯心
주중유객청앵심==술 취한 나그네가 꾀꼬리 소리 듣는 듯
世間欲致封侯富
세간욕치봉후부==세상에 부귀영화 이루려 하는 사람들
底事朱門桃李尋
저사주문도리심==무엇하러 권세가를 찾아다니는고
귤림서원(橘林書院)
조선 시대에 제주에 유배 되었거나 방어사(防禦使)로 부임했던
5현(五賢)인
충암 김정(沖菴 金淨), 규암 송인수(圭庵 宋麟壽), 동계 정온(桐溪 鄭蘊),
청음 김상헌(淸陰 金尙憲),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며 후학을 양성하던 유교 교육기관이었다.
남수각 터(南水閣)
산치천의 위에 만든 다리로 1
599년(선조 32) 목사 성윤문(成允文)이 북수구와 함께 이곳에 수구를 만들고
하상에는 홍예다리를 놓아 그 위에 초루를 세웠다.
남수각은 1652년(효종 3) 8월 태풍에 홍수로 무너져 버렸고
1720년 목사 이원진(李元鎭,1594~1665)이 복구공사에 착수하여 이듬해 봄에 준공을 보았다.
홍수 때마다 파괴 유실 축조가 반복되다가
언제부턴가 홍문만 축조하고 누정 건립은 하지 않게 되었다.
제이각(制夷閣)의 남쪽에 있다고 하여 흔히 남수각이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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