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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오현단(五賢壇), 향현사(郷賢祠), 귤림서원(橘林書院), 장수당(藏修堂)

구름에 달

by 碧巖 2025. 5. 14. 2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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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시 오현단(五賢壇), 향현사(郷賢祠)

제주시 이도일동 1421-34

향현사(郷賢祠)

이름난 학자, 충신 등의 공적과 덕행(德行)을 추모하기 위하여

집을 세우고 제사지내는 사당(祠堂).

중종 이후로는 서원과 같이 붕당 조직의 발생지로 변하여

폐단을 일으켰으므로

인종, 효종 때는 함부로 세우지 못하도록 하였다.

향현사는

1843년 헌종9년 제주목사 이원조(李源祚,1792~1871)가

조선조 세종때 한성판윤을 지낸 영곡 고득종(靈谷 高得宗,1388~1452)을 봉향하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1831년 순조31년 제주목사 이예연(李禮延,1767~1843)이

김진용(金晉鎔,1605~1663)을 영혜사(永惠祠)에 배향하였다가,

1849년 헌종15년에 제주목사 장인식(張寅植)이

김진용을 향현사로 옮겨 병향(竝享)하였다.

1871년 고종8년 대원군이 서원 사우의 대동철폐령에 의하여 철사된 후

제주 유생들이 고득종과 김진용의 덕행과 공적이 후세에 깊이 묻혀 잊어버리지 않기 위하여

오현단내에 향현사 유허비를 세우고 제향하였다.

 

향현사 유허비

우암, 충암 선생 적려유허비

尤庵宋先生 謫廬遺墟碑

우암송선생 적려유허비

冲菴金先生 謫廬遺墟碑

충암김선생 적려유허비

蘆峯金先生興學碑

노봉김선생흥학비

풍산인 제주목사 노봉 김정(蘆峯 金亻政,1670~1737)

조선후기 제주목사 목사 김정의 흥학비.교육에 끼친 공로를 기리기 위해 세워진 비이다.

처음에는 제주시 일도 2동, 지금의 선일건재(鮮一建材) 자리에 세워졌으나

1958년 삼천 서당(三泉書堂)이 헐리고 김정 흥학비마저 훼손될 상황에 놓였다.

이때 뜻있는 인사들이 오현단에 옮겨 세웠다.

높이는 91㎝이고, 너비는 위쪽이 50㎝, 아래쪽이 44㎝이며 두께는 위·아래 11㎝이다.

지금은 갓돌이나 댓돌도 없이 서 있으나 원래는 비각에 설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앞면에는 “노봉김선생흥학비(蘆峯金先生興學碑)”라고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先生諱 亻政  英廟乙卯 莅州有淸德 

선생의 이름은 정이다. 영조 10년(1735)에 본주에 부임하였는데 청백한 덕이 있었다.

 以興學爲己任 創三泉齋 

학문을 진흥시키는 것으로 자기의 책임을 삼아 삼천서당을 창건하였다.

凡水石品題 皆手澤也

여러 수석에 품평한 제시는 모두 선생께서 직접 쓴 글씨들이다.

 嗚呼先生乙巳 九月三日 卒于禾北館  追享永惠祠

아, 선생이 을묘년(1735 : 을사년이 아님) 9월 3일에 화북관에서 졸하니 영혜사에 추가로 배향되었다.

申未撤祀後 癸巳爰竪短碣 以寓追慕

신미년에 사당이 훼철된 후 계사년에 이르러 이에 조그만 빗돌을 세워 추모하는 뜻을 붙이니

距乙卯 一百五十九年 十月日也

저 을묘년으로부터는 159년이 지난 10월 일이다.

라고 새겨져 있다.

건립 연대가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김정이 제주 목사로 부임했던 을묘년(乙卯年)이 1735년(영조 11)인데,

159년 만이라고 했으므로 1893년(고종 30) 10월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노봉 김정(蘆峯 金亻政)은 영조 때 제주 목사로 있으면서

삼천서당(三泉書堂)을 지어 평민의 자제들에게 배움의 길을 터놓았고,

화북포의 항만공사(港灣工事)를 완성하여 선박의 안전을 도모하는 등

선정을 베풀어 제주도민에게는 잊을 수 없는 인물이다.

                 증조부 한성우윤 김응조(金應祖)

                    조부 증 이조참의 김시행(金時行)

                    부친 비변랑 김휘봉(金輝鳳)

                    모친 증 숙부인 봉화금씨, 참봉 금성휘(琴聖徽)의 따님

                            풍산인 제주목사 노봉 김정(蘆峯 金亻政,1670~1737)

 

오현단(五賢壇)

1971년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1871년(고종8)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귤림서원(橘林書院)이 훼철된 후,

1892년(고종29) 제주 유림들의 건의에 의해

귤림서원에 배향되었던 오현(五賢)을 기리기 위해 마련한 제단(祭壇)이다.

귤림서원은

1578년(선조11) 판관 조인후(趙仁後)가 1521년(중종16) 10월 제주에 유배되었다가 사사된 김정(金淨)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그의 적거지에 충암사(沖庵祠)를 세운 데서 비롯되었다.

그 후 1665년(현종6) 판관 최진남(崔鎭南)이 충암사를 이곳으로 옮겨 사(祠)라 하고, 이미 1659년(효종10) 제주 김진용(金晉鎔)의 건의에 의해 이회(李禬) 목사가 이곳에 세운 장수당(藏修堂)을 재(齋)로 하여 귤림서원이라 현액하였다.

오현(五賢)은 김정을 비롯하여, 1601년(선조 34) 소덕유(蘇德裕)·길운절(吉雲節) 역모 사건 때에 안무어사(安撫御史)로 제주에 파견되었던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1669년에 배향], 대정현에 유배되었던 동계(桐溪) 정온[鄭蘊: 1669년에 배향]과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95년에 배향], 제주목사를 역임한 규암(圭庵) 송인수[宋麟壽: 1682년에 배향]를 말한다.

이곳에는 지금도 오현의 위패를 상징하는 조두석(俎豆石)이 놓여 있다. 그리고 이 유적 내에는 ‘증주벽립(曾朱壁立)’의 마애명과 귤림서원묘정비(橘林書院廟庭碑), 향현사유허비(鄕賢祠遺墟碑) 등이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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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음 김상헌(淸陰 金尙憲) 선조34년 서기1601년 안무어사 좌의정 증시 문정

규암 송인수(圭菴 宋麟壽) 중종29년 서기1534년 제주목사 대사헌 증시 문충

충암 김정(冲菴 金淨) 중종15년 서기1520년 제주유배 형조판서 증시 문간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 숙종15년 서기1689년 제주유배 좌의정 증시 문정

동계 정온(桐溪 鄭蘊) 광해군 6년 서기 대정유배 이조참의 증시 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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