귤림서원(橘林書院)
제주시 이도일동 1421-34
귤림서원(橘林書院)
1576년(선조9)에 제주판관 조인후(趙仁後)를 중심으로 한
지방유림의 공의로 충암 김정(冲菴 金淨)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충암묘(冲菴廟)를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666년에 판관 최남진(崔南鎭)이 제주시 이도동으로 이건하였으며,
1683년에 동계 정온(桐溪 鄭蘊), 청음 김상헌(淸陰 金尙憲),
1678년에 규암 송인수(圭菴 宋麟壽)를 추가 배향하였고,
1682년(숙종8)에 ‘귤림’이라고 사액되어 서원으로 승격되었다.
1695년에 송시열(宋時烈), 이회(李檜)를 추가로 배향하여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그 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5)에 훼철되어 복원하지 못하였으며,
1892년에 지방유림이 오현단(五賢壇)과 단비(壇碑)를 쌓아 매년 향사를 지내오다가,
1910년부터 중단되었다.
현재 오현(五賢)은 충암 김정(金淨), 규암 송인수(宋麟壽),
청음 김상헌(金尙憲), 동계 정온(鄭蘊), 우암 송시열(宋時烈)이다.
현재 오현단(五賢壇) 은 제주도 기념물 제1호로 지정되어 있다.
또한, 귤림서원이 들어선 장소가
예전에 감귤을 진상하기 위해 만들어진 과원(果園)이 있었던 곳이었고,
‘육적회귤(陸績懷橘)’의 고사로 효(孝)의 정신을 고취시키는가 하면,
중국 초(楚)나라 때 시인 굴원(屈原)이 <귤송(橘頌)>을 지은
정신과 사상이 오현 인물들의 공통적 관심사이기에 자연스레
‘귤림(橘林)’을 서원의 명칭으로 삼아 숙종 8년(1682)에 정식 사액사원(賜額書院)으로 인정받기에 이른다.
충암 김정(冲菴 金淨) 중종15년 서기1520년 제주유배 형조판서 증시 문간
규암 송인수(圭菴 宋麟壽) 중종29년 서기1534년 제주목사 대사헌 증시 문충
청음 김상헌(淸陰 金尙憲) 선조34년 서기1601년 안무어사 좌의정 증시 문정
동계 정온(桐溪 鄭蘊) 광해군 6년 서기 대정유배 이조참의 증시 문간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 숙종15년 서기1689년 제주유배 좌의정 증시 문정
橘林書院 廟庭碑記
귤림서원 묘정비기
장수당(藏修堂)
1660년(현종1년) 제주진사 김진용(金晋鎔)의 건의로
제주목사 이괴(李襘)가 제주 유학들을 교육시키는 학사(學舍)의 장소로 '장수당(藏修堂)'을 지음
장수당(藏修堂)은 1660년 현종1년 제주진사 김진용(金晋鎔)의 건의로
제주목사 이괴(李襘,1607~1666)가
세종 때 한성판윤을 지낸
문충공 영곡 고득종(文忠公 靈谷 高得宗,1388~1452)의 옛터에 세웠던 10칸의 강당이다.
이괴(李襘) 목사의 장수당기나
대제학 용주 조경(龍洲 趙絅,1586~1669)의 장수당기에는
목재를 구하고 역부를 고용하는 것까지 일체의 공사를 맡아
장수당을 지은 김진용(金晋鎔)의 업적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충암사(충암 김정의 사묘)가 장수당 남쪽으로 옮겨진 이후
명실상부한 서원인 귤림서원이 세워지게 되었다.
귤림서원은 1871년 고종8년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으며,
1875년 고종12년에 제주목사 이희충(李熙忠)이 장수당 옛 터에
경신재(敬信齋)를 세워서 선비의 자제들이 학업을 닦을 수 있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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