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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시 용두산공원, 부산 시민의 종,백산 안희재

구름에 달

by 碧巖 2016. 7. 7. 2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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龍頭山 公園용두산공원,  Yongdusan Park.

 

부산광역시 중구 용두산길 35-18[광복동 21-2]

부산광역시 중구 광복동 용두산 일대에 있는 공원.

 

용두산 주변은 조선 시대에 초량 왜관이 있었는데, 1876년에 개항하면서 일본인 전관 거류지가 되었다.

1899년 용두산 공원(龍頭山公園) 부지 내에 신사가 설치되었다.

1915년부터 1916년까지 일본인들을 위한 휴식 공간의 필요로 인해 이곳에 공원이 조성되었다.

194013일 용두산 공원으로 고시되었다.

 

19481117일 화재가 발생하여 용두산 공원 내에 있던 신사가 소실되어 철거하였으며

1954년에는 대화재가 발생하여 공원에 있던 판자촌이 전소하였다.

195712월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의 호를 따 우남 공원이라고 명칭을 변경하였다가,

196629일 용두산 공원으로 명칭을 환원하였다.

1972626일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25호로 지정되었다.

1973년 부산 타워가 건립되었다.

1993522일 부산광역시 기념물에서 해제되었다.

 

 

 

 

 

 

 

 

 

 

 

 

 

용두산 공원은 국유지 6781, 시유지 4,480.8, 사유지 3,857.2로 총 69119로 이루어져 있다.

용두산 공원은 부산 근대 역사관 쪽에서 들어오는 길과 광복로를 통해 에스컬레이터로 들어오는 길이 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면 용두산 미술의 거리가 있고, 그 동쪽에는 체육 시설이 있다.

미술의 거리를 지나 북서쪽으로 가면 계단이 나오는데, 계단의 동쪽에는 초량 왜관비가 있다.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공원비가 있고 공원의 가운데 광장이 있으며,

중앙에는 이순신 장군 동상[높이 12m·3.8m·길이 3.8m]이 있다.

 

광장의 남쪽에는 꽃시계[직경 5m]와 종각[높이 11.3m·부지 321·면적 60.84], 교육 헌장비가 있고,

동서쪽에는 백산 안희제 선생의 흉상[높이 4m·너비 2.45m],

구 충혼탑[높이 7m·넓이 10m·3m], 부산 시민 헌장비가 있다.

북쪽으로는 용탑[높이 4.2m·1.45m]과 전시관, 부산 타워[높이 120m], 팔각정이 있다.

이외에도 문학비 9개로 이루어진 시의 거리, 파고라, 정수사, 주차장 등이 있다.

 

용두산 공원은 부산광역시 중구 광복동 21-2번지에 있다.

용두산의 지명은 산의 모양이 용이 머리를 들고 바다를 건너는 듯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는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매해 5월에 연등 축제, 12월에 제야 시민의 타종식 행사 등이 열린다.

부산시설공단 용두산공원사업소에서 관리하고 있다.

공원은 24시간 이용이 가능하며, 주변에는 보수동 책방 골목, BIFF 광장, 남포동, 자갈치 시장 등이 있다.

 

 

                         부산 타워[높이 120m]와  이순신 장군 동상

 

부산 시민의 종  종각

 

 

백산 안희재.

선생은 1885년 경남 의령군 부림면 입산리에서 부친 안발(安撥)과 모친 창녕성씨(成氏)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선생의 본관은 강진(康津). 號는 백산(白山)이다.

 

어려서부터 매우 영민하여 문리를 쉽게 터득하고 문장에도 뛰어났다.

일제의 침략으로 나라에 위기가 닥치자,

신학문을 익혀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고 국권을 회복하고자

1905년 보성전문학교 경제과에 입학하였다가 이듬해 양정의숙(養正義塾)으로 전학하여 선진 학문을 접목하였다.

1907년 교남학우회(橋南學友會)를 조직하고,

1908년 영남지방 유지들과 교남교육회를 조직하여 잡지 발행을 통한 민중계몽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사립학교 설립에 필요한 재원확보에 힘썼다.

동래 구포에 구명학교와 의령에 의신학교를 설립하고,

이듬해인 1908년 자신의 향리인 입산리에 창남학교를 설립하여 민족교육과 민중계몽운동을 실시하였다.

일제 강점과 식민지 지배가 가시화 되는 상황에서 1909년 서상일. 김동삼 둥 영남지역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17세부터 30세미만 청년들로 조직된 대동청년당을 결성하였다.

선생은 2대 단장으로 활약하였다.

 

일제강점기가 시작되던 해 선생은 양정의숙을 졸업하였지만

독립운동에 투신하고자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톡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14년 귀국하여 독립운동 자금 조달을 목적으로 부산 중앙동에 백산상회를 설립하였고,

1916년 경에는 서울. 대구. 안동. 원산. 봉천 등지에 지점과 연락사무소를 설치하여 활동지역을 확대하였다.

1919년 3.1 운동이 발발하자 독립선언서를 등사하여 영남의 각지에 배포하였고, 11월에는 기미육영회를 결성하였다.

이 회는 우수한 청소년을 선정하여 국내.외에 유학시켜 조국광복과 민족국가 건설의 인재양성에 그 목적을 두었다.

상하이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독립운동 자금을 모아 수시로 전달함으로 임정의 재정과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후원하였다.

1920년 동아일보 창립 발기인으로 참여하였고 동아일보 부산 지국장으로 활약하기도 하였다.

1926년 최남선이 창간한 시대일보를 동지들과 함께 인수하여 중외일보로 변경하여 발행하여

1931년 6월 종간될때까지 사장. 발행인 겸 편집인으로 활동하였다.

 

1931년 10월에는 단군을 신봉하는 대종교에 입교하였고

 발해의 고도인 동경성 일대에 토지를 구입하여 1933년 발해농장을 설립. 경영하였다.

만주로 이주한 한국 농민들을 대상으로 토지를 분배하여 경작케 함으로써 3백여호를 유치하였고

자제들의 교육을 위해 발해보통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을 맡아 항일독립정신을 고취시켜 니갔다.

1934년 대종교 3세 교주 윤세복을 비롯한 간부들과 대종교 총본사가 동경성으로 옮겨오자

교무행정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포교활동도 활발하게 하였다.

교세가 확장되고 교도들의 항일정신이 고조되어 독립운동세력으로 발전하여 가자 일제는 위협을 느껴

1942년 11월 19일 교주 윤세복을 비롯한

21명의 국내.외 대종교 지도자들을 일제히 검거하여 대종교 민족운동을 탄압하였다.

이것이 임오교변이다.

이날 선생은 신병 치료차 귀향해 있던 중 일경에게 피포되어 만주 복단강성 경무청으로 이송 수감되었다.

혹독한 고문과 회유를 받았지만 끝내 굴복하지 않고,

선생은 1943년 8월 3일 고문후유증으로 인한 병보석으로 출감한지 3시간만에 복단강성 영제의원에서 순국하셨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국가보훈처 자료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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