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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칠궁, 사적 149호

구름에 달

by 碧巖 2016. 8. 17. 2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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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종로구 궁정동에 자리 잡은 칠궁

원래 이 자리는 1724(경종 4) 8월 영조가 왕위에 오른 뒤,

어머니가 후궁 출신의 빈()이었기 때문에 국가적인 봉사(奉祀)의 은전을 받지 못한

영조의 생모인 최숙빈(崔淑嬪)을 추념하여 사당을 짓고 봉사한 육상궁(毓祥宮)이 있던 곳이었다.

그 후 국운이 기울어진 1908(융희 2), 각 묘전(廟典)의 제전(祭典)을 간소하게 하기 위하여

여러 곳에 흩어져 있던 왕 또는 추존왕의 사친(私親:모친)을 모신 다섯 사당을 이곳에 옮겨 육궁(六宮)이라 하였고,

이후 고종의 후궁이며 영친왕 은()의 생모인 순비 엄씨(淳妃嚴氏)의 사당을 이곳에 옮겨 칠궁이라 하였다.

칠궁은 왕을 낳은 일곱 후궁의 신주(神主)를 모신 사당(신당)이 잇는 곳이다.

이곳에는 왕비가 아니면서 왕을 낳으신 후궁으로 귀하신 몸이지만

대부분은 돌아가신 다음에 추존 된 경우라고 한다.

많은 후궁이 있었지만 일곱 명 만을 모셔놓은 이유는 그녀들이 왕을 낳았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7명의 왕 또는 추존왕의 모친을 모신 신궁.

1. 연호궁(延祜宮) 영조의 후궁이며 추존왕 진종(효장세자)의 생모인 정빈 이씨의 신궁

2. 육상궁(毓祥宮) 숙종의 후궁이며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의 신궁.

3. 덕안궁(德安宮) 고종의 후궁이며 영친왕의 생모인 순헌황귀비 엄씨의 신궁

4. 저경궁(儲慶宮) 선조의 후궁이며 추존왕 원종의 생모인 인빈 김씨의 신궁.

5. 대빈궁(大嬪宮) 숙종의 후궁이며 경종의 생모인 희빈 장씨의 신궁.

6. 선희궁(宣禧宮) 영조의 후궁이며 추존왕 장조(사도세자)의 생모인 영빈 이씨의 신궁.

7. 경우궁(景祐宮) 조선 정조의 후궁이며 순조의 생모인 수빈 박씨의 신궁.

요렇게 일곱분의 신주(神主)가 모셔져있다 

 

 

 

松竹齋風月軒 송죽재와 풍월헌

 

 

風月軒 풍월헌

松竹齋 송죽재

 

삼락당

 

 

1. 연호궁延祜宮

<'연호(延祜)''복을 맞이한다'는 의미로. '()''맞이하다', '()'''이란 뜻이다.

육상궁과 같은 건물에 있다.

진종(眞宗: 영조의 장자)의 생모인 정빈 이씨(靖嬪李氏)의 신주를 모셨다.

정조는 즉위 후 효장세자(孝章世子)를 진종으로 높이고,

1778(정조 2)년에 정빈을 위해 경복궁 서북쪽에 사당을 세워 연호궁이라 했다.

1870(고종 7)년에 그 신주를 육상궁 안으로 옮겨와 숙빈 최씨의 신주와 함께 모셨다.

현재 육상묘(毓祥廟)와 연호궁(延祜宮) 현판은 모두 한 건물에 걸려있다.

공간이 협소한 까닭에 연호궁의 현판은 추녀 밑에,    육상묘의 현판은 그 뒤인 신실 문 위쪽에 걸려 있다.

 

2. 육상궁毓祥廟/

<'육상(毓祥)''상서로움을 기른다'는 의미. '()'()과 뜻으로 '기른다' 는 뜻이다.

내삼문(內三門)을 지나 동쪽 대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있다.

연호궁(延祜宮)과 같은 건물이다.

1725(영조 1)년 건립하여 영조의 생모이자 숙종의 후궁인 숙빈 최씨(淑嬪崔氏)의 신주를 모셨다.

처음에는 숙빈묘(淑嬪廟)라고 하였다가, 1744(영조 20)3월 육상묘(毓祥廟),

1753(영조 29)년부터는 육상궁으로 불렀다.

1773(영조49)년 영조의 어진 2본과 초본 1본을 이 곳에 봉안했다.

1882(고종 19)년 화재로 소실된 것을 이듬해 다시 지어 지금에 이른다.

 

 

 

 

 

 

 

 

 

 

 

 

 

 

 

 

3. 덕안궁德安宮

<'덕안(德安)'이란 '덕이 있고 편안하다'는 의미이다>

내삼문을 지나 서쪽 삼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있다.

영친왕 이은(李垠,1897~1970)의 생모이자 고종의 후비인 순비 엄씨(淳妃嚴氏)의 신주를 모셨다.

1897년에 순비가 아들을 낳자 경운궁(지금의 덕수궁) 안에 따로 경선궁(慶善宮)을 세우고

새로운 거처로 하사했는데, 순비 사후에 덕안궁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929년에 지금 위치로 옮겼다.

현판의 '()'자는 속자로 써서 '()'자 위에 '()'자가 빠져있다.

 

4. 저경궁儲慶宮

한성부 남부 회현방에 있던 궁으로 선조의 아들인 정원군이 살던 곳이다.

정원군은 아들이 인조로 등극한 후 원종으로 추존되었다.

이곳 언덕은 소나무가 울창하여 송현궁(松峴宮)’이라 불렀으며,

영조 때 원종의 어머니 인빈 김씨의 신위를 새로 봉안하면서 저경궁이라 했다.

인빈 김씨의 신위는 순종 때 육상궁(칠궁)으로 옮겼다.

 

-서모의 은혜를 잊지 않다-

1555년에 태어난 인빈 김씨는 김한우의 딸로 일찍이 궁궐에 들어왔다.

명종비 인순왕후 덕에 14세의 나이로 선조의 후궁이 되었다.

처음 소용에 봉해졌다가 귀인이 되었고, 후에 으로 승격되었다.

인빈 김씨는 공빈 김씨가 산후병으로 죽은 해(1577)부터 17년 동안

 45, 의안군 · 신성군 · 정원군 · 의창군과 정신 · 정혜 · 정숙 · 정안 · 정휘옹주를 두었다.

선조가 인빈 김씨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장자 의안군에게 소공주궁을 크게 지어 하사할 정도였다.

 (소공주궁은 현재 서울시 중구 조선호텔 자리에 있던 궁이다.)

 

공빈 김씨는 임해군과 광해군을 낳고 25세에 죽었다.

인빈 김씨는 생모를 일찍 여읜 광해군을 옹호했는데

광해군은 내가 서모(庶母)의 은혜를 받아서 오늘이 있게 된 것이니, 그 의리를 감히 잊지 못한다.”라고 했으니,

그녀의 소생들은 모두 탈이 없었다.

그러나 인빈 김씨가 죽은 후 둘째 아들 신성군의 양자로 들어온 능창군(정원군의 아들)이 역모에 몰려 자살했고,

그 때문에 1619년 화병으로 셋째 아들 정원군이 죽었다.

이에 1623년 선조의 손자이자 정원군의 첫째 아들인 능양군이 반정을 일으켜 왕이 되니 인조다.

 

 

5. 대빈궁(大嬪宮)

한성부 중부 경행방에 있던 궁으로 숙종의 후궁이며 경종의 생모인 희빈 장씨의 사당이다.

처음에는 장씨의 신주를 정동 사저에 모셨으나,

경종이 왕위에 오른 후에 희빈 장씨를 옥산부대빈으로 추존하면서 사당을 건립하여 대빈궁이라 불렀다.

1908년에 육상궁으로 옮겨져 칠궁 내에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경성측후소가 들어섰으며, 201011월까지 대빈궁길이라는 길 이름으로 남아 있었다.

 

 

6. 선희궁宣禧宮

<선희(宣禧)''복을 널리 편다'>

경우궁(景祐宮)과 같은 건물이다.

장조(莊祖: 사도세자)의 생모인 영빈 이씨(英嬪李氏)의 신주를 모셨다.

영빈이 1764(영조 40)년 세상을 떠나자 백운동에 그 시호를 딴 의열묘를 지어 모셨고,

1788(정조 12)년에 그 이름을 선희궁으로 높였다.

1908(고종 7)년에 육상궁 안으로 옮겼다가 다시 백운동으로 옮겼다.

1908(융희2)년에 신주를 옮겨와 경우궁 수빈 박씨의 신주와 합사했다.

 

 

7. 경우궁景祐宮

<'景祐(경우)''큰 복'을 의미이다. '()''()'와 같으며, '()'''이라는 뜻이다.

덕안궁 뒤편에 있다.

선희궁(宣禧宮)과 같은 건물로, 정조의 후궁이자 순조의 생모인 수빈 박씨(綏嬪朴氏)의 신주를 모셨다.

수빈이 세상을 뜨자 1823(순조 23)년 창경궁 도총부(都總府) 안에 혼궁(魂宮)을 지어 현사궁(顯思宮)이라 불렀고,

이듬 해 양덕방(陽德坊)의 용호영(龍虎營)으로 옮긴 후 경우궁으로 고쳐 불렀다.

1908(융희 2)년 육상궁 안으로 옮겨와 현재에 이른다.

 

현재 경우궁(景祐宮)과 선희궁(宣禧宮) 현판은 한 건물에 각각 앞 뒤로 걸려 있다.

한 곳에 두 분의 신위를 모시다 보니 공간이 좁은 때문인가?

 

원래는 1724(영조 원년)에 지은 육상궁만 있던 터였으나

1908(순종 2) 영우궁, 저경궁, 대빈궁, 선희궁, 경우궁이 옮겨왔고

1929년 덕안궁이 옮겨오면서 7명의 신위를 모시게 되어 칠궁이 되었다.

세계문화유산인 종묘와 함께 모사제도의 귀중한 표본으로 인정받아 사적 제149호로 지정되었다.

 

칠궁은 일 년에 한 번 문이 열리면 그날이 칠궁제 제를 지내는 날이라고 한다.

이분들은 일 년에 한번 문이 열리는 날을 제외하고는 바깥구경을 할 수가 없는 불운의 여인들이다.

살아서는 구중궁궐 깊은 곳에서 숨을 죽이며 외로움과 싸우다가 죽어서도 왕을 낳으셨다는 귀한 몸이 되어

칠궁 깊숙이 몸을 숨기고 세상 빛과 담을 쌓고 외로움과 싸우고 있는 것이다.

살아서도 훨훨 날아보지 못한 한()을 가지고

죽어서도  서로의 상처를 가슴으로 안고 외로움과 한()

일 년에 한번 칠궁 문이 열리는 날 세상 밖으로 날려 보내지 않을까?

이들은 분명 행운의 여인들이지만 살아서는 그 영광을 거의 못 보았다.

 

순조의 모친 수빈 박씨를 제외하고는 모두 아들이 왕이 되기 전에 사망했다.

 

후궁이란 첩이다.

조선의 신분제도는 부계가 아닌 모계승계를 원칙이었기에

아버지가 양반이라도 어머니가 천민이면 그 자식도 천민이다.

가부장 중심의 조선사회에서 유독 신분제도만 모계 우선하였으니

조선은 사대부 중심의 국가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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