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창공원은 과거 효창원(孝昌園)으로 불렸다.
조선 22대 왕 정조의 장자로 세자책봉까지 받았으나 5세의 어린 나이로 죽은 문효세자의 무덤이 있던 곳이다.
처음에는 효창묘라 했으나 그 후 왕가의 묘를 몇 기 더 모시고 1870년(고종7년) 효창원으로 승격됐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을 빌미로 일본군이 불법적으로 이곳에 주둔하면서 한동안 효창원의 흑역사(黑歷史)가 이어진다.
1924년 일제는 효창원의 일부를 공원용지로 책정, 일반인의 유람지로 허용했다.
1940년 효창원은 정식 공원으로 지정되고
1945년 3월 일제는 이곳 묘들을 강제로 서삼릉(西三陵‧고양시)으로 이장했다.
광복 이듬해 백범 선생은 일본 땅에 묻혀 있던 이봉창(1901-1932), 윤봉길(1908-1932), 백정기(1896-1934) 등
삼의사(三義士)의 유해를 이곳에 모셨다.
안중근(1879-1910) 의사의 가묘도 나란히 세웠다.
묘단 아래에는 '유방백세(遺芳百世·꽃다운 이름이 후세에 길이 남다)'라는 네 글자를 새겨 넣었다.
1948년에는 임시정부 요인인 이동녕, 차이석, 조성환 선생의 유해를 이곳에 모셨다.
하지만 선생조차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우익 테러에 의해 살해돼 1949년 7월 5일 효창공원에 묻히게 된다.
이렇게 효창공원에는 삼의사 묘역, 임정요인의 묘역, 백범 묘역 등 세 곳의 묘역이 한곳에 모여 있다.
비록 왕조의 무덤은 사라졌지만
건국의 주역이 된 선열들의 유해만으로도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커다란 역사적 무게감을 준다.
백범 선생의 흔적은 비단 공원 내부에만 머물지는 않는다.
1947년 백범 선생은 효창공원과 불과 10분 거리인 용산구 원효로에 ‘건국실천원양성소’를 설립해
인재 양성에 나서는 등 자주독립국가 건설에 사활을 걸었다. 물론 이 역시 선생 서거 이후 잊히고 만다.
효창공원에 묻힌 순국선열 7위의 영정을 모신 의열사는 1990년 건립됐으나
관리상의 문제로 의열사 제전 등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항상 문을 닫아두었다.
의열사 건립 이후 상시 개방까지 26년이 걸린 셈이다.
義烈門의열문
義烈祀의열사
三義士삼의사
모던보이 李奉昌이봉창(1901-1932)
梅軒 尹奉吉 매헌 윤봉길(1908-1932)
鷗波 白貞基 구파 백정기(1896-1934)
臨時政府 臨政要人임시정부 임정요인
石吾 李東寧 석오 이동녕(1869(고종 6)∼1940)
晴簑 曺成煥 청사 조성환 (1875(고종12)∼1948)
東巖 車利錫 동암 차리석(188년~1945년 9월)
白凡金九백범김구, 石吾李東寧석오이동녕, 李奉昌이봉창, 梅軒尹奉吉매헌윤봉길, 白貞基백정기
東巖車利錫동암차리석, 晴簑曺成煥청사조성환, 白凡金九백범김구, 石吾李東寧석오이동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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