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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삼의사의 묘.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안중근의사 가묘, 효창공원,

구름에 달

by 碧巖 2016. 8. 21. 2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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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창공원 삼의사의 묘

1946년 박열, 이강훈 등 아나키스트계 독립 운동가들이

삼의사 유골 수습을 촉구하여 '삼의사국민장봉장위원회'를 발족하고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세 의사의 유골을 일본으로부터 봉환하여

76일 국민장(國民葬)으로 치렀으며 현재 효창공원 삼의사 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훌륭한 명성이 후세에 영원히 전해지라는 유방백세

 

 

 

 

안중근의사의 터

 

李奉昌 이봉창1901810~19321010

 

1932, 일본 도쿄에서 일왕의 행렬을 향해 수류탄을 던지고 체포되어 순국했다.

한인애국단의 첫번째 거사였던 이봉창의 의거는 예상 밖의 파문을 일으켰다.

중국의 각 신문들은 한국인의 애국적 기개에 대해 매우 고무적으로 대서특필했으며,

당시 침체상태에 빠져 있던 임시정부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 주었다.

1918년 용산철도국 소속의 만선철도(滿鮮鐵道) 기차운전견습생으로 근무하다가 1

9193·1운동을 목격하면서 강렬한 민족의식을 갖게 되었으며, 독립운동에 헌신할 것을 스스로 서약했다.

이후 일본을 방황하다가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가서 김구의 지도 아래 거사를 수행했다.

 

 

尹奉吉

 

독립운동가. 本名 우의(禹儀). 號 매헌(梅軒).

청년 시절 농촌 계몽운동에 힘쓰다 국외 독립운동 소식과 광주학생운동에 영향을 받고

1930년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으로 망명했다.

이후 여러 활동을 거치고 나서, 1932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한인애국단의 일원으로 김구의 명령을 받고

상하이[上海] 훙커우 공원[虹口公園]에서 개최된 일본의 전승축하기념식에 참석한 인사를 향하여 폭탄을 던져

상하이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타(河端貞次) 등을 즉사,

3함대 사령관 노무라(野村吉三郞), 9사단장 우에다(植田謙吉),

주중공사 시게마쓰(重光葵), 총영사 무라이(村井) 등에게 중상을 입혔다.

거사 직후 체포되어 525일 상하이 파견군 사령부 군법회의 예심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1118일 일본 오사카(大阪) 위수형무소로, 1218일 가나자와(金澤) 형무소로 옮겨져 19일 총살되었다.

이 거사는 임시정부가 중국 국민당의 장제스로부터 지원을 받아 항일운동을 활발하게 이어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충남 예산군 덕산면에 동상과 기념관이 있다.

 

白貞基 백정기 (1896119193465)

전북 정읍 출신으로 일제 강점기 아나키스트 계열의 독립운동가이다. 號는 구파(鷗波)이다.

19333월 상하이 훙커우(虹口)에서 정현섭, 원심창, 이강훈 등의 아나키스트 동지들과

중국 주재 일본 공사 아리요시 아키라(有吉明)를 암살하려고 모의하다가

육삼정(六三亭)에서 체포되어 나가사키로 이송되어 나가사키 법원에서 백정기 의사와 원심창은 무기징역을,

이강훈은 징역 15년 형을 선고받았는데 백정기 의사는 이사하야 감옥에서 복역하던 중 옥사(獄死)하였다.

 

1896119일 전북 부안군 동진면 하장리(현재 부안읍 신운리)에서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19027세때 정읍군 영원면 갈선리(현재 영원면 은선리)로 이사하여 이곳에서 성장했다.

한문을 공부, 19세 때 큰 뜻을 품고 서울로 올라왔다.

1919년 서울로 올라와 3·1 운동을 목격하고

독립선언문과 전단을 가지고 고향에 내려가 동지를 규합(糾合)하여 항일운동을 이끌었다.

19198월 동지들과 경인(京仁)간의 일본 군사시설 파괴를 공작하다가 경찰에 체포되었으나

본적지와 행적을 속여 나와서 만주 봉천(奉天)으로 망명하였다.

그 후 각지를 몰래 다니며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하려 여러 차례 국내에 잠입해 활동하다가

1920년 서울 중부경찰서에 구속되기도 하였다.

그 후 중국 베이징으로 망명, 일본 군사시설 파괴에 전력하였으며,

1924년 일본 천황을 암살하려고 도쿄에 갔으나 실패하였다. 같은해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설립에 관여했다.

1924년 상하이로 가서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 화암(華巖) 정현섭(鄭賢燮) 우근(友槿) 류자명(柳子明),

회관 이을규(李乙奎), 우관(又觀) 이정규(李丁奎) 형제,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등과 함께

재중국 무정부주의자연맹을 결성하는 데 참가하여, 조선 대표로 출석하였다고 우관문존년보에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기관지인 정의공보를 비밀리에 발행하였는데, 그 잡지는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이 때 이회영·신채호의 영향으로 무정부주의에 빠져들게 되었다.

그리하여 19239월 중국 후난성(湖南省)둥팅호(洞庭湖) 근처에 무정부주의가 추구하는 이상적인 농촌사회 건설에 참여하였다.

1924년 여름, 일본 동경에 잠입해 수력공사장·주요건물 등을 폭파하기로 했으나 여의치 못해 북경으로 귀환하였다.

 

19249월 일본관헌의 탄압을 피해 상해(上海)로 가서 정화암 등과 함께

영국인이 경영하는 철공장에 들어가 폭탄제조기술을 익히면서 노동문제에 관한 이해가 깊어졌다.

1925년 상해에서 5·30 총파업이 일어나자 중국인 무정부주의자들과 더불어 노동자운동을 전개해

10여만 명 단위의 대노동자조합을 만들어 독립운동의 방편으로 이용할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다.

 

1927년 푸젠성(福建省)취안저우(泉州)에서 민단편련처(民團編練處)를 조직해 농촌의 자치조직을 통해

무정부주의운동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노력하였다.

19285월 초에는 일본상품 배격운동을 지도했고,

5월 말에는 아시아 각국의 무정부주의자들이 모여 결성한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東方無政府主義者聯盟)에 한국대표로 참석하였다.

1930년 북만주로 가서 북만주에 있는 한국무정부주의자연맹의 동지들과

자유혁명자연맹(自由革命者聯盟)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민중훈련에 힘썼다.

 

폐결핵으로 사경을 헤매었으나 유자명 등 여러 아나키스트 동지로부터 후원을 받아

1929년부터 1930년까지 약 1년간 공동병실에서 요양생활을 하여 완치되었다.

 

19319월 한국·중국·일본의 무정부주의자들이 모여 자유혁명자연맹이라는 항일구국연맹을 결성하고

적의 국경기관 및 수송기관의 파괴·요인 사살·친일파 숙청 등을 목표로

1932비티피(BTP)’라는 흑색공포단(黑色恐怖團)을 조직해 배일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무렵 상해에는 각지에서 무정부주의자들이 모여들고 있었는데,

이회영·정협섭과 함께 이들을 규합,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을 결성하였다.

 

1932429일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 공원 폭탄투척 사건 당시에

구파 의사도 동일한 시도를 준비했었으나 입장권을 구하지 못해 실패하였다.

 

19333월 상하이 훙커우(虹口) 요정 육삼정(六三亭)에서

일본주중대사인 아리요시(有吉明)

일본정객 참모부원들을 위시한 친일중국정객과 군인 100여 명을 초대해 연회를 연다는 소식을 듣고

정현섭(鄭賢燮), 원심창(元心昌), 이강훈(李康勳) 등의 아나키스트 동지들과

중국 주재 일본 공사 아리요시 아키라(有吉明)를 암살하려고 모의하다가 육삼정(六三亭)에서 체포되었다.

당시 상해 일본 총영사 보고문에서 일본 경찰의 세밀한 사전 체포계획이 세워진 것으로 추정컨대

아마 의거가 사전에 누군가에게 누설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후 나가사키로 이송되어 나가사키법원(長崎法院)에서 백정기 의사와 원심창은 무기징역을,

이강훈은 징역 15년 형을 선고받았다. 백정기 의사는 이사하야 감옥에서 복역하던 중 지병으로 옥사(獄死)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李奉昌 이봉창 효창공원에 동상(1901810~19321010일)

 

일왕 히로히토(裕仁) 암살 수류탄 투척

도쿄 고지마치 구(麴町區) 밖 사쿠라다몬(桜田門) 앞에서 시민을 가장하여 관병식을 마친 후

마차를 타고 돌아가는 일왕의 행렬이 나타나자, 군중 속에서 달려나와 히로히토를 향해 수류탄을 던졌으나

일왕이 탄 마차를 정확히 식별하지 못한 데다가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기수와 근위병에게 부상을 입혔을 뿐 일왕을 명중시키지는 못했다,

 

193218일 일본의 도쿄 요요기 연병장에서는 히로히토 천황이 참석한 가운데 신년 관병식이 열렸다.

현장에 모여든 군중들은 최근 만주를 석권하며

욱일승천의 기세를 자랑하던 일본군의 위용에 열띤 환호성을 질렀다.

관병식이 끝나자 히로히토는 수행원들과 함께 마차에 올라 식장을 빠져나갔다.

 

이봉창 의거

오전 1144, 히로히토 일행의 마차 행렬이 사쿠라다몬(櫻田門) 근처에 접어들었을 때

군중 틈에서 갑자기 수류탄 한 발이 날아들었다.

요란한 폭음과 함께 뿌연 먼지가 피어오르며 천황을 뒤따르던 궁내대신의 마차가 뒤집어졌고,

수행원들과 말이 비명을 지르며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아수라장 속에서 간신히 목숨을 건진 히로히토는 허겁지겁 현장을 빠져나갔다.

깜짝 놀란 일경은 급히 현장을 봉쇄하고 대대적인 범인 검거작전에 돌입했다.

그들이 수상해 보이는 사람이라면 무조건 구타하면서 체포하자

말쑥한 차림의 신사 한 사람이 폭행을 제지하면서 자신이 범인이라고 자수했다.

 

그가 바로 상하이 임시정부 한인애국단의 소속의 독립투사 이봉창이었다.

 

이봉창은 1년 전 자발적으로 임시정부에 찾아가 지도자 김구에게 천황 저격을 자임한 뒤

도쿄에 잠입하여 전 세계를 경동시킨 거사를 일으켰던 것이다.

일본 제국주의의 심장인 천황을 향한 그의 일격은 비록 실패했지만 잠들어있던 민족의 독립의지를 일깨웠고,

이에 감동한 중국 정부의 지원을 이끌어냄으로써 막혀있던 임시정부의 혈맥을 틔워주었다.

 

Sakuradamon Incident 독립투쟁의 불꽃을 되살리다

1920년대 초반 상하이임시정부는 한 마디로 지리멸렬이었다.

일제의 강력한 치안 정책으로 인하여 국내에 있던 비밀조직망이 대부분 파괴되었고,

자주독립을 위한 외교적인 노력 역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심각한 재정난 때문에 한때 천여 명에 달하던 독립운동가들이 수십 명으로 줄어들었다.

때맞춰 조선총독부에서 상하이에 밀정을 파견하여

임정 요인에 대한 체포, 납치, 암살 공작을 단행하자 김희선, 이광수, 정인 등이 변절하고 국내로 돌아가 버렸다.

 

1925, 이승만 대통령이 의정원에 의해 탄핵되자

뒤이어 대통령에 취임한 박은식이 대통령제를 국무령제로 고친 다음 사임했다.

초대 국무령이 된 이상룡이 내각 조직에 실패하고 서간도로 돌아갔고,

이동녕과 홍진이 2,3대 국무령이 되었지만 역시 내각 조직에 실패했다.

일제의 감찰 강화로 국내와 만주와의 연결도 끊어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독립운동의 활로는 보이지 않고 내부 분열이 심화되던 그 황망한 시기에

국무령으로 취임한 김구는 192712월 임시정부를 집단지도체제인 국무위원제로 개편한 다음

이듬해 이동녕을 국무령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내무부를 맡았다.

그때부터 임시정부의 실질적인 지도권을 행사하게 된 김구는

미주 동포들에게 서신을 보내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는 한편,

보다 강력한 항일투쟁을 위해 비밀결사인 한인애국단을 조직했다.

 

 

 

이봉창(李奉昌)1900810일 서울 용산구 원효로2가에서 태어났다.

문창보통학교를 졸업한 그는 가난한 집안 살림 때문에

일본인이 운영하는 제과점에 취직했는데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주인에게 험한 대접을 받았다고 한다.

장성한 뒤 남만철도회사에서 운영하던 용산역 조차과에 입사했는데,

24세 때 당대의 모던보이들처럼 여자와 마작에 빠져 많은 빚을 졌다.

그로 인해 채권자들로부터 협박을 받자 호쾌한 성격에 걸맞게 사표를 집어던지고 퇴직금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당시 그는 일본에 거주하던 조선인들의 비참한 상황을 목도했지만

이미 식민지 상황에 순응하고 있던 그는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않았다.

그런데 1928(소화 3) 11, 히로히토 천황의 즉위식을 참관하기 위해 교토에 갔다가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경찰에 체포되어 열흘 동안 유치장에 갇혀 있어야 했다.

이에 분개한 그는 새삼 자신이 차별받는 식민지 백성임을 깨달았지만 그뿐이었다.

19303월 이봉창은 도쿄에 가서 이름을 마츠이 카즈오로 바꾸고 채소절임 가게에 취직했다.

7월에는 도쿄도 혼고구 모리카와쵸의 모리야 가방가게로 직장을 옮겼다.

그런데 낙천적이고 호기심이 많았던 그는 일본에서의 틀에 박힌 생활이 지겨워지자

그해 12월 신천지인 중국 상하이로 건너갔다.

 

이봉창은 상하이에 도착하자 홍커우 지역에 거처를 마련한 다음

중국인이 운영하는 영창공사의 축음기 외판원으로 취직했다.

얼마 후 그는 능숙한 일본어를 활용하여 일본인이 운영하는 양수푸(楊樹浦)의 인쇄소 점원이 되었다.

당시 그는 봉급을 타면 클럽에 드나들며 사치와 호사를 즐겼는데,

소탈하고 남자다운 성격에 반한 많은 일본인들이 친구가 되었다.

그 덕에 일본 총영사관에 무시로 출입하게 되었고 현장에 근무하는 일본인 경찰관까지 사귀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봉창은 임시정부 요인이었던 안중근의 동생 안공근을 만났다.

그를 통해 이봉창은

자신이 아무리 일본인처럼 살아가더라도 자신은 결국 일제에 강점당한 망국의 백성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로 인해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민족혼이 고개를 쳐들었다.

이봉창은 곧 안공근의 소개로 백범 김구를 만났고,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 보창로 309호에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존재도 알게 되었다.

그때부터 이봉창은 임시정부 청사에 수시로 출입하면서 독립지사들과 교분을 가졌다.

당시 이봉창은 늘 하오리와 게다 차림으로 다녔으므로 일본인과 구분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몇몇 사람들은 그를 일본의 밀정으로 의심했다.

잦은 교분을 통해 본심을 알게 된 뒤에도 그를 일본 영감이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그러던 어느 날 이봉창은 임시정부 직원들과 함께 식당에서 술을 마시다 취기가 오르자 이렇게 물었다.

당신들은 독립운동을 한다면서 일황을 죽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습니까?”

그러자 한 사람이 힐난하듯 되물었다.

그 일이 쉽다면 여태까지 우리가 가만히 있었겠소?”

그 말을 들은 이봉창은 한심하다는 듯 실눈을 뜨고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작년에 내가 도쿄에 갔을 때 일황이 하야마(葉山)에 행차하면서 앞에 지나가는 것을 보고

총이나 폭탄이 있다면 단번에 죽일 수도 있겠다 싶었지요.”

그때 밖에서 대화 내용을 들은 김구는 귀가 번쩍 뜨였다.

당시 그는 한인애국단을 창설하고 일본에 대한 의열투쟁으로 독립운동의 계기를 마련하고자 했지만

적합한 인물이 없어서 고심하던 차였다.

그는 즉시 임정 사무원 김동우에게 이봉창을 면밀히 관찰하게 한 다음

신분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된 19314월 말경부터 그와 몇 차례의 면담을 가졌다.

이때 김구는 이봉창에게 한인애국단의 실체를 알리면서

일본 천황을 죽임으로써 꺼져가는 독립운동의 불씨를 되살리겠다는 자신의 계획을 밝혔다.

그러자 이봉창은 자신에게 폭탄만 주어진다면 천황 제거는 쉬운 일이라고 단언했다.

그렇게 하여 이봉창의 의기를 확인한 김구는 본격적으로 천황 암살 작전에 돌입했다.

 

김구는 막상 거사를 결정하기는 했지만 폭탄과 자금 마련이 여의치 않아 실행에는 1년여의 시간이 흘렀다.

김구는 궁여지책으로 안공근으로부터 소개받은 미주에 있는 동포들에게 편지를 보내 자금 지원을 호소했다.

그 사이 이봉창은 낮에는 철공소에서 일하고

밤에는 클럽에서 가무를 즐기는 등 예전과 다름없는 한량 행세를 했다.

이윽고 193111월 하와이 와히아와(Wahiawa) 지방에 있던 하와이애국단에서

김구의 호소를 받아들여 임성우와 안창호 등을 통해 1천 달러를 보내주었다.

뒤이어 중국인에게 부탁했던 수류탄 두 발도 입수했다.

그해 126일 밤, 김구는 임시정부 청사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이봉창을 도쿄에 보내 폭탄을 투척하도록 준비를 마쳤으니 승인해 달라며 정식으로 의안에 올렸다.

이때 조소앙과 김철은 경비만 들일 뿐 성공할 가망성이 없다면서 반대했다.

하지만 김구가 이미 모든 준비가 완료된 상태라고 통보하자 국무위원 전원이 승인했다.

그렇게 임시정부 내부의 행정적 절차를 마침으로써

이봉창의 거사는 개인적인 행동이 아니라 임시정부의 공식 군사작전으로서 추인되었던 것이다.

1213, 김구는 이봉창을 한인애국단 단장이었던 안공근의 집으로 데려가서

임시정부 산하 한인애국단 단원으로 가입시켰다.

그때 이봉창은 김구 앞에서 친필로 다음과 같은 선서문을 작성했다.

이봉창 선서문

Just before Lee Bong-chang attempted to assassinate Emperor Hirohito in 1932, he wrote this declaration

나는 적성(赤誠)으로서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적국의 수괴를 도륙하기로 맹세하나이다.’

그런 다음 이봉창은 수류탄 두 개를 손에 들고 환하게 웃으며 기념사진을 찍었다.

셔터를 누른 사람은 안중근 의사의 조카인 안낙생이었다.

이때 김구가 그의 희생을 예감하며 안타까운 표정을 짓자 이봉창은 환한 낯으로 그를 위로했다.

저는 영원한 쾌락을 영위하려 가는 것이니 슬퍼하지 마십시오.”

이튿날 아침 이봉창은 김구가 건네준 두 개의 수류탄과 거사 비용 3백 원을 품고

찬바람이 몰아치는 상하이 부두에서 장도에 나섰다.

그의 도일 목적을 알 리 없는 일본인 경찰관이 배웅을 나와 잘 다녀오라고 인사까지 해 주었다.

 

19311223일 도쿄에 도착한 이봉창은 며칠 동안 현지상황을 살폈다.

얼마 후 그는 히로히토 천황이 요요기 연병장에서 거행되는 신년 관병식에 참석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소원하던 기회가 왔음을 확신한 그는 즉시 상하이에 있는 김구에게 암호 전문을 띄웠다.

'물품은 18일 방매하겠다.'

193214일 은행을 통해 김구로부터 재차 1백 원을 송금 받은 그는

17일 머물던 아사히여관을 떠나 도쿄 외곽에 있는 가나가와 현 가와자키 시의 유곽에서 하룻밤을 머물렀다.

히로히토의 도쿄 방문이 확정되자

일경이 도쿄의 식당이나 여관, 유곽 등 불순분자들이 머물만한 장소에 대한 검문 수색을 강화했기 때문이었다.

운명의 18, 전차를 타고 하라주쿠에 도착한 그는 일경의 검문검색이 강화되었음을 알고

전차로 요쓰야 역을 거쳐 경시청 앞에 있는 사쿠라다몬 대로에 다다른 뒤 군중 틈에서 기회를 엿보았다.

오랜 기다림 끝에 관병식을 마친 히로히토 천황의 행렬이 나타났다.

이윽고 목표를 발견한 이봉창은 망설이지 않고 수류탄 한 발을 힘차게 집어던졌다.

하지만 수류탄은 천황의 마차가 아니라 궁내대신의 마차를 맞추고 말았다.

줄지어 가는 마차 가운데 히로히토가 탄 마차를 제대로 분간하지 못한 탓이었다.

갑작스럽게 천황 저격 사건이 일어나자 당황한 경찰들은

범인을 찾기 위해 사방을 봉쇄한 다음 마구잡이로 용의자를 잡아들였다.

이봉창은 경찰관이 자신의 앞에 있는 일본인을 의심하고 마구 때리자 담대한 표정으로 앞에 나아가

자신이 범인임을 밝혔다. 그러면서 반항하지 않을 테니 점잖게 대하라고 꾸짖었다.

 

 

이봉창의 천황에 대한 폭탄 투척 사건에 대하여 국내와 해외 언론의 반응은 실로 대조적이었다.

신한민보 등 해외 언론들은 예상치 못했던 그의 의거에 감탄사를 쏟아냈다.

특히 일제의 침략에 신음하던 중국의 언론들은

그의 거사를 극구 칭송하면서 폭탄의 강도가 약해 천황 폭살 시도가 실패했음을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총독부의 검열을 피할 수 없었던

국내의 중앙일보와 동아일보에서는 이봉창의 거사를 무책임한 테러라고 폄하했다.

의거 당일 도쿄의 경시청으로 연행된 이봉창은

형사부장실에서 도쿄지방재판소의 미야기 나가고로 검사정의 취조를 받았고,

대심원이 지명한 도쿄지방재판소의 아키야마 다카히고 예심담당판사의 첫 신문을 받았다.

예심판사의 첫 질문은 이봉창의 이름, 나이, 주소, 본적, 출생지 등 신상에 관한 것이었다.

그때 이봉창은 자신이 한국인임을 밝히지 않고,

이름은 아사야마 쇼이치(朝山昌一)’라고 대답했다.

그 때문에 18일 오후 신문에 보도된 내무성의 공식 발표문에는 그의 이름을 아사야마 쇼이치라고 했다.

심지어 발음의 한자명인 아사야마 쇼이치(淺山正一)’라고 보도한 신문도 있었다.

그는 또 수사에 혼선을 주기 위해 자신의 배후를 묻는 검사에게

김구 대신 백정선(白貞善)’이라는 가공인물을 내세웠다.

법정에서도 백정선의 지령에 따라 실행했을 뿐이라고 버텼다.

일찍이 김구는 그가 체포되면 잔혹한 고문에 시달리게 될 것을 예감하고

임시정부의 실상을 자백해도 괜찮다고 허락했다.

그러나 이봉창은 끝까지 자신의 단독범행이며 배후는 백정선한 사람뿐이라고 강조했다.

그것은 당시 일본이 점령하고 있던 상하이 지역에서 김구가 외부로 도피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주기 위함이었다.

이미 이봉창의 배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이끌고 있는 김구가 있음을 확신하고 있었던 일본은

사건 직후 신속하게 검사와 경찰을 상하이로 급파하여 프랑스조계에 은신하고 있던 김구 체포 작전에 돌입했다.

19일 무라이 구라마쓰 상하이 총영사는

프랑스 총영사 게쿠랑과 만나 김구 등 임시정부 요인의 인도를 요구했고,

같은 날 총영사관의 아카키 사무관과 스키무라 경부도

프랑스조계의 정치부장 사라레이를 만나 조계 경찰의 협력을 구했다.

그때 프랑스조계 당국은 겉으로 협조하는 척하면서 임시정부에 두 차례의 경고 메시지를 보내 주었다.

이는 일본이 프랑스 식민지인 베트남 독립운동을 단속하고 있지 않고 있을 뿐만 아니라

망명한 쿠옹데 왕자를 비호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덕분에 김구는 프랑스조계에 안전하게 머물며 윤봉길 의사의 홍커우 의거를 계획할 수 있었다.

이봉창에 대한 첫 공판은 1932916일 도쿄 대법원에서 열렸다.

이후 몇 차례의 형식적인 공판이 이어진 끝에 930일 사형이 언도되었다.

그로부터 불과 열흘 뒤인 1010일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다.

한때 일본인처럼 말하고 일본인처럼 살았던

모던보이 이봉창이 대한의 독립투사로서 영원한 이름을 남기는 순간이었다.

 

이틀 뒤 110,

김구는 한국독립당 명의로 이봉창이 일황을 저격한 데 대한 한국독립당 선언이라는 선언문을 발표했다.

그러자 중국인이 운영하는 상하이의 국민통신사는 111일자에 한국독립당 통전(通電)’이라는 제하에

이 선언문을 게재함으로써 중국인들에게 이번 사건이 한국인들의 독립 실현을 위한 무장투쟁이었음을 알렸다.

이 선언문에는 히로히토 천황을 폭살시키려 했던 이봉창 의거의 목적을 다음과 같이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하나, 폭악한 일구(日寇)가 저지른 죄악의 모든 책임이 바로 이 자에게 귀속되기 때문이다.

, 도둑을 소탕하려거든 먼저 그 수령을 잡으라는 말이 있다.

일황을 제거함으로써 왜적 전체의 사기를 크게 떨어뜨릴 수 있다.

, 우방인 중국을 대신해 복수함으로써 중한 두 나라의 우의를 더욱 증진시킬 수 있다.

, 하늘을 대신해 정의를 떨치고 왜적의 압박에 신음하는 피침략 민족의 인권을 신장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

다섯, 우방국들이 왜적으로 인해 받은 치욕을 갚을 수 있다.

여섯, 왜인을 대신하여 독재자를 제거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일곱, 일본의 국체를 요동시키고 우리의 주권을 되찾는데 도움이 된다.

여덟, 평화와 정의를 애호하는 전 세계 인류의 행복을 증진시킬 것이다.

아홉, 하늘의 뜻을 따르도록 천하의 인심을 선도하는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선언문에서 볼 수 있듯이 이봉창이 의열투쟁의 대상으로 천황을 선택한 것은

그가 군국주의 일본의 상징이었으며 모든 침략 전쟁이 그의 명령으로 자행되었기 때문이었다.

메이지천황 이래 한국이나 중국에 대한 일제의 침략과 만행의 책임은 천황에게 있었다.

그러므로 이봉창의 거사는 식민지 지배와 수탈의 최정점에 있는 당사자를 척살함으로써

인류의 양심을 수호하고 일본 제국주의의 근간을 무너뜨리려 했던 의거였다.

이봉창 이전에도 박열이나 김지섭처럼 천황을 목표로 한 적이 있었지만,

실질적으로 천황을 처단하고자 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러기에 기려수필의 저자 송상도는

이봉창을 박랑사에서 진시황을 저격했던 창해역사에 버금간다며 높이 평가했던 것이다.

-다음백과에서-

이봉창

1931년 태극기 배경으로 수류탄을 양손에 든 채 기념 촬영

이봉창 선서문

나는 적성(赤誠)으로서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적국의 수괴를 도륙하기로 맹세하나이다.’

 

이봉창

193218일 체포된 이봉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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