栖鳳山(서봉산) 깃들일 서. 살다. 묵다.
棲鳳山(서봉산) 살 서, 거처를 정하고 살다. 머무르다. 보금자리
<한문이 어느것이 맞는지...>
서봉산(棲鳳山)은 높이 249m로 경기도 화성시 봉담읍 덕리, 하가등리와 정남면 백리, 문학리에 걸쳐 있다.
아직까지 자연생태계가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어 참나무, 붉나무, 느티나무, 때죽나무 등 다양한 식물이 자생하며
멧비둘기, 멧토끼, 가재, 어치 등 여러 동물이 서식하고 있다.
봉황이 깃드는 산이라는 뜻의 서봉산 중턱에는
시주걸림을 하던 젊은 스님과 아름다운 낭자의 슬픈 사랑이 전해지는 쉰길바위가 있다.
1999년 서봉산 일대에 조성한 산림욕장은 화성 시민의 여가 선용과 체력 단련을 위한 장소로 각광받고 있다.
산림욕장 입구에서 산 정상의 전망대에 이르는 총 연장 2.2km의 산책로는 걷기가 비교적 수월하여
어린이나 부녀자는 물론 노약자들도 1시간이면 정상에 오를 수 있다.
산책로 주변에는 숲이 잘 가꾸어져 있어 학생들의 자연 체험장과 학습장으로도 많이 활용되고 있으며
산 정상의 육각정에서는팔탄 저수지, 봉담 길, 병점 길, 송탄,발안 모두 볼 수 있다.
서봉산 중턱에는 옛날에 작은 암자가 있었는데 젊은 스님과 동자만이 살고 있었고
스님은 매일같이 마을에 내려가서 시주걸립(施主乞粒)을 다니는 것이 일과였다.
어느날 스님은 시주걸립을 마치고 암자로 돌아 가는 길에 마을 어귀에 이르러 갈증이 나자, 늘 다니던 우물을 찾아갔다. 그때 물을 긷던 아낙네들은 물동이를 이고 하나 둘씩 마을로 들어가고 있었으며
젊은 스님이 우물 가까이 갔을 때는 어떤 낭자 혼자만이 남아 물동이에 물을 담고 있었다.
젊은 스님은 낭자를 바라보는 순간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훤칠한 몸매에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곱기가 이를 데 없어 하늘에서 선녀가 하강(下降)하여 노닐고 있는 듯하여
“참 아름답기도 하다.”하고 감탄하면서 우물가에 다다랐다.
낭자는 뒤에서 인기척이 나서 돌아다보니 젊은 스님이 다가서는 것을 보고 불길한 예감이 들어
물긷던 바가지와 물동이도 버려둔 채로 마을로 향해 줄달음을 쳤다.
스님은 낭자가 놀래서 뛰어가는 것을 보고는 우두커니 뒷모습만 바라다 보고 있었다.
그러나 자기로 인하여 물동이를 놓고 간 낭자에게 미안한 생각과 함께 다시 한번 보았으면 하는 엉뚱한 생각에서
물동이에 물을 가득 채워서 나무 밑에 놓고 기다려 보기로 하였다.
그 동안 해는 서산에 기울고 어두미 깔리기 시작 했다. 스님은 피곤한 나머지 물동이 옆에서 잠이 들고 말았다.
이튼날 아침 스님이 잠에서 깨어날 즈음이었다.
이때 마침 어제 그 낭자가 일찌감치 물동이를 찾으러 오다가
물이 가득찬 동이 옆에서 스님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스님은 잘못이라도 했다는 듯이 낭자를 바라보며 합장하고
머리숙여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을 외운 다음 그곳을 떠나려고 하였다.
그 때 낭자가 어제 있었던 자기의 행동이 지나쳤다는 생각이 들어 바가지에 물을 떠서 스님에게 권하자,
스님은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물을 받아 마신 다음 아리따운 낭자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는 암자로 돌아갔다.
한편 암자로 돌아온 스님은
낭자의 모습이 눈에 어른거려 잠이 오질 않았고 불경을 외우는 것도 마음이 내키질 않았으며,
시주 걸립도 떠나기가 싫었다.
불도에만 골몰무가( 汨沒無暇)해야 할 스님의 처지에서 속세의 낭자가 그리워 변민하고 있는 것은
불제자의 도리가 아닌 줄 알면서도 점점 더 마음이 혼란에 빠져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스님은 모든 것을 잊기로 결심하고 다시 마을로 시주걸립을 떠났다.
한편 낭자네 집에서는 부친이 우연히 병이 나서 눕게 되었다.
그래서 백방으로 약을 구해다 쓰고 용한 의원을 불러 치료를 해 보았으나 효험이 없었다.
낭자는 부친의 병환이 여의치 않자 근심과 걱정으로 나날을 지내다 보니 몸이 수척해지기까지 했다.
그 즈음 스님은 지나는 길에 자신도 모르게 우물을 찾았다.
거기서 스님은 낭자를 만나게 되자 반가운 마음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미소를 띄우는 낭자의 얼굴에는 수심이 서려있어 사연을 물어본 즉 부친의 병환 때문인 것을 알았다.
스님은 그 자리에서 약처방을 써 주고는 차도가 있으면
자기의 암자에 와서 3일간 불공을 드리라는 말을 남기고 암자로 돌아갔다.
그 후 낭자는 스님의 처방대로 약을 다려 부친에게 드리니, 병세는 금방 호전 되었다.
그래서 스님 말대로 삼일간 불공을 드리기 위해 부친의 허락을 받은 다음
돈과 음식을 장만해 가지고 서봉산 암자에 들어 갔다.
스님이 일편단심 낭자의 생각으로 지새던 차에 낭자가 부친의 병환이 좋아져서 약속대로 불공을 드리러 온 것이었다.
낭자가 정성을 다해 부처님께 불공을 드린 다음 스님께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떠날 때였다.
스님은 그 동안 자기가 낭자를 사모하여 잊지 못하고 있었던 것을 자초지종 솔직히 고백했다.
즉, 낭자를 처음 만날 때부터 지금까지 그리워하는 마음이 솟구쳐 한시라도 잊을 수가 없으니
낭자와 함께라면 불도수행(佛道修行)을 떠나서 환속을 하겠다는 하소연이었다.
낭자는 뜻밖의 일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으나 스님의 처지를 생각해서 거절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낭자는 부친의 승낙을 빙자해서 그날은 암자를 떠나왔다.
이튿날 낭자는 암자에 가서 스님을 만났다.
“스님께서는 여러해 동안 불도에 몸담아 오신 터에 쉽사리 속세로 환속 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고 물으니 스님은 대답하기를
“소승이 불도의 길을 걷고 있음은 지당한 말씀이오나
낭자를 두고는 도저히 마음을 가다듬을 수가 없어 환속하기로 결심을 한 것이오니 소승의 마음을 헤아려 주십시오.”
하고 말했다.
낭자는 또 다시
“그렇다면 스님께서 환속을 약속한다는 표시로 서봉산 위 쉰길바위에서 턱걸이 백번을 한다면 기꺼이 응하겠소.”
하였다.
젊은 스님은 그 까짓 백번쯤이야 걱정없다는 듯 희희낙락하며 자신있게 승낙을 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바위있는 곳으로 올라 갔다. 스님은 의기있게 팔을 걷어 부치고 턱걸이를 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거뜬거뜬 올라 갔으나 횟수가 더해 갈수록 힘이 들었고 80번이 넘어가면서부터는 더욱 힘이 들었다.
스님은 사생결단 있는 힘을 다하여 턱걸이를 했지만 백번을 채우지 못하고
99번째 가서 기운이 빠지고 의식이 몽롱해지고 손이 풀리면서
급기야는 높이가 쉰길이나 된다는 바위의 벼랑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다.
낭자는 스님을 부르면서 절벽 아래로 뛰어 내려 갔으나 스님은 이미 유혈이 낭자한 채 숨을 거둔 후 였다.
낭자는 생각하기를 “내가 너무 지나친 요구를 하여 스님이 불의의 변을 당했구나” 하고
슬픔을 못이겨 한참을 업드려 울고 있다가 일어나니,
자기 앞에는 난데없이 바위가 하나 우뚝 솟아 나와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그로부터 마을 사람들은 이 바위가 스님의 이루지 못한 영혼이 깃들어 눈물을 흘리며 울고 있다고 하여
‘눈물바위’라 불러오게 되었으며
쉰길바위와 함께 지금까지도 스님과 낭자의 한 맺힌 사연이 담겨져 전설로 내려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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