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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남-문충공 백헌 이경석 묘(文忠公 白軒 李景奭), 전주이씨

구름에 달

by 碧巖 2016. 9. 1. 2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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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충공 백헌 이경석(文忠公 白軒 李景奭)

경기 성남시 분당구 석운동 50-7

경기도 기념물 제84호

 

1595(선조 28)1671(현종 12).

본관은 전주(全州). 상보(尙輔), 백헌(白軒).

종실 덕천군(德泉君) 이후생(厚生)6대손이며,

함풍수(咸豊守)  이계수(繼壽)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수광(秀光)이고,

   할머니는 증 정경부인 안동김씨로 부사과 김언정(金彦禎)의 따님, 익원공 김사형(金士衡)7대손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 이유간(惟侃)이며,

  어머니는 개성고씨(開城高氏)로 대호군(大護軍) 고한량(漢良)의 딸이다.

 

. 송시열을 발탁하여 천거하였으나, 후일 그와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으로, 1613(광해군 5) 진사가 되고 1617년 증광 별시에 급제했으나,

이듬해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비 상소에 가담하지 않아 삭적(削籍)되고 말았다.

인조반정 이후 알성문과(謁聖文科)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부정자를 시작으로 선비의 청직으로 일컫는 검열·봉교로 승진했고 동시에 춘추관사관(春秋館史官)도 겸임하였다.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으로 인조가 공주로 몽진하자 승문원주서로 왕을 호종해 조정의 신임을 두텁게 하였다.

이어 봉교(奉敎전적·예조좌랑·정언·교리 등을 거친 뒤 1626(인조 4)에는 호당(湖堂 : 독서당)에 선발되어 들어갔다.

또한 같은 해 말에는 이조좌랑·이조정랑에 올라 인사 행정의 실무를 맡게 되었다.

 

이듬해 정묘호란이 발발하자 체찰사 장면(張晩)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강원도 군사 모집과 군량미 조달에 힘썼다.

이 때에 쓴 격강원도사부부로서 檄江原道士夫父老書는 특히 명문으로 칭송되었다.

 

정묘호란 후 다시 이조정랑 등을 거쳐 승지에 올라 인조를 측근에서 보필하였다.

1629년 자청해 양주목사로 나가 목민관으로서의 실적을 올렸다.

그 뒤 승지를 거쳐 1632년에는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오르고 대사간에 제수되었다.

 

 

 

 

 

 

 

 

인조반정 이후 자신들이 임금을 세웠다는 말을 공공연히 입에 담는 등 공신들의 특권과 전횡을 보고 분개하여,

오래전부터 나이를 떠나 고담준론을 펼치던 김집, 송시열, 송준길의 학문과 덕행을 인조에게 알려

산림학자들을 적극 천거하여 등용하게 했다.

같은 서인 당원이었기에 공신들은 별로 개념하지 않았으나 송시열, 송준길 등은 반정 공신들의 전횡과,

인조의 뜻에 영합하려는 일(정원군의 원종 추숭론 등)에 적극 반대하고

소현세자와 민회빈 강씨의 복권을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반정공신들의 반격과 반발에 대비해 그는 산림학자들을 적극적으로 후견해주었다.

 

병자호란이 일어난 1636년에는 대사헌과 부제학을 겸임하면서 인조를 모시고 남한산성에 들어갔으며

1637년에는 예문관 제학을 겸임하면서 삼전도비의 비문을 썼다.

그 후 1638년에 예문관·홍문관 대제학에 올랐으며 1639년에 이조 판서에 올랐다.

 

1641년에는 청나라에 볼모로 가 있던 소현세자(昭顯世子)의 이사(貳師)가 되어 심양으로가

현지에서 어려운 대청 외교(對淸外交)를 풀어나갔다.

그러나 이듬해 엄금하던 명나라 선박이 선천(宣川)에 들어온 일이 청나라에 알려지자,

그 사건의 전말을 사문(査問 : 조사해 답변함.)하라는 청나라 황제의 명을 받고 서북 지역으로 돌아왔다.

 

조선의 관련 사실을 두둔하느라 청나라 황제의 노여움을 사서 투옥되었다가

영부조용(永不調用 : 영구히 등용되지 못함.)의 조건으로 귀국해, 3년 동안 벼슬에서 물러났다.

1644년에 복직, 1645년 이조 판서가 된다. 그해 4월 이조판서 직에 있었고 9월에 우의정에 오른다.

백헌집에는 이때 그가 이조판서 자격으로 동춘당 송준길과 우암 송시열, 탄옹 권시를 등용했다 한다.

 

 

 

1645년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1648(효종 9) 영중추부사가 되었다.

이때 예송 문제다 발생하자 그는 이조판서 송시열의 예론(禮論)을 지지한다.

송준길과 송시열은 재야 시절에 서울에 오면 백헌의 집을 찾아 서로 즐겁게 만났던 관계였고,

 

이는 천거를 받아 조정에 나갔을 때도 지속되었다.

1649(인조27) 555세로 백헌 이경석(白軒 李景奭)과 나이가 같은 인조가 병석에 누워 졸하고 봉림대군 효종이 즉위하였다. 

그러나 1650년에 효종의 북벌 계획이 이언표(李彦標) 등의 밀고로

청나라에 알려져 사문사건(査問事件)이 일어나게 되었다.

청나라의 사문사는 남별궁(南別宮)에서 영의정 이경석과 정승·판서 및 양사(사헌부·사간원)의 중신 등을 모두 세워놓고

북벌 계획의 전말을 조사, 죄를 다스리고자 해 조정은 큰 위기를 맞았다.

 

이에 끝까지 국왕을 비호하고 기타 관련자들까지 두둔하면서 모든 것을 자신의 책임으로 돌려

국왕과 조정의 위급을 면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청나라 사신들로부터 대국을 기만한 죄로 몰려 극형에 처해졌으나

국왕이 구명을 간청해 겨우 목숨만을 부지,

청나라 황제의 명으로 백마산성(白馬山城)에 위리안치 되었다.

이어 다시 영부조용의 명을 받아 벼슬에서 물러나 1년 남짓 광주(廣州)의 판교(板橋)와 석문(石門)에서 은거하였다.

1653(효종 4) 겨우 풀려나 영중추부사에 임명되었으며, 1659년 영돈녕부사가 된 뒤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현종2(1661) 67세의 백헌 이경석은 고산 윤선도 해배건으로 인해 서로 틈이 생기게 되었고,

 

1668(현종 9)에는 신하로서는 세기적 영예인 궤장(几杖)을 하사받았다.

 

그러나 마침내 현종10(1669) 우암 송시열이 삼전도 비문을 지은 백헌을 풍자해 신랄하게 비판한다.

 

송시열은 고전의 수이강 부분을 언급하며 그를 조롱하였고,

 

그의 문하생들이 송시열의 비아냥에 분노하여 논쟁이 벌어졌다.

 

이로써 그는 자신이 발탁한 사람 중의 한사람인 우암 송시열과 척지게 되었다.

 

평생 소학논어를 거울삼아 수양했고, 노년에는 근사록과 주자가 지은 온갖 서적을 탐독하였다.

문장과 글씨에 특히 뛰어났는데 시문은 경학(經學)에 근본한 것이 주류를 이루었다.

 

문장은 기력(氣力)이 웅혼(雄渾 : 힘이 있고 원숙함.)해 광화현란(光華絢爛 : 빛처럼 현란함.)하며,

시도 활동양염(活動穰豔 : 넉넉하면서 고움.)하다.”는 칭송을 받을 만큼

필력이 뛰어나 삼전도비문등을 찬술하기도 하였다.

 

정치적 생애는 17세기의 초기·중기에 해당하는

인조·효종·현종의 350년 동안 시국의 안팎으로 얽힌 난국을 적절하게 주관한 명상(名相)으로 보냈다.

하지만 자신의 의도와는 달리 생애 말년에는 차츰 당쟁 속에 깊이 말려 들어가,

사후에 특히 인조의 명으로 찬 할수 밖에 없었던 삼전도 비문으로 심한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저서로는 백헌집등 유집 50여 권이 간행되었고,

조경(趙絅조익(趙翼) 등과 함께 장릉지장 長陵誌狀을 편찬하였다.

글로는 삼전도비문이 있으며,

 글씨로는 좌상이정구비문 左相李廷龜碑文·이판이명한비 吏判李明漢碑·지돈녕정광성비문 知敦寧鄭廣成碑文등이 있다.

諡號는 문충(文忠)이며, 남원의 방산서원(方山書院)에 제향되었다.

 

 

 

 

 

 

   경기도기념물제84호 효종조영의정문충공 백헌이경석선생묘역

 

 

 

 

 

 

 

 

 

 

         문충공백헌이선생사적비

 

 

 

 

 

 

 

 

 

 

 

 

 

 

 

 

 

 

 

 

 

有明朝鮮國領議政文忠公白軒李先生景奭墓 貞敬夫人全州柳氏祔左

유명조선국영의정문충공백헌이선생경석묘 정경부인전주유씨부좌

 

 

 

 

 

 

 

 

 

 

 

 

 

 

 

 

 

 

 

 

이경석 편지, 근묵, 1658, 행초서, 26.7×43.6, 성균관대학교박물관.

상주 목사(尙州牧使)에게 계단에서 떨어져 다친 임금의 안부와 선물에 대한 감사함 등을 전한 편지.

 

曉起 효기

西舍鷄三唱(서사계삼창) 서쪽 집에는 새벽이라 닭이 훼를 치고

東峯月一眉(동봉월일미) 동쪽 봉우리에는 달이 살짝 걸려 있네

秋空正澄廓(추공정징확) 가을 하늘은 참으로 맑고도 드넓은데

心亦澹然時(심역담연시) 이제 내 마음도 참으로 담담해지네

 

삼전도 비문 관련-------------------------------------------------------------------------

 

우암 송시열은  자기를 등용한 백헌 이경석을 향원(鄕原)’에 비유했다.

 ‘향원은 요즘 말로 악덕 지방 유지정도에 해당된다.

우암의 명분론에 의거한 견해로는,

백헌이 당시 그렇게까지 굴욕적인 문자를 동원해 비문을 짓지 않고

그저 짓는 시늉만 했으면 되었는데 자존심을 모조리 무너뜨린 상태로 지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일반적인 반론은

그의 손자인 이하성(李夏成)을 통해 들을 수 있다.

우리 임금이 몸을 굽히고 욕을 참으신 것은 종묘사직을 위하고 만백성을 위해 부득이한 일이었습니다.

인조께서는 처음에 신풍부원군 장유(張維), 전부사(前府使) 조희일(趙希逸)

신의 조부에게 함께 의논해 하룻밤 사이에 지어오라고 명하였는데,

소를 올려 끝까지 사양하였지만 사세가 급박하였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지어 바쳤던 것입니다.”라며

비문을 그의 뜻이 아니라 강압에 의해 지었음을 호소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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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석은 조선 제2대 임금인 정종대왕의 열번째 아들인 덕천군(德泉君)6대손이다.

 

     7代祖 : 조선 2대 국왕 공정왕(恭靖王) 정종(定宗) 이경(李曔)

     6代祖 : 덕천군(德泉君) 적덕공(積德公), 이후생(李厚生)

     5代祖 : 신종군(新宗君) 공간공(恭簡公) 이효백(李孝伯)

   고조부 : 완성군(莞城君) 이귀정(李貴丁)

   증조부 : 함풍군(咸豊君) 이계수(李繼壽)

할아버지 : 이수광(李秀光), (함풍군 묘역 역내)

   아버지 : 이유간(李惟侃), (함풍군 묘역 옆, 장자 효민공 이경직 묘역 역내)

    어머니: 개성 고씨 고한량(高漢良)의 딸 부인 : 전주 류씨 류색(柳穡)의 딸

              형님 효민공(孝敏公) 석문 이경직(石門 李景稷)

              형님 금구현령 이경설(李景卨)

               문충공 백헌 이경석(文忠公 白軒 李景奭)

                      장남 : 이철영(李哲英)

                               손자 : 이우성(李羽成)

                               손자 : 이하성(李廈成)

 

 

 

벽암 두릉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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