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안성-홍계남장군고루비/경기도 유형문화재 제71호

구름에 달

by 碧巖 2016. 9. 7. 22:37

본문

728x90


洪季男將軍古壘碑 홍계남장군고루비/안성시 미양면 서운로 539-32 

 

洪季男將軍古壘碑 홍계남장군고루비

경기 안성시 미양면 구수리에 있는 임진왜란 때의 명장 홍계남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71.

비신의 높이는 170, 너비 58, 두께 45이며, 비를 보호하기 위하여 1977년 비각을 세웠다.

그가 쌓은 진지였던 목촌(木村)의 야산 중턱에 세운 비각에 전한다.

비문은 좌참찬 이재(李縡)가 짓고 민우수(閔遇洙)가 썼으며 유척기(兪拓基)가 두전을 썼다.

 


 

洪季男1564~1597

무신이며 의병장으로 본관은 남양이다.

우찬성 홍자수의 아들로 서운면 양촌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천성이 단정하고 위용과 용력이 뛰어나 무술에도 특출하였고

높은 것을 뛰어 넘는 재주가 있어 홍나비장군이라는 별명을 가졌다.

천성이 근엄하고 용감했던 그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순변사 이일(李鎰신립(申砬)의 막하에서 활동하다 신립의 패전으로 고향 안성으로 돌아왔다.

이때 홍계남의 형 홍진은 명나라에 구원군을 보내달라고 이덕형과 같이 명나라에 가 있었다.

동생 홍재는 임금님을 모시고 의주로 떠났다,

아버지 홍자수는 홍계남의 동생인 홍전과 홍뢰, 그리고 고종형님인 이덕남과 함께

의병 300명을 모집해 충청도 진천 엽돈령에 진을 치고 있는 왜적과 대치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엽돈령에 진을 쳤던 왜적을 물리치고 목촌(木村)에 성루를 쌓고 대치하였다.

그런데 왜적은 대군으로 홍자수 의병을 기습해 혈전 끝에 그만 홍자수는 전사를 하고 말았다.

홍 장군이 당도하여 보니 우리 의병이 질펀하게 죽어 있었고,

왜적들은 죽주성에서 홍계남을 잡고자

아버지 홍자수 대장과 부대장 이덕남의 목을 베어 장대에 매달고 유인작전을 펼쳤다.

그는 왜적을 기습하여 전승을 올리고 부친의 시신을 무사하게 가져와 진중에 안치시켰다.

조정에서 그의 공로를 가상히 여겨 수원판관 겸 기호양도조방장

                                            (水原判官 兼 畿湖兩道助防將)을 제수받고 절충장군 칭호를 하사받았다 

1596년 선조 29년 왕족인 이몽학이 충청도 홍성 일대에서 반란을 일으키면서

김덕령과 홍계남, 최담 등이 자기편이라고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바람에

홍계남은 역적으로 체포되어 감옥에 갇혀 고생을 하였다.

김덕령은 억울하게 죽고 홍계남은 무고함이 밝혀져 석방, 복직되었다.

홍계남은 관군을 이끌고 이몽학을 공격해 역적 괴수 이몽학을 홍가신과 함께 체포하였다.

이리해서 이몽학은 피살되고 반란은 진압되었다. 때는 15967월이다.


뒤에 영천군수 겸 경상도조방장 재임시에는 안강현에 들어온 왜적을 추격하여 포로 5,000여 명을 구하기도 했다.

선조 30년 정유년, 풍신수길은 다시 조선을 침략하였다.

1597114일 왜군 20만 명이 또 온 것이다. 이른바 정유재란이다.

이때 이순신장군은 억울하게도 감옥에 갇혀 있었고 원균이 수군통제사가 되어 있을 때다.

홍 장군은 이때 영천에서 군대를 이끌고 있었다.

적이 재침한 것을 막으려던 때 홍 장군은 그만 병이 들어 세상을 뜨고 말았다. 34살이었다.

34세를 일기로 영천에서 사망하자 선조는 그의 부음을 듣고

처자와 노모의 부양을 적극 지원하도록 하는 한편 마을에 정문을 세우고 판돈녕부사 겸 이조판서에 추증했다.

그리고 그의 충효를 널리 후세에 전하고자 <삼강행실도>에 속기토록 했다.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