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순옹주 홍문(和順翁主 紅門, 충남 유형문화재 45호),
추사 김정희의 증조할머니이자 조선 영조의 둘째딸인 화순옹주의 정절을 기리는 열녀문(烈女門)
화순옹주(和順翁主, 1720년 ~ 1758년 1월 17일)는
조선 제21대 임금 영조(英祖, 1694~1776, 재위 1724~1776)의 차녀로
어머니는 정빈 이씨(靖嬪 李氏, 1694~1721)이다.
조선의 왕녀들 중 유일하게 열녀(烈女)로 지정되었으며 언니 화억옹주가 조졸하였기에 장녀로 적혀 있다.
1725년(영조 1) 2월 18일에 화순옹주로 봉해졌으며,
1732년(영조 8) 영의정을 지낸 김흥경(金興慶)의 아들이자
추사 김정희의 증조부인 월성위(月城尉) 김한신(金漢藎)과 혼례를 치렀다.
1758년 김한신이 세상을 떠나자 그 죽음을 애도하며 곡기를 끊었고,
아버지인 영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결심을 바꾸지 않아 곡기를 끊은 지 14일 만인 1월 17일 죽음에 이르렀다.
정조 대에 화순옹주의 정절을 기리기 위하여 그녀를 열녀로 봉하고, 열녀정문을 세웠다.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 남편 김한신과 합장되어 있으며
옹주의 열녀정문인 유형문화재 제45호 화순옹주홍문(和順翁主紅門) 또한 이곳에 있다.
烈女綏祿大夫月城尉兼 五衛都摠府都摠管 贈諡貞孝公金漢藎 配和順翁主之門 上之七年 癸卯一月十二日 特命旌閭
열녀수록대부월성위겸 오위도총부도총관 증시정효공김한신 배화순옹주지문 상지7년 계묘 1월12일 특명정려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 799-2 에 있는 조선시대의 열녀문(烈女門).
정면 8칸, 측면 1칸.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45호
.
열녀문은 김정희선생고택(金正喜先生故宅, 충청남도유형문화재 제43호) 유적지 안에 위치하며,
이곳에는 홍문 외에 화순옹주와 김한신(金漢藎)의 합장묘, 김정희묘·김정희고택이 있고,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백송이 있다.
이 열녀문의 주인공인 화순옹주는 영조의 둘째딸로 당시 영의정 김흥경(金興慶)의 아들인 한신과 혼인하였으나,
38세의 나이로 한신이 죽자 식음을 전폐하고 따라 죽었다.
영조는 화순옹주의 정절을 기리면서도 부왕의 뜻을 저버렸다 하여 정려를 내리지 않았으며, 뒤에 정조가 내렸다.
묘막터는 53칸이었다고 하나 현재는 불타 없어지고 주초(柱礎)만이 남아 있다.
<안내문>
조선 영조의 둘째 딸로서, 13세에 영의정 김흥경의 아들 월성위 김한신과 결혼한 화순옹주의 열녀정문이다.
추사 김정희의 증조부이기도한 김한신(1720~1758)은 벼슬이 수록대부 오휘도총관에 이르렀다.
부군이 38세의 젊은 나이에 별세하자, 옹주는 음식을 전혀 먹지 않고 영조의 말림에도 불구하고 죽음의 길을 택하였다. 영조는 옹주가 부왕의 뜻을 저버린데 대한 아쉬움 때문에 정문을 내리지 않았으나 후대에 정조가 내렸다.
약 200여 평의 대지 위에 낮은 담장을 두르고 출입문의 정면에 홍문을 세웠다.
건물은 정면 8탄 측면 1칸으로 중앙의 오른쪽 칸에 문을 내었고,
문의 전면에 홍살을 세우고 문 뒤에는 붉은 칠을 한 현판이 걸려 있다.
영조의 둘째 딸 화순옹주.....
영조의 장녀는 어려서죽고 실질적으로 장녀였던 화순옹주......그래서 영조의 사랑을 받았다고..
화순옹주는 김한신의 나이 13살에 시집을 와서 25년 이상을 살았지만
남편을 얼마나 사랑했던지 김한신이 죽자 완전히 곡기를 끊고 남편을 따라 죽고자 결심을 했다.
그가 시집을 와서 남편 김한신과 살기를 25년.
한 점 혈육도 남기지 못하고 남편이 세상을 등지고 보니
그녀에게 세상은 자신이 살아야 할 아무런 의미가 없는 황량한 사막에 불과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녀가 곡기를 끊고 드러누워 죽기를 자처하자 주변에서는 그녀의 이러한 처사에 당황한 나머지 음식을 강권해 보지만 그녀의 결심은 단호해서 한 방울의 물도 입에 대지 않았다.
그러기를 칠일째 되던 날 소식을 전해들은 영조 임금은
사랑하는 딸이 남편의 죽음에 상심한 나머지 곡기를 끊고 죽기를 자처한다는 소식을 듣고
임금의 권위와 체통을 내려놓고 딸의 사저를 친히 찾아가 미음을 권하였고,
임금인 아버지가 찾아와 친히 미음을 권하자
옹주는 임금의 명령을 냉정히 거절할 수가 없어 임금이 건네주는 미음을 받아 몇 숟가락 뜨는 듯이 하다가는
그 음식들을 모두 토해 내면서 음식이 도저히 넘어가지 않는다며 그냥 내려놓았다고 한다.
화순옹주가 곡기를 끊고 남편의 뒤를 따르겠다고 결심을 한 지 14일.
그녀는 그토록 사랑하던 남편의 뒤를 따라 마침내 죽음에 이르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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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순옹주가 남편을 따라죽은 후 열녀문을 세우자고 신하들이 영조에게 간하다가 영조의 노여움을 사서 귀양갔다는 ...
영조 입장에선 사랑하던 딸이 애비의 말도 안듣고 자진하였으니 속이 터질 노릇인데....
신하들이 열녀문 세우자고 하니
결국 나중에 정조때 열녀문을 세웠다고...
<和順翁主 가족 관계>
祖父 : 제19대 숙종대왕(肅宗大王, 1661~1720)
祖母 : 인현왕후 여흥 민씨(仁顯王后 驪興 閔氏, 1667~1701)
祖母 : 인원왕후 경주 김씨(仁元王后 慶州 金氏, 1687~1757)
生祖母 : 화경숙빈 해주 최씨(和敬淑嬪 海州 崔氏, 1670~1718)
父 : 제21대 영조대왕(英祖大王, 1694~1776)
母 : 정성왕후 달성 서씨(貞聖王后 達城 徐氏, 1692~1757)
配匹 : 월성위(月城尉) 김한신(金漢藎
外祖父 : 이준철(李竣哲)
外祖母 : 정경부인 김해 김씨(貞敬夫人 金海 金氏)
生母 : 온희정빈 함성 이씨(溫僖靖嬪 咸成 李氏, 1694~1721)
언니 : 화억옹주 향염(和憶翁主 香艶, 1717~1718)
오빠 : 추존 진종대왕(眞宗大王, 1719~1728)
本名 : 향이(香怡)
벽암 두릉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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