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정공 조충(趙冲) 묘소
1171(명종 1)∼1220(고종 7). 고려 후기의 문신.
강원도 횡성군 횡성읍 정암리 산207-1(입구 정암리 558)
상장군 문정공 조충(趙冲)
고려시대의 무장(武將)문신(文臣)으로 字는 담약(湛若). 본관은 횡성(橫城).
조영인(趙永仁)의 아들로
부친인 조영인, 아들 조계순과 더불어 3대가 원수(元帥)를 지냈다 하여 삼원수(三元帥)라 부르며
공근면 상동리(公根面 上洞里)에 후손들이 사당(祠堂)을 지어 매년 봄, 가을에 제향(祭享)을 올려 왔고,
이에 이곳 지명을 ‘삼원수골’이라 부른다.
『고려사 高麗史』 열전(列傳) 제 16권에 보면 조충은 생후 1개월만에 어머니를 여의었으며
어릴때부터 효성이 지극하여서 효동(孝童)이라 불리웠다고 한다.
또한 횡성조씨(橫城趙氏) 족보에 의하면
그는 상동리 자지봉(上洞里 紫之峰) 아래 있는 굴바위(石窟)에서 태어났으며,
그 까닭에 이곳에서 500m 가량 떨어진 곳의 마을이 조촌(趙村)이라 불렸다는 것과
이곳에서 300m 아래쪽에 있었다는 선강정(仙降亭)에서 이들 부자가 시를 읊었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한다.
金紫光祿大夫 守太尉門下侍郞同中書 門下侍中平章事 上將軍
금자광록대부 수태위문하시랑동중서 문하시중평장사 상장군
修文殿太學士 修國史 判禮部事 諡文正公 趙先生神道碑
수문전태학사 수국사 판예부사 시문정공 조선생신도비
상장군 문정공 조충(趙冲)
본관 횡천(橫川: 현재의 강원도 횡성군), 字 담약(湛若). 諡號 문정(文正).
태보(太保)인 조정신(趙正臣)의 증손이고,
각문지후(閣門祗侯) 조시언(趙時彦)의 손자이며,
문하시중 조영인(趙永仁)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직사관(直史館) 윤자고(尹子固)의 따님으로 아들은 광정공 조계순이다.
음서(蔭敍)로 벼슬에 올라 태학(太學)에 들어가 공부하였고,
1190년(명종 20) 급제하여 내시(內侍)에 임명되었다.
1209년(희종 5)에 국자좨주(國子祭酒),
1211년에는 대사성 한림학사(大司成 翰林學士)로서 동지공거(同知貢擧)를 겸임하였다.
이후 동북면병마사·예부상서(禮部尙書)를 거쳐
1216년(고종 3)에는 문·무를 겸비했다고 하여
추밀부사 한림학사승지(樞密副使翰林學士承旨)로서
상장군(上將軍)을 겸임하는 등 최충헌정권에 순응하며 관직에 나아갔다.
1216년 몽고군에게 압박당한 거란유종(契丹遺種: 僞遼國人)이 고려 북방에 침입하였다.
그러자 참지정사(參知政事) 정숙첨(鄭叔瞻)이 행영중군원수(行營中軍元帥)가 되었는데,
그 휘하의 부원수로 임명되어 경도(京都) 사람 가운데 종군 가능자와 승군(僧軍)을 모아 출정하였다.
이듬해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 정방보(鄭邦輔)로 원수가 교체된 뒤 염주(鹽州)에서 적병을 물리쳤으나,
안주 태조탄(太祖灘)까지 추격했다가 패배하여 파직되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여진족의 황기자군(黃旗子軍)이 압록강을 건너
인주(麟州)·용주(龍州)·정주(靜州) 등지의 경계 내에 침입하자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가 되어
이를 대파(大破)하고, 그 공으로 파면 이전의 관작으로 복직되었다
1218년에 수사공 상서좌복야(守司空尙書左僕射)가 되어 개경으로 돌아왔으나,
거란족의 침입이 날로 심해지고 관군이 유약해 복속시키지 못하자,
다시 서북면원수가 되어 김취려(金就礪)·정통보(鄭通寶) 등을 인솔하고 출정하여 거란군을 대파하였다.
이에 거란군이 강동성(江東城)에 들어가 웅거하게 되었다.
이듬해 2월 몽고·동진(東眞) 군대와 연합해 강동성을 공격하여 거란군의 항복을 받아냈다.
강동성전투가 종결되자 몽고군 원수인 합진(哈眞)과 형제맹약(兄弟盟約)을 맺었다.
그 내용은 고려가 매년 일정한 시기에 일정한 장소에서 몽고에 세공(歲貢)을 납부한다는 것이었다.
형제맹약의 체결은 당시 집권자였던 최충헌의 의사와는 반대되는 것이었으나,
조충이 나라의 안위를 위하여 이를 지지하였던 추밀원부사 최우(崔瑀)와
대몽화의론자들의 뜻을 받들어 이루어진 것이다.
조충은 개선하여 정당문학 판예부사(政堂文學判禮部事)에 오르고,
곧이어 수태위 동중서문하시랑평장사 수국사(守太尉同中書門下侍郎平章事修國史)가 더해졌다.
조충이 세상을 떠나자 개부의동삼사 문하시중(開府儀同三司 門下侍中)이 추증되었고,
고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諡號는 문정(文正)이다.
金紫光祿大夫守太尉門下侍郞平章事修文殿太學士 贈開府儀同三司門下侍中 諡文正公橫川趙公冲之墓
금자광록대부수태위문하시랑평장사수문전태학사 증개부의동삼사문하시중 시문정공횡천조공충지묘
횡천은 횡성의 옛 지명이라고...
金紫光祿大夫 守太尉門下侍郞 同中書門下侍中平章事 上將軍 修文殿太學士 修國史判禮部事
금자광록대부 수태위문하시랑 동중서문하시중평장사 상장군 수문전태학사 수국사판예부사
諡文正公 獨樂園趙先生之墓 配昌原郡夫人東州崔氏 祔
시문정공 독악원조선생지묘 배창원군부인동주최씨 부
횡성 조충장군 지석
횡성군 횡성읍 정암리에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10호로 지정된 조충장군의 묘(墓)와 지석(誌石)이다.
지석이란 망자의 이름, 생몰일, 행적, 무덤의 방향 등을 적어 무덤 앞에 묻는 판석(板石)으로
강원도 문화재 474점 중에 지석이 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유일한 것이다.
조충장군의 묘는 원래 개성군 상동면 연동에 있었으나
1945년 해방 후에 38도선을 경계로 하여 남북이 분단되자
횡성조씨 문중에서 1948년 현재의 묘역으로 이장하면서 지석도 함께 매장하였다.
1988년 10월 묘역을 정비하면서 지석의 역사적 가치를 인정하여 문화재로 지정하였다.
지석은 청석(靑石)으로 가로 80cm, 세로 55cm, 두께4cm로 되었으며, 뒷면은 거칠게 다듬었고,
앞면은 잘 다듬어 글씨를 새겼다.
둘레에는 정교한 당초(唐草)무늬를 새기고 그 안쪽으로 테두리선을 그었다.
세로로 금을 그어 글씨를 새기고 붉은 칠을 하였는데, 글씨의 크기는 약1cm이며, 한 줄에 41자를 새겼고,
전체는 50행이다. 지석은 네 조각으로 깨져있는 상태이므로 일부는 판독이 어렵다.
조충장군은 당대에만 부귀영화를 누렸던 것이 아니라
부친인 조영인(趙永仁)도 타고난 천품이 총명하고,
박학다식한데다 덕망을 갖추고 있어 수많은 관직을 두루 역임하고
1204년에 문하시중이 되어 많은 사람들의 추앙을 받았고,
사후에는 신종(神宗)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조충장군의 아들 계순(季珣)도 학식과 덕망이 뛰어나 관직이 문하시랑평장사에 이르렀을 뿐만 아니라
당대의 집권자인 최항(崔沆)에게 딸을 출가시켜 당대의 제일의 권세가가 되었다.
조충장군은 아버지와 아들 3대에 걸쳐 고려 중기의 명문거족으로 부귀영화를 누리게 되었고,
현재 횡성의 세덕사(世德祠)에 배향되었다.
횡성은 강원도에서도 가장 작은 고을의 하나로 신라시대에는 삭주(朔州)의 영현(領縣)이었으며,
고려시대에는 원주의 속현(屬縣)이었고,
조선태종13(1413)년에 현감(縣監)을 두어 독립된 현이 되었는데,
강원도 26개 군현 중에서 종6품관인 현감이 관할하는 가장 작은 고을의 하나였다.
횡성을 본관으로 한 성씨가 3대에 걸쳐 정승판서(政丞判書)를 배출한 명문거족이다.
//횡성조씨 상장군 문정공 조충(趙冲) 가계//
고조부 중상승 조주조(趙周祚)
증조부 태보(太保) 조정신(趙正臣)
조부 좌복야 조시언(趙時彦)
아버지 문하시중 상장군 문경공 조영인(文景公 趙永仁, 1133~1202)
어머니 파평윤씨, 직사관(直史館) 윤자고(尹子固)의 따님,
형님 좌승선 조준(趙準)
문하시중 상장군 문정공 조충(趙冲, 1171~1220)
배위 창원군부인 동주최씨,
아들 문하시중 상장군 광정공 조계순(光定公 趙季珣)
손자 조식(趙植)
손자 조변(趙抃)
손자 조해(趙晐)
손자 조유(趙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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