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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회암사 무학대사비, 쌍사자석등, 선각왕사비-보물제387호,나옹선사부도비, 지공선사부도비

구름에 달

by 碧巖 2019. 7. 23. 2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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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암사지 쌍사자석등  

회암사지에 있는 조선 초기의 석등.

보물 제389.

높이 250cm. 이 석등은 회암사지부도 앞에 있으며 지대석과 하대석이 하나의 돌로 되어 있다.

4각형의 지대석 위에 받침을 마련하고 그 위에 하대석을 표현했는데,

8엽의 단판복련을 돌렸으며 윗면 중앙에는 각형의 받침이 마련되어 있다.

 

 

벽암 두릉연가

 

 

 

회암사지 무학대사탑 檜巖寺址 無學大師塔

보물 제388

경기도 양주시 회암동 산8-1

경기도 양주시 회암동 회암사(檜巖寺)에 있는 조선 전기 승려 무학대사(無學大師)의 부도.

무학(無學)[1327~1405]은 삼기(三岐)[현 경상남도 합천군 삼가면] 출신으로 속성은 박씨(朴氏)이고,

휘는 자초(自初), 당호(堂號)는 계월헌(溪月軒)이다.

 

 

1344(충혜왕 복위 5) 18세에 출가하여, 혜명국사(慧明國師)에게 불법을 배웠고,

1346(충목왕 2) 부도암에 머물면서 깨달음을 얻었다.

이후 진주 길상사(吉祥寺)와 묘향산 금강굴(金剛窟) 등에서 수도 생활을 하고,

1353(공민왕 2) 원나라 연경(燕京)으로 가서 원에 와 있던 지공(指空)과 나옹(儺翁)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1356(공민왕 5) 귀국하여 나옹의 법을 이어받았는데,

1376(우왕 2) 나옹이 회암사에서 낙성회(落成會)를 열 때 수좌(首座)로 초청하였으나 사양하였다.

1392(태조 1) 조선 개국 후 왕사가 되어 회암사에서 거처하였다.

1393년 태조를 따라 계룡산과 한양을 오가며 지상(地相)을 보고 도읍을 한양으로 옮기는 데 자문을 하였으며,

1397(태조 6) 왕명으로 회암사 북쪽에 수탑(壽塔)을 세우고,

1402(태종 2) 회암사 감주(監主)가 되었다가

1403년 사직하고 금강산 금장암(金藏庵)에 머물다가

1405(태종 5) 입적하였다.

 

양주 회암사지 무학대사탑(楊州檜巖寺址無學大師塔)과 함께 서 있는

무학대사 비(無學大師碑)의 기록에 따르면,

무학이 입적한 지 2년 만인 1407(태종 7)

조선 불교계를 주도하였던 고승 무학대사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부도가 건립되었다.

 

 

 

 

 

 

 

양주 회암사지 무학대사비(楊州 檜巖寺址 無學大師碑)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1호]

경기도 양주시 회암동 산8-1에 있는 조선 전기 무학대사(無學大師)의 사적비.

 

무학대사[1372~1405]는 고려 말~조선 초의 이름난 승려로, 이름은 자초(自超)이고 호가 무학(無學)이다.

18세에 출가하여 소지선사(小止禪師) 아래로 들어가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으며,

혜명국사(慧明國師)에게서 불교의 교리를 배운 후 묘향산에서 수도하였다.

1392(태조 1)에는 태조의 부름을 받고 스승이 되어 도읍지를 물색하기도 하였다.

이후 회암사(檜巖寺)에서 머물다가 금강산의 금장암(金藏庵)에서 입적하였다.

    

 

처음에 만들어진 비석의 지붕과 받침 부분 바로 옆에 중건비가 만들어져 있는데,

비석에 써 있는 내용을 통해 처음 비석은 1410(태종 10)에 제작되었고,

1828(순조 28)에 중건비가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1821(순조 21) 광주의 유학(幼學) 이응준(李膺峻)

회암사의 부도와 비석을 파괴하고 사리를 훔친 후 그 자리에 자신의 아버지를 묻었는데,

관찰사가 이 사실을 조정에 보고하니 이를 두고 조정 대신들 사이에서 사형에 처해야 한다는 논의가 일었다.

이에 당시 임금인 순조가 이응준을 섬에 유배하고

그 무덤을 파 버리라 명하면서 무학대사비(無學大師碑)를 다시 세운 것이다.

 

조선 왕조 개창의 주역인 무학대사의 행적을 담은 사적비로,

생애와 업적, 비석의 파손 과정과 중건비를 세우게 된 경위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비문은 세종 때 학자로 알려진 문숙공 춘정 변계량((文肅公 春亭 卞季良)이 짓고 공부(孔俯)가 썼으며,

추도비 음기(陰記) 부분은 김이교(金履喬)가 짓고 김겸(金鎌)이 썼다.

비문의 기록으로 무학대사 부도가 1407(태종 7)에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무학대사비는 1974926일 경기도 유형 문화재 제51호로 지정되었다.

 

무학대사비의 음기에

각수(刻手) 박지춘(朴枝春)

석수(石手) 박종석(朴宗錫문수조(文守兆)라는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기술력을 중시하였던 조선 후기 당시

사회상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으로서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

 

 

 

 

 

 

 

 

 

양주 회암사 지공선사부도비楊洲 檜巖寺指空禪師浮屠碑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35

 

 

 

 

 

 

지공선사부도비

20041129일 경기도의 문화재자료 제135호로 지정되었다.

지공선사의 부도 앞에 있는 이 부도비는 지공선사의 유래를 기록한 비이다.

원래의 부도비는 이색이 찬하고 한수가 글씨를 써서 1378(우왕 4)에 건립하였다.

현재 남아있는 부도비의 건립연대는 '숭정기원후사무자오월 일립'으로 기록되어 있어,

1828(순조 28)에 중건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부도비 옆에는 비의 귀부가 나란히 배치되어 있는데,

이것이 원래 지공선사 부도비의 귀부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관련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부도비 형태는 옥개석·비신·비좌·지대석의 구조이다.

 

 

지공선사(指空禪師)는 인도 출신의 승려로,

중국의 여러 지방을 순례하고 고려에 들어와서 당시 불교 사상과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고승이다.

지공선사는 1326(충숙왕 13) 3월부터

1328(충숙왕 15) 9월까지 고려에 머물면서 여러 사찰을 방문하였는데,

그 중 회암사는 지공선사가 불법을 펼친 중심 도량으로 가장 중요한 곳이었기 때문에 부도를 건립하게 되었다.

 

목은집(牧隱集)서천제납박타존자부도명(西天提納薄陀尊者浮屠銘)

고려사(高麗史)의 관련 기사에 의하면,

지공(指空)의 유골을 왕이 친히 왕륜사(王輪寺)로 가서

불치(佛齒)와 지공의 두골(頭骨)을 머리에 이고 궁중으로 옮겼다고 한다.

고려로 옮겨진 지공의 유골은 양주 회암사를 비롯하여

묘향산(妙香山) 안심사(安心寺), 장단(長湍)[현재의 개성]의 화장사(華藏寺), 3곳의 부도에 봉안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회암사에 위치하는 지공선사의 부도는 1372(공민왕 21)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지공선사 부도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49호

 

 

 

 

 

나옹선사 부도 및 석등 懶翁禪師 浮屠 石燈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0

 

 

 

 

나옹선사 부도 및 석등 懶翁禪師 浮屠 石燈

나옹선사[1320~1376]의 성은 아씨(牙氏), 속명은 원혜(元惠),

휘는 혜근(慧勤), 호는 나옹(懶翁)·강월헌(江月軒), 시호는 선각(先覺)이다.

()에서 유학하면서 스승인 지공(指空)에게서 무심선(無心禪)을 익히고

당시 중국 불교의 대세였던 임제종(臨濟宗)을 배웠다.

15년간의 유학을 마치고 고려로 귀국하여

1372(공민왕 21) 왕사(王師)에 올라서

유학을 통해 수학(修學)한 새로운 불교 사상을 바탕으로 당시 불교계를 주도하였다.

1372년 국왕의 후원을 바탕으로 회암사를 대대적으로 중창하다가,

1376(우왕 2)에 여주 신륵사(神勒寺)에서 입적하였다.

 

나옹선사의 비()인 선각왕사비(禪覺王師碑)의 내용에 따르면 나옹이 입적하고 4년 후인

1381(우왕 7)에 세워졌다고 하므로, 나옹선사 부도 역시 이때 함께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나옹선사 부도와 그 비인 선각왕사비는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서로 떨어져 있다.

 

 

 

 

 

 

 

 

회암사지 선각왕사비 檜巖寺址 禪覺王師碑

경기도 양주시 회암동 산7

고려 후기 선각왕사(禪覺王師) 나옹(儺翁)의 부도.

보물 제387

 

 

회암사지 선각왕사비 檜巖寺址 禪覺王師碑  

나옹[1320~1376]1344(충혜왕 복위 5) 회암사(檜巖寺)로 들어가 불교에 입문하였다.

1358(공민왕 7) 원나라에서 돌아와 왕의 부름을 사양하고,

구월산과 금강산 등에서 은거하다가 회암사로 다시 돌아와 절을 크게 새로 지어 올렸다.

1376(우왕 2) 경기도 여주 신륵사(神勒寺)에서 57세로 입적할 때까지 불법만을 행하였으며,

입적한 후 시호를 선각(禪覺)이라 하였다.

 

양주 회암사지 선각왕사비(楊州檜巖寺址禪覺王師碑)는 나옹이 죽은 이듬해인 1377(우왕 3) 건립되었다.

19973월 천보산에서 발생한 산불로 인해 보호 비각이 불타면서 비석 역시 심하게 파손됨에 따라,

국립문화재연구소 보존과학연구실로 옮겨 약 3년간 보존 처리 과정을 거쳐 복원되었다.

복원된 비는 경기도박물관을 거쳐 현재 조계사(曹溪寺)의 중앙불교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19998월 원래의 부도비를 대신해 그 자리에 모조 부도비를 세워 놓았다.

 

 

양주 회암사지 선각왕사비는 현재의 회암사 왼편 산등성이에서 북쪽으로 50m 지점에 남향하여 서 있다.

나옹선사 부도 및 석등은 반대편인 회암사 오른편 산등성이 능선 제일 윗부분에 자리한다.

비의 양식은 당나라의 비 형식을 따랐으며,

특이한 것은 비의 몸돌과 머릿돌인 이수가 별개의 돌이 아니라 하나의 돌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규모는 전체 높이가 315, 너비가 106, 두께가 22이고, 이수 부분 높이는 82이다.

거북 받침은 높이 71, 가로 171, 세로 222이며, 비석 받침은 높이 16, 124, 두께 50이다.

  

 

비문은 목은 이색(牧隱 李穡)이 짓고,

문절공 동고 권중화(文節公 東皐 權仲和)가 예서로 썼으며 전액도 권중화가 썼다.

나옹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는 내용이 담겨져 있다.

    

양주 회암사지 선각왕사비 건립 당시는 중국에서도 원나라와 명나라를 통틀어 예서가 쓰이지 않았던 때였기에, 당시 우리나라의 예서 연구 수준을 짐작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동국금석평(東國金石評)에서 나옹 비는 팔분서(八分書)인데,

매우 정리가 잘되어 있지만 신비로운 글씨체는 아니다라고 평하였으나,

결구(結句)도 엄정하고 필력도 씩씩하고 굳세어 예법을 깊이 터득한 것으로서,

중국의 희평석경(熹平石經)을 방불케 하는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양주 회암사지 선각왕사비 모조비  檜巖寺址 禪覺王師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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