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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천-교정별감 장열공 임연장군 사적비 敎定別監 莊烈公 林衍將軍 史蹟碑

구름에 달

by 碧巖 2020. 3. 12. 0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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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정별감 장열공 임연장군 사적비  敎定別監 莊烈公 林衍將軍 史蹟碑

충북 진천군 진천읍 산척리 483-15




                          高麗莊烈公林衍將軍史蹟碑

                          고려장열공임연장군사적비



이곳은 고려 元宗(원종)(12591274)때에 版圖判書兼敎政別鑑(판도판서겸교정별감)을 지낸

將烈公林衍將軍(장열공 임연장군)邸宅(저택)農莊(농장)이있던 遺跡地(유적지)이다.

임연장군은 진천군 문백면 구곡리 구산동에서 출생하였으며,

어릴 때의 이름은 承柱(승주)이고 謚號(시호)將烈公(장열공)으로,

고려 건국에 공을 세워 興化府院君 常山伯(흥화부원군 상산백)策封(책봉)林晞(임희)後孫(후손)이다.

임연 장군은 蒙古軍(몽고군)이 침입해 오자 鄕里(향리)의 청년들을 규합하여 몽고군을 격퇴한 공으로,

官職(관직)에 오른 후, 무인정권 말기에는 衛社功臣(위사공신)()해지고

이어 敎定別監(교정별감)에 임명되어 당대 최고의 집권자가 되었다.

이를 계기로 장군의 고향인 진천군은 彰義縣(창의현)으로,

다시 知義寧郡事(지의녕군사)로 두 차례에 걸쳐 승격되기도 하였다.

 蒙古侵入 時(몽고침입 시) 장군은 끝까지 對蒙抗爭(대몽항쟁)을 결의하고 高麗軍(고려군)을 독려하였으나

당시 조정의 내분으로 성공하지 못하고 끝내는 千秋(천추)()을 품은 채 서거하니

高麗 元宗(고려 원종) 十一월의 일이다.

옛 문헌에 의하면 임연 장군은

자신의 고향이었던 이곳 일대에 커다란 邸宅(저택)을 짓고 주변을 農莊(농장)으로 경영하였는데,

장군 서거 후 ()에서

그 저택을 없애고 커다란 저수지(堤堰제언)를 만들었으니 이를 東湖(동호)라 불렀다고 한다.

그 후 오랫동안 돌보지 아니하여 폐허화되었던 것을

최근에 관계시설로 크게 수축하고 耕地整理(경지정리)를 하여 옛 모습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이제 將軍(장군)後孫(후손)

鎭川宗親會長 昌燮(진천종친회장 창섭)() 基源(기원), 基承(기승(載承재승))

垈地買入費(대지매입비)獻誠(헌성)하고 祠宇保存會(사우보존회) 鄕里(향리)有志(유지)들이 중심이 되어

문화유산의 보존을 위하여 東湖(동호)의 일부를 복원하고,

將軍(장군)에 대한 追慕(추모)의 뜻을 기리고자 작은 정성을 모아 이 史蹟碑(사적비)를 세운다.

西紀2002(壬午)四月 日

忠北大學校 博物館長 文學博士 申虎澈  撰(문학박사 신호철) 삼가 짓고

東萊人 松泉 鄭夏建 書(동래인 송천 정하건) 쓰 고

林衍將軍 史蹟碑 建立委員會 (임연장군 사적비 건립위원회) 세우다


고려 태조 왕건을 도와 개국공신에 오른

벽상삼중대광 흥화부원군(興化府院君) 상산백충숙공(忠肅公林曦) 임희(林曦)의 후예인

장열공 임연(莊烈公 林衍)[?~1270]은 지금의 진천군 문백면 구곡리에서 태어났다.

벌과 같은 눈매와 승냥이 같은 소리를 내는 즉 봉목시성(蜂目豺聲)의 험상궂은 인상을 가졌으며

어려서부터 재빠르고 힘이 세어 능히 몸을 엎드려 팔로 다니며 기와를 지붕 위로 던졌다고 한다.

일찍이 판장작감사(判將作監事) 송언기(宋彦琦)[1204~1247]의 아우인

대장군 송언상(宋彦祥)의 군중(軍中)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양졸(養卒)로 일하다가 고향에 돌아가 있었는데,

때마침 쳐들어 온 몽골군을 고향 사람들과 함께 물리친 공로로 대정(隊正)이 되었다고 한다.


그 뒤 김준(金俊)에게 발탁되어 낭장()에 올랐으며, 그 신임을 바탕으로 권세를 갖게 되었다고 한다.

임연은 김준을 아버지, 김준(金俊)의 동생 김충(金沖)을 숙부로 부를 만큼 밀접하게 지냈다고 한다.

1258(고종 45) 김준(金俊), 유경(柳璥) 등과 공모하여 당시의 권신(權臣)인 최의(崔竩))를 죽이고

정권을 왕실에 돌려준 공으로 위사공신(衛社功臣)에 녹훈되었고,

관직도 도령낭장(都令將), 상장군을 거쳐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에 올랐다.

그리고 임연의 향리인 진천도 창의현(彰義縣)으로 승격되고 현령이 파견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임연의 정치적 지위가 상승하자 임연은 견제를 받게 되며 정치에서 소외되기 시작되었다고 한다.

때마침 정권을 장악한 김준이 정치를 마음대로 하면서

국왕 원종이 김준을 제거할 뜻을 품고 그에 대적할 만한 인물로 임연을 주목하였다고 한다.

1268(원종9) 임연(林衍)은 아들 임유무와 함께 환관 강윤소(康潤紹), 최은(崔嗯), 김경(金鏡)의 도움을 받아

김준(金俊)을 죽이고, 그 아들들과 무리들도 죽이거나 유배를 보냈다고 한다.

      그럼으로써 사실상 임연의 집권시대가 열리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임연의 세력의 커지는 것을 두려워한 원종이 다시 측근인 김경, 최은 및

어사대부 장계열(張季烈)과 대장군 기온(奇蘊) 등을 규합하여 임연을 제거하고자 하였다고 한다.

이에 임연은 야별초(夜別抄)를 보내어 이들마저 제압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원나라와 화의가 진전되어 자신의 위치가 불안해지고 왕과의 사이도 벌어지자,

삼별초와 육번도방(六番都房)을 집결시켜 놓은 상태에서 재추(宰樞)와 왕의 폐립을 의논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원종 대신 그의 동생 안경공(安慶公) 왕창(王淐)을 옹립하고

자신은 교정별감(敎定別監)이 되어 정치·군사의 실권을 장악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임연에 의한 원종의 폐위 사건은 많은 반발을 가져왔다고 한다.

먼저 서북면병마사의 영리(營吏)인 최탄(崔坦)이 반발하여 한신(韓愼)과 함께 난을 일으켰다 한다.

이에 용강(龍岡), 함종(咸從) 등 상당수의 현()이 이 난에 호응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열세에 몰린 최탄이 원나라에 항복해 버렸는데,

원나라에서는 이를 계기로 자비령 이북 지방을 내속(內屬)시켜 동녕부(東寧府)라 부르고

최탄(崔坦)을 동녕부총관으로 삼는 사태가 발생하였다고 한다.

또한 때마침 원나라에 갔던 세자[충렬왕]가 돌아오다가 압록강에 이르러 원종의 폐위 소식을 듣고

연경(燕京)으로 돌아가서 군대 파견을 요청하고자 하였다고 한다.

이에 임연은 원종의 폐립 사건이 누설될 것을 두려워하여

이장용(李藏用)을 원나라에 절일사(節日使)로 보내 세자를 돌아오게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장용은 오히려 원나라에 가서 왕의 폐립 전모를 상세히 보고했고,

이에 원나라에서 병부시랑 흑적(黑的)을 보내 이를 추궁하자

안경공을 폐하고 다시 원종을 복위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한다.

한편 원종의 폐위 및 복위와 관련된 일련의 과정에서 임연(林衍)의 측근 및 정적들이 반기를 들기 시작하였다.

, 동지추밀원사였던 조오(趙璈)를 비롯하여 친종장군(親從將軍) 윤수(尹秀)가 반기를 들었으며,

유원적(兪元績), 조윤번(趙允潘) 등이 임연을 제거하려고 하였다고 한다.

1269(원종 10) 원종이 흑적을 따라서 연경에 입조(入朝)하러 가게 되자

임연(林衍)은 아들 임유간(林惟幹)을 같이 보냈지만,

원나라 황제는 임연에게 직접 연경에 와서 진상을 밝히라는 공문을 보냈다.

한편 원나라에 입조하였던 원종은 두 나라 사이의 화친을 위해 세자가 원나라의 부마가 될 것과

출륙환도(出陸還都)할 것, 권신의 제거 등을 약속하였고, 다시 원나라 군사의 호위를 받으며 귀국하였다.

이에 임연은 강화 조약을 거부하고 전국에 야별초를 보내 해도입거(海島入居),

즉 백성들을 섬으로 다시 들어가도록 독려하여 항거를 준비하였으나,

이듬해인 12702(원종 11) 임연(林衍)은 등창에서 회복되지 못하고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치었다.

뒤이어 3개월 후에는 임연의 지위를 대신했던 아들 임유무(林惟茂)마저

그의 사위인 홍규(洪奎)와 송송례에게 살해됨으로써 임연(林衍) 정권은 종말을 고하며,

100년간 지속된 고려 무신정권이 막을 내리고 왕정복구와 개경환도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장열공 임연장군(莊烈公 林衍)이 개축한 것으로 전해오는

세금천 농()다리는 홍수와 재해에도 훼손되지 않고 천년을 버티고 서 있으니,

장군의 불굴한 웅지를 보여주고 있다.

장군이 서거한 후 국권은 쇠약하고 몽고의 말굽에 천하를 유린당하여 몽고에 항복하니,

고려 자주독립국의 상징인 최고 통치권자의 칭호가 종()에서 왕()으로 격하(格下)되었다.

(고려 1~24대까지 종(), 25~33대까지 왕()으로 칭())



임희林曦 흥화부원군(興化府院君) 상산백 충숙공(忠肅公林曦)

임연林衍 장열공莊烈公 [?~1270]

1대손 임유무林惟茂,임유간林惟幹, 임유인林惟栶, 임유거林惟柜, 임유제林惟提

2대손 임간林侃 봉익대부 우문관대제학 대사성奉翊大夫右文館大提學 大司成

3대손 임희정林希正 금자광록대부 우찬성金紫光祿大夫 右贊成

4대손 임지林智 상산군常山君

5대손 임구林球 호조참의 교주도 안렴사 戶曹參議 交州道 安廉使

6대손 임득제林得齊 광주목사 전구서령光州牧使 典廐署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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