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산서원(陶山書院)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도산서원길 154, (도산면 토계리 679-3)
도산서원(陶山書院) - 사적 제170호
도산서원 전교당(陶山書院 典敎堂) - 보물 제210호
도산서원 상덕사 및 삼문(陶山書院 尙德祠 및 三門) - 보물 제211호
도산서원의 건축물은 크게 도산서당(陶山書堂)과 이를 아우르는 도산서원(陶山書院)으로 구분된다.
도산서당은 퇴계 이황(退溪 李滉)선생이 몸소 거처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이고,
도산서원은 퇴계선생 사후 건립되어 추증된 사당과 서원이다.
聾巖歌碑농암가비
도산서원으로 향하는 길가에 세워져 있는 ‘농암비’로서
농암(聾巖)이 고향에 돌아와 자연에 취하여 유유하면서 귀먹바위인 ‘농암’에 올라 읊은 ‘농암가’이다.
농암(聾巖)애 올아보니 노안(老眼)이 유명(猶明)ㅣ로다
인사(人事)ㅣ 변(變)한들 산천(山川)이 또 가실까
암전(巖전)의 모수모구(某水某丘)는 어제 본 듯 하여라
(물가에 우뚝 솟은 바위에 올라 사방을 보니 늙은이의 눈이 오히려 밝게 보이는구나.
사람들이 하는 일에는 변화가 있지만 자연의 경치야 변함이 있겠는가?
바위 앞에 있는 이름 모를 산과 언덕은 오랜 만에 보지만 어제 본 듯 변함이 없구나.)
♧ 효절공 농암 이현보(孝節公 聾巖 李賢輔, 1467~1555) 선생은
영남사림(嶺南士林) 으로 중앙정계에 진출한 첫 세대였다고 한다.
1498년(연산군4) 32세에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라
1523년(중종18) 57세에는 성주목사로 선정을 베풀어 표리(表裏)를 하사받았다.
이후 병조참지, 동부승지, 부제학 등을 거쳐 대구부윤, 경주부윤, 경상도관찰사, 형조참판, 호조참판을 지냈다.
1542년(중종 37) 76세 때 지중추부사에 제수됐으나 병을 사유로 벼슬을 그만두고
만년에 안동 예안으로 귀향해 관직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연과 어울리는 기쁨을 노래했다.
마을 앞 낙동강변 농암(일명 귀머거리 바위)에 올라 산천을 두루 살피니 자신의 옛 자취가 너무나 의연함에 감탄하고
소싯적 눈에 익은 자연물을 보고 오랫동안 품었던 소회를 밝힌다. 그것이 [농암가] 이다
지금은 안동댐 건설로 농암은 물에 잠겨 있다
농암(1467~1555) 선생이 35세 되던 해 1501년에 안동 예안면 분천리 옆마을 온혜리에는
동방의 대학자 이퇴계(1501~1570) 선생이 태어났다
농암은 퇴계에게 고향선배로서 많은 길잡이가 되어 주었다 한다.
석간대 가는 길
磵石臺 踏靑 간석대 답청 (간석대에서 답청놀이를 하다. ) 퇴계 이황(退溪 李滉 )
擘開靑石出飛泉
벽개청석출비천 푸른 바위 쪼개져 폭포가 떨어지니
山斷如門水抱前
산단여문수포전 산 나뉘어 문 같고 물이 앞을 감쌌네
擬作蘭亭追勝會
의작난정추승회 난정회 같은 좋은 모임 쫒으려 하다보니
憶陪鳩杖破荒烟
억배구장파황연 농암선생 모시고 황량한 안개 속 걷던 일 생각나네
仙遊不與雲俱返
선유불여운구반 신선되어 가신 뒤로 구름타고 돌아오지 않으시니
樂事無端感自纏
락사무단감자전 즐거운 일에 무단히 감개 절로 얽혀드네
壘石作臺非好事
누석작대비호사 돌을 쌓아 대 짓는 일 호사가 아니나
欲將陳跡永流傳
욕장진적영류전 옛 자취를 길이 전하고자 함일세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1570) 선생이 62세이던 1562년 3월 3일에 석간대에 와서
농암 이현보(聾巖 李賢輔, 1467~1555) 선생을 모시고 예전에 노닐던 감회를 읊은 시다.
석간대(石澗臺)
석간대는 당나리 시인 유상(劉商, ? 8세기 후반)의 시를 바위에 새긴 곳이다.
퇴계(1501~1570)선생은 도산서당을 찿아온 손님을 이곳에서 전송했다고 한다.
1562년 퇴계선생의 제자 사천인(泗川人) 구암 이정(龜巖 李楨, 1512~1571)이 사흘 동안 머물다 떠날 때
퇴계 선생은 이별의 아쉬운 마음을 담아 석별의 애틋함과 재회의 간절함을 바라는 심경을 가장 잘 표현한
당나라 시인 유상의 시를 적어 주었는데 이 시를 후인들이 1595년 2월 단을 쌓고 바위에 새겼다.
君去春山誰共遊
군거춘산수공유 그대 가니 이봄을 누구와 더불어 노닐까
鳥啼花落水空流
조제화락수공류 새 울고 꽃 떨어져 물만 흐르네
今朝送別臨流水
금조송별임류수 오늘 아침 물가에서 그대를 보내노니
他日相思來水頭
타일상사래수두 그리워 만나려면 물가로 다시 오리
천광운영대〔天光雲影臺〕
도산서원 양편 산기슭에는 절벽이 있는데, 퇴계가 자연의 이치를 깨닫고 몸과 마음을 수양하기 위해 산책하던 곳이다.
퇴계는 서쪽 절벽을 천광운영대(天光雲影臺), 동쪽 절벽을 천연대(天淵臺)라 불렀다.
천광운영대는 주자(朱子)가 지은 관서유감(觀書有感)이란 시에 나오는
‘하늘과 빛과 구름의 그림자가 함께 감도는구나’ 라는 천광운영공배회(天光雲影空排徊)’ 구절에서 이름을 지었다.
천연대는 ‘시경(詩經)’에 나오는 ‘솔개는 하늘 높이 날아오르고, 물고기는 연못에서 뛰노네’라는
연비려천 어약우연(鳶飛戾天 漁躍于淵) 구절에서 하늘 '천'과 연못 '연'을 따서 지었다.
두 이름에는 주변의 절경과 퇴계가 말년에 이곳에서 자연의 이치를 벗 삼아 학문을 성취하려던 뜻을 담고 있다.
천광운영대〔天光雲影臺〕 -고봉 기대승(高峯 奇大升)-
滄波凝湛寫天光
창파응담사천광 창파는 맑게 어려 하늘빛 비쳤으니
何似當年半畝塘
하사당년반무당 당년의 반묘 방당과 어떠하뇨
固是靜深含萬象
고시정심함만상 진실로 고요하고 깊어 만상을 함축하니
誰知溥博發源長
수지부박발원장 넓고 넓어 발원이 긺을 뉘라 알리오
[주-D001] 천광운영(天光雲影) :
주자(朱子)의 시 〈관서유감(觀書有感)〉에
“반묘의 네모난 연못 한 거울처럼 열렸는데, 하늘빛과 구름 그림자가 함께 배회하네.
묻노니 저 어찌 이렇듯이 맑은가? 근원에 활수가 있기 때문이라네.
〔半畝方塘一鑑開 天光雲影共徘徊 問渠那得淸如許 爲有源頭活水來〕” 라 하였다
여기서 반묘의 네모난 연못은 사람의 마음을 방촌(方寸)이라고 말하는 것에 비겨서 일컬은 것이라 한다.
천광운영대에서 바라본 시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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