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안동-도산서원(陶山書院) 2-열정(洌井), 진도문(進道門), 광명실(光明室), 동재 박약재(博約齋), 서재 홍의재(弘毅齋), 전교당(典敎堂)

구름에 달

by 碧巖 2022. 8. 7. 22:18

본문

728x90

도산서원(陶山書院)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도산서원길 154

도산서원(陶山書院) - 사적 제170호

 

도산서원 중수기념비

열정(洌井)

열정은 도산서당이 있을때부터 식수로 사용하던 우물이다.

열정이란 이름은 『역경(易經)』에 나오는

‘물이 맑고 차가우니 마실 수 있다.(井洌寒泉食,정열한천식)’라는 구절에서 따왔다.

그리고 퇴계는 “서당의 남쪽에 맑고 차며 단맛의 옹달샘이 있다.

                          (書堂之南 石井甘洌,서당지남 석정감열)”이라며 열정과 관련한 시를 짓기도 하였다.

우물은 마을이 떠나가도 옮겨가지 못하고, 아무리 물을 퍼내도 줄지 않으며, 오가는 사람 모두가 마실 수 있다.

이와 같이 세상에 널린 지식을 부단한 노력으로 쌓아 우물과 같이 사회에 꼭 필요한 인재가 되라는 뜻을 담고 있다.

 

도산서원(陶山書院) - 사적 제170호

도산서원 전교당(陶山書院 典敎堂) - 보물 제210호

도산서원 상덕사 및 삼문(陶山書院 尙德祠 및 三門) - 보물 제211호

 

도산서원의 건축물은 크게 도산서당(陶山書堂)과 이를 아우르는 도산서원(陶山書院)으로 구분된다.

도산서당은 퇴계 이황(退溪 李滉)선생이 몸소 거처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이고,

도산서원은 퇴계선생 사후 건립되어 추증된 사당과 서원이다.

도산서당은 1561년(명종 16)에 설립되었다.

퇴계선생이 낙향 후 학문연구와 후진 양성을 위해 지었으며

서원 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퇴계선생이 직접 설계하였다고 전해진다.

이때 유생들의 기숙사 역할을 한 농운정사(隴雲精舍)와 부전교 당속시설인 하고직사(下庫直舍)도 함께 지어졌다.

 

1570년 퇴계 선생이 돌아가시자 1572년에 선생의 위패를 상덕사(尙德祠)에 모실 것을 결정하였다.

1574년(선조7) 지방유림의 공의로 도산서당의 뒤편에 창건하여 퇴계 이황(退溪 李滉)의 위패를 모셨으며,

1575년 선조로부터 석봉 한호(石峯 韓濩)가 쓴 '도산'(陶山)의 사액을 받았다.

영남유림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였으며,

1615년(광해군 7) 사림이 월천 조목(月川 趙穆)을 같이 모셨다.

1792년(정조 16) 정조 임금이 치제(致祭)를 내리고 도산별과(陶山別科)를 시행하였으며,

1796년(정조 20) 시사단 (試士壇)을 세우고,

1819년(순조 19) 장서고(藏書庫)인 동광명실(東光明室) 건립하였다.

1870년(고종 7)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서도 제외되었으며,

1930년(경오년) 서광명실(西光明室) 증건(增建)하였고

1932년(임신년) 하고직사(下庫直舍) 이건하였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 당시에도 훼철되지 않고 존속한 47개 서원 중의 하나였다.

 

1969~70년 정부의 고적보존정책에 따라 성역화 대상으로 지정되어 대대적인 보수를 하였다.

경내의 건물로는

문순공 퇴계 이황(文純公 退溪 李滉, 1501~1570)

제자 월천 조목(月川 趙穆, 1524~1606)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는 상덕사(尙德祠, 보물 제211호),

서원의 강당인 전교당(典敎堂, 보물 제210호),

향례 때 제수를 두던 전사청(典祀廳), 유생들이 거처하던 동재홍의재(東齋 弘毅齋), 서재 박약재(西齋 博約齋),

장서를 보관하던 광명실(光明室), 장판각(藏板閣),

퇴계 이황이 제자들을 가르치던 도산서당,

제자들이 거처하면서 공부하던 농운정사(隴雲精舍) 등이 있다. 매년 봄과 가을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1969년 본 서원을 중심으로 임야 및 전답 19필 324.945㎡이 사적으로 지정되었고,

1970년부터 대통령령으로 보수와 증축 사업을 진행하였으며 우리나라 유학사상의 정신적 고향으로 성역화 되었다.

1977년 도산서원관리사무소가 설치되고 관리운영조례를 제정 공포한 이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월천 조목(月川 趙穆 ; 1524-1606)

조선중기의 학자 조목(趙穆 ; 1524-1606)의 자는 사경(士敬), 호는 월천(月川)·동고(東皐), 본관은 횡성(橫城)이다.

참판 조대춘(趙大椿)의 아들로 예안(禮安)에서 살았다.

15세에 퇴계 이황(退溪 李滉)의 문하에서 수업하였는데,

학문은 물론이고 처신함에 있어 예법에 어긋남이 없었으므로 스승이 그를 매우 아꼈다고 한다.

1552년(명종 7) 29세에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있을 때

"과문(科文)이란 노친을 위하여 공부하는 것이나 도학(道學)이란 이것이 아니다."하며

과거공부를 그만두고 학문에 더욱 정진하여 마침내 대유(大儒)가 되었다.

그는 1566년 천거로 공릉참봉(恭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1568년에 집현전참봉(集賢殿參奉)에 제수되어 부임하였다가 곧 사퇴하였다.

그 후 1572년부터 1584년까지 여러 벼슬에 제수되었으나 대부분 나아가지 않고 혹 부임했다 할지라도 곧 사퇴하였다.

40여 년 관직을 가졌어도 실제로 취임한 기간은 모두 합해 4년 미만이었다.

예안의 도산서원(陶山書院)과 봉화(奉化)의 문암서원(文巖書院) 등에 배향되였다.

                    陶山書堂도산서당                                                                     巖栖軒암서헌

      光明室광명실                        進道門진도문                         光明室광명실-- ‘수많은 책들이 밝고 환하게 비추어 준다.

도산서원 동재 박약재(博約齋)

도산서원 유생들이 거처하면서 공부하던 기숙사로서 상급생은 동재인 박약재(博約齋)에서 기거한다.

 도산서원 서재 홍의재(弘毅齋)

도산서원 전교당(典敎堂)   보물 제210호

전교당은 도산서원의 강당으로 1574년에 건립되었다.

전교당은 대청과 서쪽에 한존재(閑存齋)라는 온돌방이 있다.

도산서원의 원장이 머물르던 한존재의 문을 들어올리면 대청까지 트인 넓은 공간이 확보된다.

정면에 걸린 도산서원(陶山書院) 현판은1575년 선조가 내려주었으며 글씨는 석봉 한호(石峯 韓濠)가 썼다.

전교당 서쪽 계단 옆에는 높게만든 돌기둥 위에 반원 모양의 돌을 받쳐 놓았는데

이것은 야간에 행사할 때 불을 밝히던 정료대(庭燎臺)이고,

전교당 동쪽 후면 높은곳엔 사당인 상덕사(尙德祠)가 있다.

 

閑存齋한존재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