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이씨 경무공 이제 교서비, 이제 개국공신 교서비(李濟 開國功臣 敎書碑)
흥안군 경무공 이제(興安君 景武公 李濟)
경남 산청군 단성면 남사리 342-1
흥안군 경무공 이제(興安君 景武公 李濟)
려말선초의 왕족. 고려 말의 권신인 이인임의 조카로, 조선 개국공신이다.
태조 이성계(太祖 李成桂,1335~1408)와 경처 신덕고왕후 강씨 사이의 장녀인
경순공주(慶順公主)와 결혼했고
1392년 여름 음력 4월 이방원(李芳遠), 의안대군 이화(義安大君 李和, ?~1408)를 포함한
여러 명과 함께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1338~1392)를 죽이는 일에 대해 모의했으며,
같은 해 음력 7월 17일 이성계가 왕에 올라 조선이 건국된 후,
음력 8월 7일에 흥안군(興安君)에 봉해지고 의흥친군위 절제사가 되었다.
1392년 음력 8월 20일에 개국공신 1등에 책봉되었고,
1393년 음력 3월 18일에는 남은(南誾), 이지란(李之蘭) 등과 함께
왜구를 막기 위해 경상도에 파견되었으며, 음력 10월 17일에 우군 절제사가 되었다.
1395년 음력 4월 4일에 감정에 따라 서부령 권상을 때린 일이 있었지만 아무도 말하지 못했으며,
1398년에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면서 이방원 일파의 공격을 받아 살해당했다.
자신은 세자 이방석(李芳碩)의 매형이므로
무사하지 못할 것을 알고 칼을 들고 싸우도록 허락해 달라고 태조에게 청했다.
당시 의흥친군위 절제사로서
중앙군의 지휘권을 가지고 있던 그였기에 맞서 싸운다면 해 볼만 했을 것이다.
박위(朴葳) 등 친위병력 지휘자들도 상황을 살피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방원에게 붙은 태조의 이복동생 의안대군 이화(義安大君 李和)의 비협조와
내부 교란으로 무력 대응은 수포로 돌아갔다.
살해당하기 전에 부인인 경순공주(慶順公主)가
이방원(李芳遠)의 일파에 가담하면, 반드시 살 것이라 했지만 이를 듣지 않았다.
무안대군 이방번(撫安大君 芳蕃)과 마찬가지로
그도 이방원을 지지했으면 적어도 목숨은 건졌을 거라는 아쉬움을 남긴다.
다만 본인은 의안대군 이방석(宜安大君 李芳碩)의 매부였기에 살아남을 수 없다고 여겼고,
아예 대놓고 이방원(李芳遠)과 싸우게 해 달라고 한 만큼 더더욱 그렇게 생각한 모양이다.
슬하에 자녀가 없어서 사후 세종의 명으로
동생 이발(李發)의 아들인 이윤(李潤, 1398~1456)을 양자로 들였다
태조대왕이제교서(太祖大王李濟敎書)
純忠佐命開國一等功臣 興安君兼義興親軍衛節制使 知書筵事李濟
순충좌명개국일등공신 흥안군겸의흥친군위절제사 지서연사이제
이제개국공신교서(李濟開國功臣敎書) 는 국보 324호이다.
조선 태조가 경무공 이제에게 1392년(태조원년)에 내린 최초의 공신교서로서,
이제(李濟, 1365-1398)는 태조의 첫째 사위이며
조선개국공신 1등으로 흥안군(興安君)에 봉해지고,
의흥친군위절제사가 되었다. 시호는 경무공(景武公)이다.
진본은 국립진주박물관에 보관중이다.
교서는 국왕이 신하에게 내리는 문서로
공신도감(功臣都監)이 국왕명의로 발급한 녹권(錄券)에 비해 위상이 높다.
조선 초 개국공신녹권으로는
국보 232호 이화개국공신녹권(李和開國功臣錄券) 등 8점이 전하나
개국공신교서는 이제개국공신교서가 유일하다.
고려국왕지인(高麗國王之印)이라는
공민왕 19년에 명(明)에서 내린 어보(御寶)가 찍혀 있다.
우람한 비석은 이제개국공신교서 원본에 기초하여
비석에 새긴 이제 개국공신교서비(李濟 開國功臣敎書碑)이다.
현존하는 유일의 조선 개국공신교서 원본이며,
조선 개국 초 왕명문서의 첫 사례로서 주목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고려 말 명나라에서 보내온 ‘고려국왕지인’(高麗國王之印)이라는 어보가
조선 초 문서에 사용된 유일한 사례로서 특히 주목되며
조선 초 공신교서의 장황에 대해 살펴 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이제 개국공신교서는 발견이후
경무공 이제(李濟)의 종손가에 의해 소중히 보관하다가
문화재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국립진주박물관에 그 원본이 보관되어 있다.
그 원본에 기초하여 이 비석에 새겨 후세에 전 하고져 함이다.
//성주이씨 흥안군 경무공 이제(興安君 景武公 李濟) 가계//
고조부 농서군공 이장경(隴西郡公 李長庚), 성주이씨 중시조
증조부 성산부원군 문열공 매운당 이조년(星山府院君 文烈公 梅雲堂 李兆年,1269~1343)
조부 문하시중 성산군 이포(星山君 李褒)
백부 이인복(李仁復)
백부 성산군 문숙공 이인임(李仁任)
백부 이인미(李仁美)
숙부 이인달(李仁達)
숙부 이인민(李仁敏)
부친 대제학 성산군 모은 이인립(星山君 慕隱 李仁立,1333~1387)
모친 혜령옹주(惠寧翁主)
동생 병조판서 간평공 이발(簡平公 李發,1372~1426)
흥안군 경무공 이제(興安君 景武公 李濟,1365~1398)
배위 경순공주(慶順公主,1370추정~1407), 태조 이성계,신덕고황후 한씨의 장녀
계자 이윤(李潤, 1398~1456), 생부 이발(李發)
손자 이맹순(李孟淳,) 남이장군 역모 연루
손자 이중순(李仲淳), 남이장군 역모 연루
손자 이숙순(李叔淳,1424~1483), 남이장군 역모 연루
손자 이계순(南宜堂 李季淳,1400~1436)
손자 이의순(李義淳,1443~1515)
여사정(餘沙亭) 이제 개국공신 교서비 옆 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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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자 영모당 이윤현(永慕堂 李胤玄)
경남 산청군 단성면 남사리 산 71-1, 도로변
통덕랑 영모당 이윤현(永慕堂 李胤玄1690~1714)은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에서 태어났으며
자(字)는 시로(時老), 호(號)는 영모당(永慕堂)이다.
1706년 (숙종32년) 피접(避接)중인 아버지를 해치려는
화적의 칼을 자신의 몸으로 겨우 막아낸 영모당 이윤현(李胤玄)은
온몸에 부상을 입어 병을 얻어 8년을 견디다
25살의 젊은 나이에 끝내 운명한 효자로 많은 이들에게 모범이 된 인물이다.
이후 그의 효성이 조정에 보고되어
왕명으로 정려가 건립되고 효행실행록(孝行實行錄)이 내려졌다.
훗날 문중에서 마을 안에서 사효재(思孝齋)를 중건하였다.
사효재 마당에 있는 520년된 향나무는
성주이씨 집안과 마을에서 재례를 올릴때 향을 사용하였으며
효심을 후손들에게 전하기 위해 심었다고 한다.
사효재 출입문에는 귀후문(歸厚門)이란 현판이 걸려있다.
귀후문이란 돌아가신 분을 소중히 하면 그 덕이 후한 곳으로 돌아간다는 의미라 한다.
孝子通德郞李胤玄之閭
효자통덕랑이윤현지려
8대조 흥안군 경무공 이제(興安君 景武公 李濟,1365~1398)
증조부 매월당 이하생(梅月堂 李賀生)
통덕랑 영모당 이윤현(永慕堂 李胤玄,1670~16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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