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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령-효자 최광필(崔光弼),항일의사 남호 최상집(南湖 崔相集),강릉최씨,열녀 최성집(崔聖集) 처 전주이씨

구름에 달

by 碧巖 2026. 5. 3. 2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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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자 최광필(崔光弼) 정문각

충남 보령시 웅천읍 대천리 179-42

강릉최씨세천   승지공파

강원도도사 효자 최광필(1553~1608)

본관은 강릉(江陵). 자는 정로(廷老). 예빈시참봉 최사순(崔士淳)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왕손사부 최복경(崔福慶)이고,

아버지는 감찰 최영(崔韺)이며, 어머니는 사헌부감찰 목함(睦諴)의 따님이다.

 

1588년(선조 21) 생원이 되고, 이해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02년 예안현감이 되었고, 1604년 봉상시주부를 거쳐, 1606년 강원도도사(江原道都事)가 되었다. 1607년 강원도도사 재직시 시폐소(時弊疏)를 올렸다.

 

즉, 강원도 주민들이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극도로 곤궁한데도 왕실은 궁궐축조에 필요한 동량(棟樑)을 조달하고자 경차관(敬差官)을 파견하여 도민들을 가혹하게 독촉하였다. 또한 주민들은 농사를 전폐하다시피하고 선비나 노비까지도 역사에 동원되고 있는 실정이라는 당시의 민폐를 올바로 지적하였다.

 

이어 궁궐축조의 중지를 주장하였으나 왕실에 의하여 묵살되었고, 이 상소로 인하여 파직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 중에 아버지를 모시고 조종현(朝宗縣:경기도 가평)으로 피신하던 중 아버지의 상을 당함에 그 곳에 임시로 장사 지냈는데, 왜구의 노략질과 살육이 심하여 주민들 모두가 도망을 갔음에도 불구하고, 묘소를 지키기 위하여 끝까지 남아서 낮에는 산에서 왜적을 피하고 밤에는 여막으로 돌아와 시묘를 하니 마을 사람들이 그 효성에 감동하여 양식을 가져다주고 친척처럼 보살펴주어 복을 마쳤다. 1618년 조정에서는 최광필의 지극한 효행을 기려 효자 정려를 내렸다.

孝子贈通政大夫承政院都承旨兼 經筵參贊官春秋館修撰官藝文館直提學尙瑞院正

行通訓大夫吏曹正郞崔光弼之門

효자증통정대부승정원도승지겸 경연참찬관춘추관수찬관예문관직제학상서원정

행통훈대부이조정랑 최광필지문

萬曆四十六年七月 日立 1618

만력사십육년칠월 일립

烈女學生崔聖集妻孺人全州李氏之閭    今上卽位二十四年丁亥四月日 命旌

열녀학생최성집처유인전주이씨지려  금상즉위이십사년정해사월일 명정  1887

정려중건기

공조정랑 최공묘지명

奮忠贊謨立紀靖社功臣 正憲大夫 新豊君 谿谷張維 撰

분충찬모입기정사공신 정헌대부 신풍군 계곡장유

議政府左參贊司憲府大司憲 成均館祭酒 同春宋浚吉 書

의정부좌참찬사헌부대사헌 성균관제주 동춘송준길

// 강릉최씨 강원도도사 효자 최광필(崔光弼) 가계//

증조부 예빈시참봉 최사순(崔士淳)

조부 왕손사부 최복경(崔福慶) 최경복(崔慶福)

부친 사헌부감찰 최영(崔韺)

모친 사천목씨, 사헌부감찰 목함(睦諴)의 따님

        강원도도사 효자 최광필(崔光弼

        배위 무송윤씨, 증 영의정 윤언청(尹彦淸)의 따님

                장남 중추부첨지사 최율(崔嵂)

                차남 귀후서별제 최업(崔嶪)

                삼남 진사 최집(崔㠍)

 

 

 

 

 

承旨公孝子旌門移建記

승지공효자정문이건기

 

 

 

 

學生崔聖集妻 孺人全州李氏 烈女碑

학생최성집처  유인전주이씨  열녀비

 

 

 

의;

의사 최상집 유적

崔相集義士抗日運動追慕碑

최상집의사  항일운동  추모비

항일의사 남호 최상집(南湖 崔相集,1849~1909)

본적 충청남도 홍성군(洪城郡) 홍주면(洪州面)출신으로 남포현(藍浦縣) 황동(篁洞, 현 보령시 응천읍 소황리)에서 최규석(崔奎錫)과 전주이씨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강릉(江陵)이고, 자는 중일(重日·仲一)이며, 호는 남호(南湖)이다. 장릉참봉을 역임하였다.

 

1906년 이조참판을 지낸 퇴초자 민종식(退樵子 閔宗植,1861~1917) 의병부대에서 소모장(召募將)으로 활동하였다. 소모장은 의병들을 모으는 역할을 담당하기 때문에 의병장이 가장 믿을만한 사람에게 맡기는 직책이었다.

 

민종식은 1896년부터 1906년까지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민종식은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적극적으로 의병투쟁을 통해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기로 하고, 가산을 팔아 1906년 3월 15일 다시 의병을 일으켰다. 그리고 민종식을 의병장으로 추대한 의병부대는 격문과 각국의 공사들에게 보내는 청원문과 통문을 작성하였다. 그리고 주민들에게는 홍주성 안에 살고 있는 일본인과 부일세력을 잡아오면 상금을 주겠다고 방을 붙였다. 이때 민종식 의병부대에 동참한 것으로 추정된다.

 

민종식 의병부대는 1906년 5월 20일 일제 군경과의 격전 끝에 홍주성을 함락시킨 후, 조정에 을사오적과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처형할 것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일본군은 곧바로 홍주성을 향해 병력을 증파하였다. 이토는 일본 육군 주차헌병군 사령관에게 군대 파견을 명령하였다. 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는 보병 2개 중대를 홍주에 파견하였고, 지역의 경찰·헌병·진위대에게도 협조하도록 명령하였다.

 

며칠간 공성전이 이어진 후 민종식 의병부대는 시가전을 시도하였으나 결국 실패하면서 6월 4일 홍주성을 빼앗겼고, 의병 300여 명이 전사하였다. 이 과정에서 결국 지도부 상당수와 함께 붙잡혀 일본 쓰시마섬(對馬島)으로 유배되었다. 운초 문석환(雲樵 文奭煥,1869~1925), 미호 신보균(眉湖 申輔均,1862~1912) 등과 함께 약 3년간 쓰시마섬에 유배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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