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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녕군이창응興寧君 李昌應, 연령군이훤延齡君 李昍, 명빈박씨

구름에 달

by 碧巖 2016. 2. 16. 2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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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녕군 이창응(興寧君 李昌應, 1809718~ 182821)

조선시대 후기의 왕족으로 장조의 서2남 은신군(恩信君)의 손자이며,

흥선대원군과 흥인군의 백형(伯兄)이고, 계동궁(桂洞宮) 사손(嗣孫)이다.

본관은 전주, 휘는 창응(昌應), 자는 유백(裕伯),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興寧君은 자녀 없이 일찍 요절하여 동생 흥완군 이정응의 아들 이재원을 사후 양자로 삼았다.

사후 조카 고종 즉위 후 1865년 고종의 특명으로 이조판서 지종정경에 추증되었다가

3일만에 다시 신정왕후 조대비의 특명으로 증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장조의 서2남 은신군(恩信君)의 손자이며, 흥선대원왕의 백형(伯兄)이다.

아버지는 남연군 이구(南延君 李球)이고, 어머니는 군부인 여흥민씨(郡夫人 驪興閔氏)이다.

그는 계동궁의 봉사손이 될 위치였지만 아버지 남연군보다 먼저 사망하여,

남연군 사망 후에는 그의 조카이자 양자인 이재원이 계동궁 사손직을 상속받게 된다.

 

흥녕군은 남연군 이구와

노봉 민정중의 4대손 선공감가감역 민경혁의 딸 여흥민씨의 장남으로 1809(순조 9) 탄생하였다.

1822(순조 22) 1227일 수원관(守園官)을 지내고 같은 해 13세에 소의대부에 흥녕군에 봉작되었다.

이어 순조의 생모 수빈박씨의 묘를 관리하는 행 휘경원수(徽慶園守)에 임명되었다.

182821일 향년 20세로 별세하였다. 사망당시 그의 관직은 승헌대부 흥녕군이었다.

아들이 없어 바로 흥완군 이정응의 아들 이재원을 사후 양자로 입양하여 부인 임천조씨가 양육했다 한다.

 

조카 고종 즉위 후 1864(고종 1) 79일 시호를 정간(貞簡)에 추증하였고,

1865910일 이조판서 지종정경 겸 지경연 의금부 춘추관 성균관사 오위도총부도총관이 특별 추증되었다.

다시 1865914일 신정왕후 조대비의 명으로 특별히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영종정경에 추증되었다.

묘소는 경기도 시흥군 하북면 번대방리(서울특별시 동작구 대방동에 안장되었다가,

후에 아버지 남연군의 묘소가 경기도 연천군에서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가야사터로 옮겨지자

1871820일 아버지 남연군 묘소 근처인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옥계리 가양산,

가야사터 근처 옥계저수지 언덕에 이장되었다.

 

가족관계

양 조부 : 은신군(恩信君, 1755- 1771)

양 조모 : 남양홍씨, 홍대현의 딸, 홍대용의 종질녀

생 조부 : 이병원(李秉源, 진사, 사후 증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 인평대군의 5대손이)

아버지 : 남연군(南延君, 1788- 1836)

어머니 : 군부인 여흥민씨(郡夫人 驪興閔氏, ?- 1831)

동생 : 흥완군 이정응(興完君 李晸應, 1815- 1848)

동생 : 흥인군 이최응(興寅君 李最應, 1815- 1882)

동생 : 흥선대원왕(興宣大院王, 1820- 1898) 이하응

부인 : 임천조씨(1805- 1871614) - 참봉 조재익의 딸

아들(양아들) : 증 완림군 이재원(完林君 李載元, 1831- 1891),

동생 흥완군 이정응(興完君 李晸應, 1815- 1848)의 아들.

자부(양자부) : 증 정경부인 청송심씨, 판서 심우영의 딸

양손녀 : 이씨

손녀사위 : 심상만, 본관은 청송

양손녀 : 이씨

손녀사위 : 조준호, 본관은 임천

자부(양자부) : 정경부인 김씨(貞敬夫人 金氏), 양자 증 완림군 이재원의 후처

 

 

 

 

 

 

흥녕군 이창응묘역 후경 예산군 덕산면 옥계리 381-20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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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령군 이훤(延齡君 李昍)( 1699613~ 1719102모친 명빈박씨

그는 숙종의 서자로 명빈 박씨 소생이며 경종, 영조의 이복 동생이다.

입양 계통상 흥선대원군의 고조부가 된다.

처음 이름은 인수(仁壽)였다가 뒤에 훤()으로 개명하였다. 자는 문숙(文叔), 시호는 효헌(孝憲)이다.

 

5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부왕에 의해 자랐으며,

숙종은 6세 이후에 봉군하는 법을 어기고 6세에 그에게 군의 작위를 내렸다.

171920살에 사망하면서 어머니 묘소 옆에 안장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사후 금천 번당리에 안장되었다가 후일 금천이 경성부로 편입되면서 구획정리를 함에 따라

예산군 덕산면으로 어머니 명빈 박씨의 묘소와 함께 이장되었다.

가계상 그의 양증손이 되는 남연군의 후손들은 그의 제사만 받들 뿐,

사도세자를 강조하다가 대한제국 시대인 20세기에 접어들어서야 연령군을 선조로 인정하였다.

 

1699(숙종 25) 613일 숙종과 후궁 통정대부 박효건(朴孝健)의 딸 명빈 박씨의 아들로 창경궁 집복헌에서 출생.

숙종의 서자이자 여섯째 아들이 된다. 태어날 때의 이름은 인수(仁壽)였는데 후에 훤으로 고쳤다.

모친인 명빈 박씨는 1703년 그가 5세가 된 해에 세상을 떴다.

숙종은 죽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어미를 찾는 어린 아들을 애처로워하며 조정 신료들 앞에서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그는 일찍이 한 번 꿈속에서 한 사람을 보고 궁인에게 어머님의 모습을 물어보니,

자신이 꿈속에서 본 모습과 상당히 같았으므로 오열했다 한다.

그의 나이 5세에 숙종은 그의 이름을 훤으로 고쳐 주었다.

그 직후 숙종은 6세 이후에 봉군하는 법을 무시하고 5세에 불과한 그에게 연령군의 군호를 내렸는데,

이에 대해 조정신료들이 반발하자 숙종은 반대하는 대신들을 처벌하면서까지 봉작식을 강행했다.

그는 오랫동안 소갈병을 앓았다 한다. 신도비에 의하면 '오랫동안 가슴을 답답해했는데,

마침내 소갈병이 생겼는데 병이 발작하면서 사제로 나왔다가 조금 차도가 있으면 도로 들어갔다'는 것이다.

 

 

숙종의 총애가 각별해 숙종의 세 아들(경종, 영조, 연령군) 중 가장 두드러지게 사랑을 받았다.

17047세의 나이로 종친부 당상관의 작위를 하사받았으며,

17079세의 나이로 종친 임원군의 외손녀이자 판돈령부사 김동필(金東弼)의 딸인 김씨와 가례(嘉禮)를 올렸다.

1708년 출궁을 앞둔 그의 제택을 정하는데 숙종이 수만 냥을 들이려 하자

부제학 조태구 등이 지 1707년에 정한 연잉군의 제택에 들인 비용이 2천 냥에 불과하였음을 지적하며 반대하였다.

조정의 반대가 극심하자 숙종은 정명공주의 저택을 구입하여 연령군에게 제택으로 하사하였는데

무려 200칸에 이르는 이 거대한 저택은 본시 연잉군이 사려고 오랜 기간 공을 들였지만

1707년에 숙종이 사지 못하도록 금한 것이었다.

이후에도 이 저택을 보수하는데 주춧돌을 바꾼 비용만도 중인 4가구의 재산과 같다는 지적이 있었다.

1711(숙종 37) 11월에 연령군은 10여 일간 천연두를 앓았다. 1718년 도총관으로 임명되었다.

 

병든 아비의 변을 직접 맛을 볼 만큼 지극한 효성으로 숙종의 병수발을 들어오던 연령군은

1719102, 21세의 젊은 나이로 아무런 병색조차 없이 불현듯 가회방 사저에서 갑자기 급사하였다.

그의 사망 소식을 전해들은 숙종이 오열을 하며 제택으로 친림하려 하였지만 군신들의 반대로 갈 수 없었다.

숙종은 궐밖에 나가 직접 연령군의 마지막 모습과 염습을 지켜보겠다고 하였으나, 신하들이 애써 반대하여 그만두었다.

 

그의 이복형인 왕세자(경종)는 군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친림을 강행하였지만,

군신들이 실의에 빠져있는 숙종에게 나아가 왕세자의 친림을 정지하기를 청하기에 이르자

친림단자를 거두고 상차에는 숙종을 모시고 연령군의 제택으로 친림할 것임을 통보하였지만 이루지 못했다.

왕세자는 존현각(尊賢閣)에 나아가 죽은 아우를 위해 거애(擧哀)하였으며,

스스로 제문(祭文)을 지어

 불러도 응답하지 않고 막연히 소리가 없으니, 끝이난 이 세상에서 공연히 의형(儀形)만을 생각하는구나.

가는 세월 흐르는 물 같아서 산으로 갈 날 기약이 있도다.

금양(衿陽) 떠날 날이 하룻밤뿐인데 무정한 달빛은 천추(千秋)토록 비치리라.’

극도에 이른 우애를 드러냈다.  이후 숙종이 글을 지어 제사를 지내고 친히 묘문을 지었다.

사후 그에게 후사가 없음을 안타깝게 여긴 숙종은

소현세자의 직손인 밀풍군의 아들들 중 차남 상대(尙大)를 지명하여 양자로 들여 후사로 삼게 하였다.

연령군은 어려서 어머니가 돌아가 얼굴조차 제대로 기억 못하는 것을 슬퍼하며

어머니의 곁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겨 금천현 번당리(衿川縣 樊塘里; 현 서울특별시 동작구 대방동)에 묻혔다.

신도비문은 이이명이 짓고, 글은 조태구가 썼으며, 민진원이 돌에 새겼다.

1725(영조 1) 배위 상산군부인(商山郡夫人) 김씨(16981725)29세로 사망했다.

한편 1727(영조 3) 1월 연령군 집안의 종이 백성과 싸웠는데,

종부시에서 그 백성만 잡아가 문초하다가 죽어 물의를 일으켰다.

 

그 해 12월에 양자 공을 들여 상원군(商原君)으로 봉했다.

후일 그의 제사는 운현궁 남연군의 후손들이 받들게 되었지만,

남연군의 후손들은 연령군의 후손이 아닌 사도세자의 별자 은신군의 후손이라 강조하였다.

또한 스스로를 남연군파라 지칭하였다. 20세기에 와서 연령군을 시조로 보고 연령군을 선조로 인정하기 시작하였다.

1935년 경성부 구획정리 때 그의 묘소는 경성부 대방정에서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구 가야사터 근처에 어머니 명빈박씨의 묘소와 함께 이장되었다.

가야사터는 연령군의 양증손 남연군 묘소가 있는 곳이다.

 

가족관계

할아버지: 조선 18대 국왕 현종(1641~ 1674)

  아버지: 조선 19대 국왕 숙종(肅宗, 1661~1720)

  어머니: 명빈 박씨(䄙嬪 朴氏, ?~1703)

    아내: 군부인 상산 김씨(郡夫人 商山金氏, 1698~1725)

     장남(양자, 이후 파양): 상원군 이공(商原君 李糿, ?~1733년 음력 621).

             소현세자의 증손인 밀풍군의 차남으로 후사 없음. 1728(영조 4)에 이인좌의 난에 연루로 사후 파양되었다.

   차남(양자): 낙천군(洛川君, ?~1737). 후사 없음.

   장손자(양손자, 이후 파양) : 달선군 이영(達善君 李泳, 1731~1748)

   차손자(양손자) : 은신군 이진(恩信君 李禛, 1755~1771)

                   연령군 이훤延齡君 李昍, 군부인 상산 김씨 묘비석

 

 

 

 

 

연령군 이훤(延齡君 李昍)의 모친   명빈 박씨(䄙嬪 朴氏) 묘역

 

 

명빈 박씨(䄙嬪 朴氏, ? ~ 1703년 음력 715)는 조선 숙종의 후궁이다.

원래 상궁(尙宮)이었다가 숙종의 승은을 입은 지 10여 년이 지난

1698(숙종 24)에야 회임을 한 공으로 내명부 종4품 숙원(淑媛)에 책봉되어 후궁이 되었고,

1699(숙종 25)에는 단종의 복위를 기념한 1계급 특진으로 종2품 숙의(淑儀)로 진봉되었다.

1701(숙종 27) 음력 323 귀인에 올랐다가

1702(숙종 28) 숙종의 계비가 되어 새로이 내명부 수장이 된 인원왕후의 왕비 책봉을 기념한 1계급 특진으로

    음력 1018일에 정1품 빈의 자리에 올라 명빈( 嫇嬪)이 되었다.

     그녀는 숙종의 후궁들중 숙빈 최씨와 신분이 친했다.

1703(숙종 29) 음력 715일에 사망하여 음력 917일 금천(衿川)에 내명부 정1품의 예우로 예장되었다.

장사되기에 앞서 그녀의 일가 친척인 박동지(朴同知)가 관아에서 보낸 관판(棺板: 관을 만들 목재)

구차함을 호소하니 숙종이 해당 관원 및 아전까지 모두 체포하여 추문·나문토록 하고

기한 내에 관판을 구하지 못하면 사대부가에서 관판을 찾아내라는 명을 내렸다.

그녀의 장례를 앞둔 음력 93,

숙종은 명빈의 초상에 제사를 주관할 사람이 없고 방제에 아명(兒名)을 넣을 수 없다는 이유로 

6~7세에 왕자를 봉작하는 관례를 깨고

5세인 그녀의 외아들을 왕자군()으로 책봉하여 연령군으로 삼고 헌(또는 훤, )의 명호를 주었다.

 

 

연령군 이훤(延齡君 李昍)의 모친   명빈 박씨(䄙嬪 朴氏) 묘비석

그의 묘소는 금천현 번당리(衿川縣 樊塘里; 현 서울특별시 동작구 대방동)에 안장되었다.

1720년 그의 아들 연령군은 죽으면서, 자신이 어려서 어머니가 돌아가 얼굴조차 제대로 기억 못하는 것을 슬퍼하며

어머니의 곁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겨 그의 묘소 근처에 묻혔다.

1935년 경성부 구획정리 때 경성부 대방정에서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구 가야사터 근처에

아들 연령군의 묘소와 함께 이장되었다. 가야사터는 연령군의 양증손 남연군 묘소가 있는 곳이다.

별칭

숙원 박씨 (淑媛 朴氏)

숙의 박씨 (淑儀 朴氏)

귀인 박씨 (貴人 朴氏)

 예산군 덕산면 옥계리 산 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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