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연군 이구(南延君 李球, 1788년 8월 22일 ~ 1836년 3월 19일)
왕족으로 이름은 구(球),
자는 치수(稚受)이며 원래 이름은 채중(采重)이다.
시호는 영희(榮僖)·충정(忠正)이다.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이며,
고종황제의 할아버지이다.
원래 인평대군의 6대손이나 뒤에 아들 없이 사망한 사도세자의 넷째 서자 은신군의 양자로 입양된 후
남연군에 봉해졌으며, 남연군의 묘소가 독일의 상인 오페르트에게 훼손당한 사건으로 유명한 인물이기도 하다.
철종실록에 의하면 그는 모범적 왕족의 한 사람으로 지명되었지만,
근무지 이탈 및 권력남용으로 지탄을 받아 순조실록에 기록되었다.
인평대군의 6대손으로 왕위 계승권에서는 멀었으나
그가 은신군의 양자가 되면서 계동궁의 상속권 및 왕위 계승권에 근접하게 되었다.
1788년 8월 22일 한성부에서 태어났다.
남연군은 조선 인조의 후손으로, 인조의 셋째 아들 인평대군의 5대손인
진사 이병원(李秉源)과 통덕랑 정의환(鄭義煥)의 딸 연일정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어려서 어머니 연일정씨를 잃고, 아버지 이병원은 광주김씨 김진구(金鎭九)의 딸과 재혼하였다.
원래 이름은 채중(寀重)이었는데,
순조 때인 1815년 은신군의 양자로 입적하면서 구(球)로 개명하였고 남연군에 봉해졌다.
인평대군은 다시 자신의 삼촌 능창대군의 양자가 되었으므로 그는 호적상으로는 능창대군의 7대손이 된다.
그의 가계는 인평대군의 직계 후손으로 인평대군의 아들이자 일찍 요절한 복녕군의 후손이다.
복녕군의 가문은 숙종 때의 삼복의 변에는 연루되지 않아 몰락하지 않고 왕족의 신분을 유지했지만
왕족으로서의 예우는 복녕군의 손자인 안흥군의 대에서 끊어졌다.
생가 할아버지 이진익과 생부 이병원은 평민 신분이었고,
생가 할아버지 이진익은 음서로 관직에 올라 참판을 지내고 증 의정부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생부 이병원은 훗날 관직이 없이 진사로 사망하게 되지만 특별히 증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1815년(순조 15) 12월 9일 순조의 명으로 자녀 없이 죽은 은신군의 양자로 지명되어 소의대부의 품계를 받았다.
1816년 중의대부로 승진하였고, 현륭원 참봉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그는 은신군의 양자가 되어 계동궁에 보내졌지만,
자신의 본가 근처에서 생활하였고
이는 순조 16년 7월 그의 다른 비행들과 함께 전 정언 이이희로부터 탄핵당하게 된다.
1815년 12월 20일 수원관(守園官)으로 차출되었다.
그러나 수원관으로 차출되었으면서도 제사 보다는 용주사에서 술을 마시거나 고기를 구워 먹기도 했으며,
이조나 예조의 소속 관원도 아니면서 능참봉의 인사에 관여하였다.
이는 그대로 문제시되었지만 함구되다가 1816년(순조 16) 7월 13일 이이희(李履熙)로 탄핵을 당했다.
그 탄핵의 요점은
“ 만약 윤리를 어지럽힌 죄를 논한다면, 남연군 이구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경박한 성품과 패악한 버릇 때문에 선비로 있을 때부터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습니다.
그런데 가까운 종친이 되어서도 옛날의 버릇을 고치지 않고 혼궁에 들어오자마자
병을 칭탁하고 집에 돌아가 평인(平人)처럼 고기를 구워 먹고 주사위를 던졌으며,
〈수원관(守園官)으로서〉 원소(園所)에 가서는 고을의 노예를 데리고서
용주사(龍珠寺)의 꽃과 버들 속에 술에 취하여 평립(平笠)을 벗어버렸으며,
연지(蓮池)에 고기를 잡으면서 포건(布巾)을 거꾸로 썼습니다.
무뢰배를 불러 모아 백성의 가산을 때려 부수었으므로, 백리 안의 사람들이 가게를 닫고 도망해 피하였습니다.
악한 행실은 바로 짚자리를 깔고 거처하는 곳인데,
요사스러운 기생들을 데리고 와서 낭자하게 술을 마시고 즐기었으며,
혼궁 앞에서 가마를 타고 곧바로 들어오고,
침원(寢園)에서 가마를 타고 마음대로 달리는 등 흉패(凶悖)한 행동이 갈수록 더욱 심하였습니다.
능의 참봉을 바꾼 것으로 말하더라도 한달 전에 강제로 그 수종자(隨從者)를 바꾸고
곧바로 그의 형으로 차출하였으니, 이것도 조정을 얕잡아 보는 하나의 큰 안건입니다.
이와 같은 흉하고 더러운 무리를 결코 수원관이나 가까운 종친의 서열에 둘 수 없습니다. ”
라고 이이희(李履熙)는 남연군을 탄핵하였다.
그러나 순조는
입양의 형식이지만 자신의 가까운 친척이라는 이유로 일을 무마시키고 이이희의 자격을 박탈하였다.
그리고 7월 15일 남연군에게 사람을 보내 위로하였다.
1817년 수원관으로 재직 중, 수원관 근무의 공로를 인정받아
12월 15일 안구마(鞍具馬)와 노비·전결(田結)을 상으로 받고, 승헌대부(承憲大夫)로 승진되었다.
그러나 남연군 집 하인들이 일반민의 재산을 빼앗았고,
남연군 집의 문객인 장삼철(張三哲)·최치성(崔致聖)은 허위 문서를 만들어 타인의 채권을 가로채자
1819년 형조로부터 거듭 탄핵을 받고 파면되었다.
“ 부교리 임안철(林顔喆)의 논계(論啓)로 인하여 남연군궁(南延君宮)의 하속(下屬)이 간사한 짓을 하고
공갈 협박하여 평민에게 해를 끼친 정상을 거듭 조사한즉,
장삼철(張三哲)·최치성(崔致聖) 두 사람이 문하에 출입하여 도서문적(圖書文蹟)을 청촉하여 만들어 내고,
타인의 채권을 궁전(宮田)이라 핑계대어,
지평(砥平)에 사는 고성인(高姓人)에게 전화(錢貨)를 강제로 수봉(收捧)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청컨대 성상께서 재결하소서.”
순조는 '나이 어리고 마음이 약해서 남의 꾐에 빠져 이와 같은 패려궂은 짓을 하였으니, 매우 놀랍다.
그 죄상을 논한다면 유방(流放)하여도 오히려 헐하다 하겠으나, 그 노모를 생각 하여 우선 보류하라.
남연군(南延君) 구(球)에게 삭판의 율을 시행하여 허물을 뉘우치고 몸을 신칙하게 하며,
잡인과 접촉 못하게 하고 궁속을 단속하여 개과 천선을 도모(圖謀)하도록 하라.'며
가볍게 견책하고 직책을 박탈하는 선에서 사건을 종결지었다. 그러나 1년만에 그는 다시 복직되었다.
1820년 오위도총부 도총관에 임명되고 같은 해에 숭헌대부로 승진했다.
약간의 한학을 하던 그는 직접 네 아들을 가르쳤는데, 그중 넷째 아들의 재주가 비상함을 알아보았다.
은신군의 양자가 되면서 그는 화가이자 학자인 추사 김정희와는 이종사촌간이 되었는데,
김정희의 큰어머니이자 양어머니인 남양홍씨와 그의 양어머니이자 은신군의 부인 남양홍씨는 자매간이었다.
이 인연으로 그는 특별히 자신의 넷째 아들 흥선군 하응을 김정희 문하에 보내 글을 배우게 하였다.
1821년(순조 21) 가덕대부로 승진했다.
1821년 4월 10일에 효의왕후가 자경전(慈慶殿)에서 사망하자 남연군은 종척 집사(宗戚執事)로 차출되었고,
수릉관(守陵官)에 겸임되었다. 그러나 양어머니 남양홍씨의 상을 당하여 그해 11월 13일 수릉관에서 면직되었다.
후에 인현왕후의 백부 민정중의 4대손 민경혁의 딸 군부인 여흥민씨와 결혼하여
흥녕군, 흥완군, 흥인군, 흥선대원군의 4남과 1녀를 두었다.
다시 정조의 묘 건릉 수릉관이 되었다가
건릉의 수릉관으로 재직하는 공로로 건릉 수릉관 재직 중인 1822년 의덕대부, 1825년 흥록대부로 승진했다.
1828년(순조 28) 4월 청나라에 진하사가 파견되자
진하 정사(陳賀正使)로 부사(副使) 이규현(李奎鉉), 서장관(書狀官) 조기겸(趙基謙)을 대동하고 연경에 다녀왔다.
그해 8월 12일 청나라에서 귀국하여 청나라 황제의 친필을 순조에게 전달하였다.
1829년 3월 영조 진종, 정조의 어필 간행을 상주하여 성사시켰다.
1828년 2월 1일 장남 흥녕군 이정응이 19세로 요절했고 1831년에는 부인 여흥민씨가 사망했다.
1832년(순조 32) 오위도총부 도총관에 임명되었고,
1833년 다시 오위도총부 도총관에 재임명되었으며 1834년 현록대부로 승진하였다.
1834년 11월 13일 순조가 사망하자 왕세손 헌종의 명으로 종척 집사로 빈전에 참여하였다.
안동김씨 세도하에서 불우한 세월을 보내다 1836년 3월 19일에 병사했다.
有明朝鮮國顯祿大夫南延君兼五衛都摠府都摠管 贈諡忠正完山李公球之墓
郡夫人驪興閔氏祔左
1836년에 죽은 후에 처음에는 경기도 마전현 미산면 백자동(현 연천군 미산면)에 장사되었다가
다시 경기도 연천군 남면 남송정(南松亭, 현 연천군 군남면 진상리 큰피우개(大稷洞) 부락)에 장사되었다가
다시 충청도 덕산현 덕산면 상가리(현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5-29)로 개장되었다.
아들 흥선대원군은 약령(弱齡)에 부모상을 잇달아 당한 뒤 삼년상을 마치고
풍수가들이 길지라 일컬은 충청남도 예산군 가야산 중턱의 석탑(石塔) 자리인 현재의 위치로 이장되었다.
이때 가야사에 의문의 방화가 난 뒤,
흥선대원군 형제는
가야사가 소실된 자리에 아버지 남연군의 시신을 묻으려 땅을 팠지만 큰 돌이 있어 깨지지 않았다 한다.
두 형 흥완군과 흥인군은 밤에 도사가 나타나 자신의 집을 부순 대가를 받게 하겠다고 저주했고,
두 형의 악몽을 들은 흥선대원군은
네가 사람의 자손이라면 아버지를 좋은 곳에 모시려는 뜻을 저버릴수 없다며 호통친 뒤 돌이 깨졌다 한다.
1845년 덕산 가야산 북쪽 언덕 구광지에 이장되었던 그의 시신은 다시 이장되어,
1846년 3월 18일 같은 가야산 가운데 언덕 건좌(乾坐)로 이장되었다.
대원군은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이곳으로 이장하기 위해 가야사를 불태웠다.
고종은 그 덕택에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고 하여 가야산에 보덕사(報德寺)를 세웠다.
1866년 독일의 상인 오페르트가 남연군 묘소를 도굴하여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을 더욱 악화시키기도 했다.
묘소는 1989년 12월 29일 충청남도기념물 제80호 《남연군의묘》로 지정되었다. 사후 순조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첫 시호는 영희(榮僖)였고 뒤에 고종 때 가서 시호가 개정되어 충정(忠正)의 시호가 내려졌다.
비석과 신도비는 손자 고종이 즉위한 후인 1865년 5월에 세워졌다.
비문은 당시 영의정이던 김병학이 짓고,
비석의 글씨는 종정경을 겸하던 아들 흥인군이 썼으며, 그의 손자인 이재원이 새겼다.
1868년(고종 5) 5월 10일 저녁,
통상 수교 요청을 거절당한 것에 앙심을 품은 독일인 오페르트에 의해
묘가 도굴 당하려 했으나 봉분 아래에 큰 무쇠에 도끼가 튀어 실패하였다.
남연군묘 도굴 미수사건은 서양인에 대한 흥선대원군의 감정을 자극하여 쇄국정책을 강화하는 계기가 됐다.
그의 증손자인 영친왕의 둘째 아들의 이름 역시 이구(李玖)로 그와 동명이인이기도 하다.
생조부 : 이진익(李鎭翼), 증 영의정
친백부 : 이병순(李秉淳)
친사촌 : 이낙중(李樂重), 참판
양5촌조카 : 이연응(李沇應), 이조참판
재종손 : 이재극
친숙부 : 이병준(李秉濬)
생부 : 이병원(李秉源), 진사, 영의정에 추증
생모 : 미상 친동생 : 이휘중(李彙重, 1803년 - ?)
친조카 : 이명응(李明應, 1827년 - ?), 형조판서
친동생 : 이도중(李䆃重, 1784년 - 1872년), 공조판서
양증조부 : 영조(英祖, 1694년 - 1776년)
양조부 : 장조(莊祖, 1735년 - 1762년)
양증조부 : 연령군 이훤(延齡君 李昍, 1699년 - 1719년, 증조부 숙종의 서자이다.)
양조부 : 낙천군 이온(洛川君 李縕, 1720년 - 1737년)
양 아버지 : 은신군(恩信君, 1755년 - 1771년)
양 어머니 : 남양홍씨, 홍대현의 딸, 홍대용의 종질녀
부인 : 군부인 여흥민씨(1788년 6월 26일 - 1831년), 민정중의 4대손 민경혁의 딸
장남 : 이창응(李昌應, 흥녕군(興寧君), 1809년 - 1828년)
차남 : 이정응(李晸應, 흥완군(興完君), 1814년 - 1848년)
손자 : 이재원(李載元, 1831년 - 1891년) - 백부 흥녕군(興寧君) 이창응(李昌應)에게 출계.
삼남 : 이최응(李最應, 흥인군(興寅君), 1815년 - 1882년)
사남 : 이하응(李昰應,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1820년 - 1898년)
손자 : 흥친왕(興親王)
손자 : 고종(高宗)
장녀 : 이씨
사위 : 신억(申檍, 관찰사 역임)
양외손자 : 신도희(申道熙), 사위 신억에게 아들이 없어 양자로 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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